베를린 탄츠파브릭(Tanzfabrik) 이야기 I

by 집나온 여자

2008년 2월 8일. 베를린에 도착한 다음 날. 시차도 적응이 안 됐고, 독일어는 거의 읽히지 않아 지하철역 이름조차 그림처럼 보이던 때, 어리둥절하게 짐을 챙겨, 탄츠파브릭으로 향했습니다. 2월 18일부터 5개월간 진행되는 무용 입문 프로그램(Vorausbildung)의 오프닝 클래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무용을 처음 배우려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 과정입니다. 만 18세 미만은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나이 제한은 없습니다. 늦깎이 입문자들에게도 기꺼이 문을 열어주는, 한국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그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유럽도 처음이고 독일도 처음. 긴장한 탓에 서둘러 출발했더니,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습니다. 서울의 매끈한 고층 건물들에 익숙한 내게, 낡은 공장 건물에 자리 잡은 탄츠파브릭은 낯설고도 낯익은 풍경처럼 다가왔습니다. 시간을 건너뛴 듯한 감각, 익숙하지 않은 공간감에 정신이 조금 아득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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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Tanzfabrik Kreuzberg의 전경(좌), 입구(중), 표시판(우)


오프닝 클래스가 시작되기 전, 참가자들이 하나둘 도착했습니다.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에서 온 힙합 댄서, 극장학 전공의 대학생, 유치원 교사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시 한국의 무용 입시학원처럼 이미 단련된 어린 무용수들이 모여 있을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어서 안도했습니다. 18세에서 35세까지 연령대도 다양했고, 대부분 무용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 부담 없이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참가자 중에는 트랜스젠더도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자리에 녹아든 모습을 보며, 내가 당연하게 여겨온 일상의 풍경들이 얼마나 한정적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오프닝 클래스가 끝난 뒤에는 개인 면담이 이어졌습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이끄는 사람은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예술대학, UDK의 무용 교수 기젤라 뮐러(Gisela Müller)였습니다. 독일어도 하지 못하고 나이도 스물아홉인 동양 여성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받아주었습니다.


한국에서 처음 안무 작업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주변에서는 우려 섞인 말들이 쏟아졌었죠. 결국 "무용을 배우러 독일로 간다"는 말조차 솔직하게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탄츠파브릭은 나이나 성별, 배경에 대한 선입견 없이 누구에게나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곳이라면 나도, 그리고 누구라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 글은 2008년에 작성된 것으로, 현재의 상황과는 내용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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