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이야기
아주 습관적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내가 잘못한 것은 뭐가 있지? 저 사람이 화날만한 상황이 있었을거야. 그래서 저 사람이 낸 화와 연결시키기 딱 좋을만한 무뿌리를 찾아 뽑아낸다. '여기 무뿌리가 있었군. 이 무뿌리만 없었다면 저 사람이 화낼만한 일은 없었을텐데 말이야.' 하지만 무는 맛있다. 무를 생채로 버무려먹어도 맛있고. 소고기 무우국을 해먹어도 맛있고. 단무지를 해먹어도 맛있다. 누군가가 갑자기 난데 없이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내는 화 때문에 나는 그렇게 무로 해먹을 수 있는 수많은 음식의 맛을 모르고 평생을 살게될지도 모른다.
일단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보자. 저 사람이 난데없이 화를 냈다. 난데없이 화를 낸 것은 저 사람이 책임져야 할 감정이다. 내가 그 감정에 책임지려고 머리를 굴리고 어떻게 해결해줘야 할지 찾아야 할 감정이 아니다. 저 사람의 감정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떡하나? 나는 이미 무뿌리를 찾아 뽑아냈는걸. 나는 이미 생각을 굴리고 있는걸. 그럼 나는 내가 책임지지도 말아야 할 감정을 또 책임졌다는 자책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나는 왜이렇게 한심한걸까? 나는 왜이렇게 용기도 없고. 다른 사람한테 휘둘리기만 하면서 사는걸까?
저 사람은 내 훈련상대다. 훈련이 다 끝났다 싶으면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훈련상대.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건 내가 어느 누군가의 '화'라는 감정의 원인을 찾아. 그 문제를 해결해서 그 사람의 '화'라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오롯이 나를 중심으로 이 사실을 관찰하면, 나는 끊임없이 이 사람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화라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나의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의 결과가 틀릴 수도 있고, 많이 헤맬 수도 있는 훈련이지만. 어찌되었건 화가 일어나고, 화가 가라앉는 과정을 보다 다리가 찢어지는 방식으로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내가 맛있는 무를 먹어본적은 없을지언정.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무를 맛있게 요리하는 훈련은 할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무를 맛있게 요리하는 훈련을 하다보면, 언젠가 한 순간에 나에게도 무를 맛있게 요리해줄 수 있게 된다. 그 사실을 캐치해내는게 중요하다. 내가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사실은 그 감정을 매니징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는 사실. 그 능력을 키우고 키우다보면 어느새 상대방은 개 허접 좆밥 쓰레기가 된다. 무우국 하나 제대로 끓이지도 못하고 심지어 무뿌리도 제대로 뽑아낼 줄 모르는 무능력한 사람. 무능력한 사람을 버릴지 말지는 내가 선택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감정은 매니징해서만 해결될 일은 아니다. 무를 줘서 감정을 가라앉히지 말고, 그냥 그 감정이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그 무능력한 사람은 무가 없으면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힐 외부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겠지만. 나는 무를 뽑을 수 있고, 무를 가지고 요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손에 쥔 채, 가만히 능숙하게, 사자가 언제라도 자신을 물려고 하면 바로 대처할 수 있는 조련사처럼 화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유심히 지켜볼 수 있게 된다. 화를 그 무능력한 사람처럼 끝까지 내보는 것도 가능하다. 화가 일어났을 때 스스로 무를 뽑는 움직임을 가져가는 것도 가능하다.
감정은 일종의 '명령'이다.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포커스를 옮길 근육만 제대로 키워낸다면 자신의 명령에 더 잘 복종할 수 있게 된다. 보다 더 자신의 직감에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방식으로만 명령에 복종하는 것에 내 자신이 가둬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누릴 다양한 방식의 자유를 상당 부분 제약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방식으로만 명령에 복종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의 명령에도 그 똑같은 방식으로 밖에 대처하지 못한다. 거기서 깨어 나와야 한다. 사실은 내 자신의 명령에게도 내가 스스로 무를 찾아줄 수 있다는 사실. 사실은 타인의 명령에 반응하여 무를 뽑았다가도 그 무를 나를 위해 무우국을 해줄 수 있다는 사실. 명령이 작동해도 굳이 무를 뽑지 않는 다른 해결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두루두루 살펴 익혀보는 것이다.
내가 다소 남들보다 경직되어있는 사람이라고 기죽을 필요 없다. 그런 나의 모습이 나의 감정에 예민하지 못하고 나는 둔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지만. 실은 나는 외부로 감지되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 수도 있다. 생각이 많고 여느 자극이 와도 그 격차가 크지 않은 것은 오히려 내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럴 때 감정이 요동치고 아무렇게나 내가 준비하기 힘든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내가 가진 능력을 자각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