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꾸준히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계속
Week 1, Day 1~5
983.79K and 361 days left
앞으로 본 매거진에는 365일간 1,000킬로미터를 달리기로 결심한 프로다짐러, 아 아니 초보러너의 기록을 남깁니다. 매일의 기록은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고, 브런치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묶어서 올릴 예정이에요:)
모든 게 운명처럼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일요일 밤, 영화 <Julie & Julia>를 보며 ‘나도 일 년 정도 꾸준히 할 수 있는 뭔가를 하고 또 기록했으면 좋을 텐데’ 하며 뭐가 좋을지 생각했다. 그리곤 몇 분쯤 흘렀을까, 지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빌 게이츠가 한 말을 우연히 읽게 됐다.
Most people overestimate what they can do in one year and underestimate what they can do in ten years.
일 년을 하든 십 년을 하든 무엇이든 시작하고 꾸준히 하면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할 일이 생길 거란 말인데, ‘그래서 뭘 하면 좋을까? 내내 하고 싶었지만 망설이거나 미뤘던 게 뭐가 있었지?' (다이어트랑 영어는 빼고)
글쓰기와 달리기였다.
언제나 글은 잘 쓰고 싶었고 공식적으로 일과 관련해 출판할 마음과 계획이 있다. (물론, 전국의 출판종사자 중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리고 달리기는 2년 가까이 나름 꾸준히 해왔지만 조금 나아졌어도 아직은 초보 수준에 가까우니 제대로 실력을 키우고 싶었다. 그리고 내심 달리기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브런치에 두어 번 발행했었으나 끝내기의 신께서는 나를 보우하시지 않았다.
운명처럼 모든 타이밍이 탁탁 들어맞았으니 이제는 외면해선 안되지, 안돼 하는데 마지막 운명의 순간이 하나 더 남아 있었으니.
주말에 읽을 책을 사러 온라인 서점에 접속했다가 내가 좋아할 책이라는데, 제목부터가 ‘그래, 써야만 하는구나’ 하고 만들었다.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미망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나의 내면에는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 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
그래서 나는 쓴다. 달리는 것을 쓸 예정이다. 내일부터 365일이 될 때까지 어떻게든 1,000K를 달릴 예정이다. 나눗셈으로는 하루에 3K가 채 안 되는 거리를 매일 달리면 1,000K을 채울 수 있다는데... 365일간 5백 개가 넘는 프랑스 요리를 한 사람도 있는데, 뭐! 해봐야지!
365 Days, 1,000K Running
그 여정을 시작합니다.
Day 1
4.84K 30:26 6'17''
995.16 K and 364 days left
프로젝트의 시작을 오늘로 정한 이유가 있다. 왜냐면 오늘은 ‘서울숲 러닝 클럽’의 공식적인 첫 모임이었기 때문. (하지만 첫 달리기는 서울숲 대신 한강이었다는 반전)
서울숲 러닝 클럽의 기원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나와 같은 오피스에서 일하는 E가 ‘아침 미팅 없는 날 같이 서울숲이나 한번 달리자!’고 말한 게 작년 봄이나 여름쯤이었나 보다. 순간의 의욕과 다짐이 넘치는 나는 ‘좋다 좋다 너무 좋다 하자 달리자’ 답했지만 금세 식었고, 가을에 함께 나간 마라톤 대회에서 각자의 퍼스널 베스트 레코드를 쟁취한 우리는 또다시 ‘같이 뛸까 너무 좋다 얼른 달리자’ 손뼉을 쳤지만 하반기의 일정과 행사는 쉬이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엔 3월에 예정된 첫 대회가 망할까봐 너무 걱정이 되니 ‘이제는 슬슬 훈련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했던 꽤나 진지한 마음이 드디어 실천으로 이어졌다. (원래는 2월 초부터 예정되어 있었으나 몇주를 미룬 건 비밀)
3월 말 서울 국제 마라톤을 진작에 등록해두고 디데이 카운트다운을 하던 나와 E와 H를 중심으로 S와 B가 조인해 다섯명의 (더없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숫자야) 첫 달리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다 드디어 오늘 함께 달렸다.
물론 출발은 같았으나, 저만치 앞서 달리는 E의 뒤통수를 오래 응시하며 (쫓아) 달렸다. 꾸준히(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달렸지만 나의 심폐지구력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좋아지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조금만 달리기를 쉬어도 1K를 내리 달리기가 어려워진다. 지난 토요일에서야 10분(1.5K)을 겨우 달렸기 때문에 다소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뒤통수만 보여줬지만 내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준 E 덕분에 2K를 내리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반환점을 돌아 출발 장소까지의 남은 3K도 그럭저럭 잘 달렸다. 이만하면 잘했지, 뭐.
