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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Jun 17. 2022

빨래 하는 날

아침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잠결에 들린 비명 소리에 화들짝 눈을 떴다. 공포가 아닌, 고통에 짓눌린 두려운 비명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말은 한 음절도 섞을 수 없고 죽지 않을 정도의 호흡만 겨우 뱉어내고 있는 살려달라는 절규가 섞여있었다. 황급히 엄마방으로 뛰었다. 침대 밑에 쓰러져 한 손은 허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은 둘 데를 정할 수 없어 바닥과 벽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몸을 뒤틀고 있는, 숨이 넘어갈 듯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엄마가 거기 있었다. 어디가 아프신 거냐 물으니 '.. 허리..'라는 단어만 겨우 뱉어냈고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떨리는 손으로 119에 전화를 했다. '엄마가 허리를 다치셨다.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라고 말했고, 잠시 주소가 생각이 나지 않아 당황하면서 더듬더듬 주소를 불렀다. 전화를 끊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엄마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속수무책으로 초조하게 기다렸다. 몇 분 후 구급차가 도착했고 그분들은 한치의 조심성도 없이 엄마를 들것에 거칠게 눕혔다. 아니, 엄마가 스스로 눕도록 지시했다. 좀 잘 도와달라고 소심하게 항의했고 조금 화가 난 채로 입을 꾹 다물고 구급차에 올라 사이렌 소리와 함께 대학 병원으로 달렸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엄마는 수면제 없이는 1시간도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다. 수면제를 먹고 자도 기껏해야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날들이 수두룩하다. 약 기운 때문인지 잠을 깰 때도 개운하게 깨지 못하고 몽롱한 상태인 경우가 많은데 그런 채로 침대에서 내려오시다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셨다. 그 순간 척추에 금이 갔다. 금 간 척추뼈를 붙이는 응급수술을 하셨고 얼마간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엄마가 혼자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지실 때까지 병실에서 잠을 자며 엄마 간병을 하게 되었다. 환자 침대 아래에 비치되어 있는 보호자용 간이침대는 몸을 반듯하게 누우면 양 옆으로 한 뼘도 채 남지 않을 정도로 폭이 딱 맞았고 길이는 딱 내 발 길이만큼 짧았다. 불편했다. 침대가 너무 좁아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여러 사람이 들락거리는 문 앞 병상이라 바닥에 귀를 대고 있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잠들만하면 깨고, 다시 잠들만하면 깨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침이 되었다. 내 방에 있는 침대 생각이 절로 났다. 아침까지 덮었던 그 이불을 밤에 다시 그대로 덮고 잠든다는 게 얼마나 안락한 행복이었나를 가슴 깊이 느꼈다. 모든 게 불편한 나와는 달리 엄마는 병원 생활이 의외로 잘 맞으셨다. 규칙성 있는 병원 생활 덕에 집에서보다 더 깊은 잠을 주무셨고 수술 부위 회복 속도도 빠르셔서 건강하게 퇴원하셨다. 이후 나의 삶은 엄마의 병원 생활을 기점으로 변화가 생겼다. 간이침대에서 보낸 몇 날 밤이 나의 인생에 적잖은 흔적을 남겼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아침에 걷어내고 일어난 그 이불을 다시 덮고 잠들 수 있음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잠자리에 들 때마다 '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소 의외의 결론이지만 엄마의 허리 사건 이후 나는 조금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 '더'라는 단어에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전까지도 이미 엄마를 끔찍이 위하는 딸은 아니었다. 그런데 엄마가 아프시면 나도 함께 병원에 묶일 수 있다는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니 엄마가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내 시간을 더 가치 있게 써야겠다는 조바심이 생겼다. 그런데 염치없게도 내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들에서 집안일이 배제되었고 여전히 집안일은 엄마 차지가 되어버렸다. 나는 청소하고 밥하고 설거지할 시간은 없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다른 일들에 먼저 시간을 쓰겠다는 이기심이 더 뻔뻔해졌다. 단, 예외가 하나 있었다. 내 빨래는 꼭 내가 하겠으니 절대 엄마 마음대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다. 엄마는 꼴값이라고 하셨다. "내가 빨래를 너 보다 못 할 것 같으냐, 나를 못 믿어서 니 빨래는 가 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냐." 하시며 내 의중을 정확히 꿰뚫으셨다. (헉! 역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엄마다.) 물론 정확하게 맞추긴 하셨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다 큰 딸'이라는 말이 귀여워 보일 정도로 너무 많이 큰 딸의 속옷 빨래까지 엄마께 맡길 만큼 후안무치한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뭐든 마지노선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아무리 내 모든 걸 다 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적정 선은 지켜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빨래 독립은 실제 독립 시기보다 훨씬 앞서게 되었다.      


