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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Jun 01. 2022

럭셔리하게 살고 있는 승희에게

5월은 날도 따뜻하고 마음도 따뜻한 가정의 달, 맞지, 맞아. 그런데 이렇게 더웠던 가정의 달이 과거에도 있었던가 싶다. 여름을 가장 좋아하지만 아직 두 팔 벌려 환영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오겠다는 기별도 없이 훅 치고 들어와서 당황스러웠어. 벌써부터 기온이 30도를 웃돌면  여름 기온은 어디까지 올라갈까 지레 겁도 나더라. 우리 어렸을 적에 어른들은 경제가 힘들어서 큰일이다, 북극 얼음이 자꾸 녹아서 큰일이다, 지구 반대편에 전쟁이 나서 큰일이다 하고 걱정하시는데 정작 어린애들은 뭣 모르고 ‘그렇구나, 큰일이구나.’ 하고 말잖아. 잠깐 두려워 하긴 해도 살아온 날이 얼마 되지 않아서 위기에 대한 감각이 없을 때니까.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가 마음 편했어. 그때의 어른들 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요즘의 기습적인 더위가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 이러다 정말 가까운 미래에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경험하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돼. 세상사를 보는 눈이 복잡해졌어. 인구감소도 걱정이고, 기후변화도 걱정이고, 양극화도 걱정이고 세상 온갖 문제들을 돌아가며 골고루 걱정하고 있어. 한편으로는 과거에도 문제는 항상 있었고 인간은 항상 적응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해보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싹 가시는 건 아니더라.     


때 이른 더위에 놀랐다는 말로 시작은 했지만 그래도 계절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 5월이었다. 일 년 중에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놀 수 있는 날이 몇 일이나 되겠어. 4월은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찬 공기가 남아 있어 때 이르고, 6월은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라 햇살도 너무 강하고 비도 잦아지잖아. 5월은 따뜻한 햇살 덕에 땅의 냉기도 가시고 아직은 봄이라 공기도 쾌적해. 돗자리 펴놓고 소풍 즐기기 더없이 좋은 날씨야. 5월 한 달이라고 해도 돗자리를 펼 수 있는 날은 겨우 주말뿐인데 함께 할 친구를 찾아서 약속을 잡으려니 그것도 일이더라. 이것저것 따지다가는 귀한 5월의 주말이 다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혼자 갔어. 커피랑 순대를 사서 동네 공원에 돗자리를 펼쳤다. 책을 들고 갔는데 돗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으려니 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서 오래는 못 읽겠더라. 책은 덮어 두고 순대 먹고 커피 마시고 아이들 노는 거 구경하면서 시간 보내다 돌아왔어. 공원에 앉아 책 읽는 게 내 책상에 앉아서 읽는 것 보다 몇 배 더 불편하지. 그래도 일 년 중에 몇 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봄, 공원, 돗자리, 커피가 내 5월의 숙제였거든. 그냥 모른 체 지나가 버릴까 하다가 감행했던 거였는데 그 감행이 참 뿌듯했어. To do list의 항목들 중 실천한 것에 줄을 그어 지울 때 느껴지는 쾌감 같은 것을 느꼈어. 어쩌면 소풍 자체의 기쁨보다 계획했던 것을 해냈다는 작은 만족감에서 오는 기쁨이 더 컸던 것 같기도 해. 요즘 그런 게 필요했었나 봐.     


지난 주말엔 남해를 다녀왔어. 매년 이맘때쯤 남해를 한 번씩 가게 되는 것 같아. 연애 초기에 제일 처음 갔던 여행지여서 그런지 계획하지 않는데도 이때쯤 한 번씩 가게 되네. 처음 갔을 때는 4월 말이었는데 유난히 햇볕이 뜨거웠어. 한여름 같은 절정의 더위가 느껴졌던 날이었고 그게 내 인생 최초의 남해였어.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남해는 처음이더라고. 처음 갔을 때 느꼈던 기분이 생생해. 낯설었어. 그 낯섦이 참 좋았어. 요즘은 어디를 가도 유명 커피 전문점, 대형 마트, 단골 체인 음식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니까 낯설다는 느낌 자체가 낯설어졌잖아. 귀해졌어. 그런데 남해는 익숙한 것들이 없더라고.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만들어 내는 그림부터가 이국적이었어. 해안가를 달리면 심심찮게 눈에 뛰는 죽방렴도 신기했고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나 봤던 다랭이 마을도 반가웠어. 남해의 첫인상이 참 좋았어. 그래서 또 가고, 또 가고 하는 건가 봐. 갈 때마다 다랭이마을 언덕배기에 있는 식당에서 고등어구이 정식을 만족스럽게 먹고 오는데 이번엔 멸치 쌈밥에 도전했어. 너무 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고사했던 메뉴였는데 이번엔 용기를 냈지. 죽방렴 멸치잡이로 유명한 남해를 갔는데 멸치 쌈밥을 맛보지 않는다는 게 왠지 중국집 처음 가서 자장면 못 먹어보고 온 것처럼 아쉬웠었거든. 거창하진 않더라. 고등어 조림의 고등어 자리에 멸치가 들어간 그런 음식이더라고. 맛있게 잘 먹었고 숙제를 끝낸 것 같은 후련한 맛이 났어. 그리고는 햇볕 쨍한 날과 딱 어울리는 시원한 팥빙수를 한 그릇씩 먹었다.      