오랜만에 한강 바람을 맞으며 5K를 달렸더니 ‘달리기뽕’에 취해서는 급기야 나의 이 프로젝트를 크루들에게 선언해버렸다 이제는 정말로 꼭 이뤄내야 할 미션이 되어버린 것. 그래, 꼭 해내고 싶은 일은 널리 널리 소문내는 거라고 했어. 잘했어 잘했어. 해내면 되지, 뭐.
아니 근데, 100K로 할 걸 그랬나?
Day 3
3.21K 20:02 6'14''
991.95 K and 363 days left
낮부터 비 소식이 있었다. 오늘은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라 아침 일찍 달리고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를 한 다음 오전 업무를 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오후 업무를 하는 일정을 계획했다. 나는 항상 계획이 분명한 편이다. 달리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빵집에 들러 살 빵의 종류와 점심 메뉴 모두 정해두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마실 커피의 잔 수까지.
하지만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 밖으로 나오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몇 분을 뭉개며 인스타도 보고 잠깐 영어 스피킹도 중얼중얼 따라 하고(말을 하다 보면 잠이 좀 빨리 깨는 편) 날씨도 한번 더 체크하고 (자기 전에도 봤지만 왠지 한번 더 보고 싶어, 몇 시에 비가 오는지 알고 싶어). 결국 삼십 분쯤 뭉개다 겨우 침대에서 벗어났다. 언젠가 친구가 운동을 할 때 시간 단위가 아닌 분 단위로 생각하는 게 귀찮음을 조금이나마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 ‘나도 앞으로 그렇게 해야겠어’ 혼자 중얼거렸다. 준비하는데 5분, 워밍업 스트레칭 5분, 3K 달리기 20분, 돌아오는 건 새지 말자.
7시 반쯤 공원에 나갔더니 아침 일찍 운동하시는 어르신만 몇 분 계시고 한산했다. 밤에는 그래도 운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역시 아침형 인간은 시니어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볍게 몸을 풀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늘의 BGM은 음악 어플에서 추천하는 ‘운동할 때 듣기 좋은 한국 락’이었는데 자우림의 Hey Hey Hey를 귀에 꽂고 달리니 정말 힘이 나더라.
하지만 1K를 달리고 10분에 가까워질 무렵 나의 오랜 친구가 인사를 건넸다, ‘조금 쉬었다가 달리는 거 어때?’. 진짜 고등학교 때 체력장 얘기까지 하면 정말 너무 구구절절한데 나는 오래 달리기에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 심폐지구력이 약하고 1분만 뛰어도 정강이와 발바닥이 아팠다. 사실 그 이유는 그저 운동부족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어쩐지 여전히 ‘난 원래 운동을 잘 못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태어났어’라고 변명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조금 힘들어지는 것에 금방 마음이 흔들린다. ‘아, 5분쯤 뛰었으니까 잠깐 쉴까? 딱 1K만 달리고 잠깐 걷자.’
(여기서 잠깐. 제가 달리기 진짜 못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나름 10K는 2번, 5K와 8K는 각각 1번씩 완주(물론 중간에 많이 걸었지만)한 이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 내가 알고 있는 것, 달리다가 멈추면 그다음에는 처음보다 더 빨리 쉬고 싶은 마음이 다가온다. 10분 달렸다가 한번 쉬면 그다음은 7분, 5분 그런 식으로 연속으로 달리는 거리와 시간이 줄어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달리기를 단순히 건강 또는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이라고 접근하지 않는다.
달리기는 나에게 ‘자꾸만 내 발목을 잡는 생각, 한계를 정하려고 하는 연약한 내 마음을 뿌리치는 연습’이다. ‘여기까지만’ 보다는 ‘할 수 있는 한’으로 마음을 바꿔먹는 연습이다.
달리기가 내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줄지, 그 영향이 훗날 내게 어떤 힘으로 또 돌아올지는 지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천천히 꾸준히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계속을 믿는 연습이 분명 나 스스로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 믿는다. 그래서 달리기가 어쩌면 내게는 명상일지도 모른다.
