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 하루의 기준을 다시 묻다
어떤 날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눈을 뜨고, 차를 마시고, 창밖을 좀 보다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져 있다. 분명 바쁘지는 않았는데, 기억에 남는 장면도 많지 않은데, 시간은 이미 저만치 가 있다. 그런 날이 있다.
반대로 어떤 날은 이상하리만큼 짧다.
몇 시간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 해내고 나면 마음이 묘하게 충만해진다.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참 알찼다”는 생각이 든다. 시계는 같은 속도로 흘렀을 텐데, 체감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요즘은 시간이란 게 참 이상하다고 느낀다.
시간은 늘 공평하게 주어진다고들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전혀 공평하지 않다. 어떤 날의 한 시간은 가볍고 텅 비어 있고, 어떤 날의 한 시간은 묵직하고 밀도가 높다. 시간은 분(minute)이나 시(hour)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상태와 감정, 집중의 깊이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멍하니 보내는 날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겉으로 보면 생산성 없는 하루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해야 할 일을 미뤘고, 성과도 없고, 특별한 기억도 남지 않는 날. 하지만 그런 날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마음이 아무 생각 없이 떠다니는 시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마치 컴퓨터가 백그라운드에서 업데이트를 돌리는 것처럼.
반대로 많은 걸 해낸 날들도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날의 집중과 실행력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이전의 멍한 날들에서 이미 서서히 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쉬어 보이던 시간, 멈춘 것 같던 시간이 사실은 다음 도약을 위한 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과가 보이는 순간만을 ‘유효한 시간’으로 여기지만, 보이지 않는 준비의 시간은 늘 그 이전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점점 ‘시간을 잘 쓴다’는 말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할 일을 많이 해내는 날만이 좋은 날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보이는 날은 정말 낭비일까?
어쩌면 시간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날의 나와 시간이 어떻게 만나고 있었는지, 그 상태가 어땠는지가 더 중요하다. 억지로 밀어붙인 하루는 길게 기억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간 하루는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둘 다 지금의 나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나는 이제 멍한 날의 나를 조금 덜 미워하려고 한다.
그날의 나는 게으른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세상과 나 사이의 속도를 맞추는 중일 수도 있고, 마음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숨을 고르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런 날이 없었다면, 깊이 몰입하는 날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은 늘 똑같이 흐르지만, 우리는 매번 다른 상태로 그 안에 들어간다.
그래서 어떤 날은 시간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고, 어떤 날은 시간이 응축된 결정처럼 손에 잡히는 느낌이 든다. 그 차이는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던 나의 결이다.
오늘이 어떤 날이었든,
빠르게 흘러가 버린 날이든, 많은 것을 해낸 날이든,
그 하루는 분명 나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조용히 비출 뿐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시간을 조금은 더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