독립할 때 동생네로부터 15kg 통돌이 세탁기를 선물로 받았다. 오롯이 내게 속한 최초의 세탁기였다. 사실 이렇게 덩치가 큰 소유물이 생긴다는 것이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당연히 뒤따르는 책임감의 무게 때문이다. 세상에 그냥 저절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아니까. 엄마의 세탁기에 의탁하고 있었을 적엔 세탁기에 먼지 거름망을 그렇게 자주 빼서 씻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또 세탁조를 주기적으로 세척해야 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세탁기를 세탁하다니 말만 들어도 의아하지 않은가. 세탁기 주인이었던 엄마가 말없이 다 관리해주신 덕분에 그걸 모르고도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다닐 수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깨끗한 옷을 꺼내 입을 때의 상쾌함을 맛보려면, 개운하게 샤워하고 뽀송뽀송한 타월로 닦는 쾌감을 누리려면 빨래만 잘하면 되는 건 아니었다. 빨래를 하는 세탁기부터가 깨끗해야 하는 것이고 그건 오롯이 내 몫의 일이었다.      


빨래가 싫지 않다. 깨끗이 빨아 놓은 옷을 꺼내 잘 입고 다시 빨래통으로 보낸다. 조금 기다리다가 적정량의 빨래가 모이면 세탁기에 넣어 빨래를 하고 빨래가 다 되면 내 취향대로 넌다. 이렇게 옷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을 모두 내 관할 아래에 두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을 때 함께 빨아도 되는 빨래들을 분류하고, 늘어나면 안 되는 옷들은 빨래망에 소중하게 넣어준다. 수건은 색깔대로 줄 맞춰서 빨랫줄에 널며 흐뭇해하고, 양말은 짝 맞춰서 나란히 널어 두고 쳐다보면서 귀여워한다. 햇볕 쨍한 날,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원피스 자락을 보고 있으면 뿌듯해지고 스스로에게 빨래를 너무 잘했다고 마구마구 칭찬의 말을 쏟아낸다. '세상에 오늘 빨래를 정말 많이 했어.', '어쩜 저렇게 가지런하게 잘 널었을까.' 노래 부르듯이 감탄한다. 이불 빨래는 좀 미루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미루다가 어느 날 마음먹고 해버리기라도 한 날엔 하루 종일 대견해한다. '더 미루지 않고 드디어 해냈어.' 하고. 빨래는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다.


세탁 완료를 알리는 멜로디가 들린다. 세탁기 뚜껑을 여니 섬유유연제의 장미향이 순식간에 번진다. 흰색 수건을 하나 집어 탈탈 털어 건조대 제일 첫 줄에 넌다. 다음도 흰색 수건을 골라 집어 든다. 흰색을 다 널고 나면 다음 차례는 회색 수건이다. 색깔 별로 줄을 세워 수건을 너는 건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수건과 함께 빨랫줄에 널고 있는 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건의 양 끝 모서리를 맞추어 탁탁 잡아당길 때의 기분을 즐기고 있다. 빨래를 다 널고 나면 이 순간을 살아가는 충실한 마음이 빨래와 함께 바람에 나부낀다. 즐거운 마음으로 줄 맞춰 널어놓은 빨래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잠시 바라보며 살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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