Day 4
4.16K 26:03 6'16''
987.79 K and 362 days left
10미터도 채 달리지 않았는데 왼쪽 발목에서 찌릿! 하고 스파크가 튀었다. 춥다고 스트레칭 대충 한 나를 탓해야지, 뭐 (그리고 사실 추운 것보다 달리기 끝내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사갈 만두 생각에 마음이 급했잖아!). 멈출까 하다가 에이 괜찮겠지 하고 계속 달렸는데 5분쯤 지났을까 정강이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나를 탓해야지. 근데 경험상 정강이가 아프다고 엄청나게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아서 (역시 모르는 게 약이다) 그냥 달렸다. 익숙하잖아, 아픈 거. 그리고 온갖 핑계로 자꾸 멈추고 싶은 마음도.
집에 돌아와 달리기 할 때 정강이 통증이 왜 느껴지는지 검색해보니 역시 유튜브는 답을 알고 있었다 (유튜버님들 존경합니다). 그건 바로 발목을 과도하게 힘을 주거나 무리가 갔을 때 오는 통증이라는 것. 초반에 찌릿! 했던 충격이 계속 정강이에 무리가 되었었나 보다. 실은 오늘 달리면서 처음부터 좀 신경 썼던 게 바로 주법이다. 달리기로 가장 무리가 많이 가는 부위라면 무릎일텐데 무릎에 통증이 없으려면 발 뒤꿈치보다는 앞이나 중간부터 착지를 해야 한다는 걸 이제 막 알게 된 상태였다 (그것 또한 유튜브로 보았지, 정말 존경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로 착지를 하는지 계속 신경 쓰면서 달리다 보니 평소보다 힘을 줬던 모양이다.
뭔가를 계속하다 보면 점점 깊이 알고 싶어지고 또 그로 인해 얻는 득과 실이 생길 때가 있는데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니까) 그래도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알면서 조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정강이 통증을 신 스프린트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고 말야, 엣헴-
그런 의미에서 주법 코치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아니 주법도 주법인데 호흡도 문제다. 습습하하든 칙칙폭폭이든, 난 호흡이 정말 너무 안돼. 하아-
Day 5
4.00K 25:15 6'19''
983.79 K and 361 days left
아침부터 흐렸던 날씨는 한낮이 될 때까지도 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날이 좋으면 산에 가려고 했는데. 산에 오르려던 계획을 무르고 에코백 하나 덜렁덜렁 매고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동네 서점에 갔다. 어디 가냐는 엄마의 물음에 서점에 간다고 답하며 "특별히 살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겸사겸사"라고 덧붙였지만 실은 사고 싶은 책(!)이 있었다. 바로 중학교 과정 수학 문제집.
나는 심각한 산포자였는데(수포자가 아닌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5학년 때 너무 놀아서(나는 이해찬 세대의 끝물 6차교육과정 마지막 학년으로, 당시 담임 선생님은 모둠 수업과 NIE에 약간 미쳐, 아, 아니 빠져계셨다) 6학년 올라가자마자 배우는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가 너무 어려워서 수학을 놔버렸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근의 공식이든 뭐든 제대로 남아있는 수학 지식 또는 상식이 없다. (그런데 경제학과에 가서 미적분은 또 기계처럼 풀어냈던 건 신기한 일일세.)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물리학자가 TV에 나와 ‘과학(특히 물리)을 알면 세상이 더 흥미로워질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결국 수학에 근거하니 지겹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로 삼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허허, 그것 참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구태한 말이지만 나는 배움에는 늦은 나이가 없다고 믿는 편이다. 나의 모토가 어제보다 하나 더 알게 되고, 조금 더 잘 하게 되고, 또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새로 알고 익히는 건 나에게 큰 동기가 된다. 그런데 수학은 20년 넘게 '내가 못하는 것'이라고 규정지어놓은 종류의 것이었고, 사실 얼마 전까지 달리기도 수학이랑 비슷한 처지였다. 그런데 어찌저찌 우연이 겹쳐 달리기를 시작하게 됐고, 달리기는 현재 기준으로는 썩 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되었다. 수학도 차근차근 조금씩 꾸준히 하다 보면 곧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와서 중1부터 쭉 훑어봤는데 고1 대비 중학 수학 복습 과정을 보고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겸손하게, 중학교 1학년 1학기부터 시작하자! 중1 수학의 시작은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의 복습부터 시작하는데 그래! 내가 20여 년 전(이십.. 그것도 이십여 년 전이라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사한 너네부터 복수해주마. 그때 내가 사실 죽은 게 아니라 죽은척한 거였어, 마! 내가 삼십대 수학 신동이 될거라고!
아니 근데, 사칙연산을 엑셀이나 계산기가 아닌 손으로 진짜 오랜만에 하는데 정말 내 머리, 똥이 됐더라... 나이 더 먹기 전에 정신 차려야겠다. 수학 문제집을 풀든가, 고스톱을 치든가. 뭐든 손모가지를 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