남해를 몇 번 가다 보니 어지간한 명소는 다 둘러봐서 특별하게 어디를 가야겠다고 목적한 곳은 없었어. 네가 알고 있는 대로 나는 어디를 가느냐는 별로 안 중요해 여전히. 누구랑 가느냐, 가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느냐가 중요하지. 요즘엔 한가지가 더 추가되었어. 무엇을 먹느냐. 어릴 땐 낯선 곳에서 먹는 음식들을 좋아하지 않았어. 아무리 맛있다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잘 모르겠더라고. 식도락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 먹거리를 목적으로 여행을 나선다니 신기하다고 생각했어. 생각해보면 그땐 긴장해서 그랬던 것 같아. 낯선 곳에서 오감으로 들어오는 새로움에 노출되어 있느라 낯선 음식에까지 내어줄 여유가 없었던 거지. 지금은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어. 맛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만큼 즐거운 게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좋은 사람과 함께, 일상을 벗어나서, 낯선 공기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맛이 없는 게 이상하지. 행복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야 그지?      


이어령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진짜 부자는 이야기할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선생님 럭셔리한 삶이 뭘까요?“
”럭셔리한 삶.....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값비싼 물건이 아니고요?
“”아니야.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인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中     


이야기할 것들이라는 게 꼭 특별한 사건들을 말하는 건 아니잖아.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야. 우리의 소소한 하루들을 잘 들여다 보면 빛나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그런 것들이 추억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서 어느새 우리 삶을 럭셔리하게 만드는 거지. 공원에 혼자 앉아 쌈장에 찍어 먹은 순대 한 접시, 여행 가서 도전하는 멸치 쌈밥 하나, 놋그릇 가득 에베레스트산처럼 얼음을 쌓아 올린 팥빙수에 담긴 이야기들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주는 거야. 5월엔 투자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재산이 많이 늘었어. 그냥 가만히 두면 시간이 내 이야기들의 색깔을 다 가져가 버릴 테니 사진으로 남기고 글로 남겨서 간직해두고 싶다고 생각했어. 부자들은 자산이 스스로 일을 하도록 자산 관리라는 것을 한다잖아. 내 자산들도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야겠어.    

  

글을 너무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글을 못쓰게 만드는 방해꾼이 되는 것 같아. 나 같은 경우는 특별히 글에 대한 권태가 온 건 아니었고 가장 최근에 설정한 글감이 문제였어. 잘 풀리지 않는 글감으로 시작했는데 그래도 완성을 하겠다는 오기가 발동해서 꾸역꾸역 쓰다가 갑자기 하기 싫어져버렸거든. 하기 싫어지는 건 한순간인데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네. 습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워. 안 하는 버릇으로 한 주 두 주 지나니까 이미 몸과 정신이 안 하는 것에 길들었어.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 붙잡아 와야겠지. 잘 될지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겠다. 다시 한번 생각하게 돼. 즐거워서 시작한 일도 언제나 즐거울 순 없다고. 하기 싫어질 땐 과거를 한 번 돌아보면 답이 보이잖아. 하기 싫어질 때마다 그만두고 그 다음이 어땠는지 보면 항상 미련이 남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했어. 정말 하기 싫어서 그런 거냐고 찬찬히 마음속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더 잘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투정을 부린 거였어. 지금도 그래. 더 잘하고 싶은 거지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야. 더 빨리 잘하고 싶은 조급함이 문제야, 문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책 읽고 이야기 나눌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정말 복이라고 하잖아. 우리는 함께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아하고, 책과 삶을 글로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도 좋아하잖아. 어떻게 이런 행운이 인생에 주어졌을까? 편지를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복이야 정말 큰 복이야.‘하는. 글쓰기를 너무 안 하다 보니까 편지도 잘 안 써지더라. 그런데 신기하게 이쯤 쓰니까 재밌어졌어. 이미 다 썼는데. 글쓰기도 기술이라 주기적으로 기름칠을 해줘야 손도 머리도 잘 돌아가나 봐. 너무 오래 안 써서 먼지가 뽀얗게 앉았더라. 이만큼 돌리는데 꽤 애를 먹었다. 너는 나보다 훨씬 성숙하고 행동력이 있어서 벌써 기름칠 끝내고 왕성한 이야기들을 생산하기 시작했잖아. 손도 느리고 엉덩이 무거운 나도 따라가 볼게. 멈추지 않고 걸어가 줘서 고마워.     


2022.6.1. 5월31일까지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한 은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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