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십수 년 전, 내가 한국 지사에서 싱가포르 APAC 본부로 자리를 옮긴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2014년쯤이었을까. APAC 본부에 속한 각 나라 지사의 주요 고객사들을 모시고 다음 해의 비즈니스 전략과 신제품 출시의 성공을 파이팅 넘치게 다짐하는 연례행사가 싱가포르 래플즈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다. 고객사를 모시는 자리인 만큼 그들과 대면해 일하는 영업부 직원들, 몇몇 마케팅 직원들, 그리고 각 지사의 임원들까지 모두 총출동하는 행사였다.
큰 연회장에는 지사별로 둥근 테이블이 스무 개쯤 설치되었고, 테이블마다 열 개 남짓한 의자가 놓였다. 연회장 가장 앞, 중앙에는 늘 그렇듯 VIP석이 차려졌는데, APAC 본부의 최고 임원들과 고객사 가운데서 선별된 최고 경영진이 앉는 자리였다. 한국 지사의 테이블은 이상하게도 늘 뒤편 구석에 놓이는 편이었고, 궁금해진 내가 행사를 주관하는 팀에 이유를 물어보니 답은 꽤 길고 구체적이었다. 한국팀은 무대 위 행사에 크게 관심이 없고 참여도 적으며, 술잔이 몇 번 돌고 나면 ‘건배!’를 외치며 본인들만의 소란스러운 축제를 시작하다가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단체로 빠져나가곤 해서 그 동선을 고려했다는, 꽤 배려심 있어 보이지만 어쩐지 까는 듯한 설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호주팀은 매출 실적이 한국보다 훨씬 적음에도 불구하고 늘 더 상석을 배정받았는데, 행사의 분위기와 관객 호응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행사팀 입장에서는 그 또한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고단한 해외 생활과 아직은 어색한 영어에 지쳐 있던 나는 한국팀이 온다는 소식이 괜히 반갑고 설레었다. 당시 직원 턴오버가 높아 이미 반은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반은 아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APAC 본부석이 아니라 한국 테이블에 앉고 싶었다. 입장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무렵 얼굴에 미소를 잔뜩 장착한 채 한국 테이블로 가서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두 반가워요. 저 여기 앉아도 되죠?”
순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싸— 해지며 아주 짧은 눈치게임이 시작됐고,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말했다. “여기 다 자리가 찼습니다.”
그때의 무안함과 당황스러움은 아직도 꽤 또렷하다. 그다음 기억이라고 하면 내가 APAC 리전 본부 테이블에 동료들과 앉아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뿐인데, 한국 테이블에서 리전 테이블로 어떻게, 어떤 표정과 자세로 돌아왔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 성격으로 미루어보건대 “아 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같은 말을 하며 씩씩하게 웃고 돌아섰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날의 서운함만큼은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의자 하나만 더 놓으면 될 일이었는데.
시간은 흘러 흘러 십 년쯤 지났고, 2024년에 다시 APAC 행사에 초청을 받아 인도네시아 발리로 향했다. 이번에는 행사장 앞줄 중앙 VIP 테이블에 본사에서 날아간 동료들과 나란히 내 이름이 놓여 있었고, 행사 시작 전에는 ‘네덜란드 본사에서 오신’ 동료들과 나를 소개하는 순서도 있었다. 뒤편에 배치된 한국 테이블에서 유난히 뜨거운 함성과 박수가 들려왔지만, 나는 굳이 한국 테이블로 찾아가지 않았다.
그날의 생각.
아, 앞에 앉으니까 무대가 되게 잘 보이는구나. 인도네시아 전통과 LED light를 접목한 화려한 전통 춤이 내 바로 앞에서 펼쳐지니 감동이 두 배.
두 번째. 회사에 오래 다니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생기는구나.
네덜란드에서 처음 글로벌 사업부 헤드가 된 후에는 직속 마케팅 팀의 주간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는데, 꽉 찬 일정 탓에 회의가 시작된 지 오 분쯤 지나 도착하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회의장의 상석, 그러니까 직사각형 테이블에서 스크린과 가장 멀리 떨어진 중앙 자리는 늘 내 디렉트 리포트 (직속 부하)인 팀장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구석에 남은 자리에 몸을 밀어 넣곤 했다. ‘아무래도 유럽에는 상석의 개념이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편했고,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제일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하루는 유럽의 중요한 고객사와의 미팅이 있었고, 여러 사업부가 돌아가며 의제를 논의하는 카루셀 carousel 형태의 회의가 진행되던 중 앞선 회의가 길어지면서 휴식 없이 바로 다음 세션으로 넘어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회의실에 도착해 유리벽 너머를 들여다보니 진지한 분위기 속에 내가 들어가 앉을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업부 팀이 겹쳐 앉다 보니 자리가 부족해진 상황 같았다. 그날은 회의실로 들어가서 빈 구석을 찾는 대신 조용히 진행팀에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했어요. 자리 하나 세팅해 줄 수 있을까요?” 잠시 후 한 직원이 벌떡 일어나 중앙에 자리를 마련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안내를 받아 들어가 소개를 받고 회의에 참여했다. 생각보다 별일 아닌 일이었다.
자리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사실 2025년 연말의 팀 회식 자리 때문이었다. 그날도 빡빡한 일정 탓에 오후 팀 이벤트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디너에만 십오 분쯤 늦게 도착했는데, 암스테르담의 분위기 좋은 비건 레스토랑 안쪽에 여러 개의 테이블을 붙여 팀원들이 길게 앉아 있었다.
“얘들아, 나 왔어!” Hey, I'm here!
손을 흔들며 들어가자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들고 웃으며 반겨줬고, 테이블 긴 쪽 중앙에 앉아 있던 두 명과 짧은 쪽 중앙에 있던 한 명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아잇, 이놈들. 나 챙겨주는 거야 지금?’
나는 앞쪽에 앉아 있던 직원들을 하나하나 껴안으며 이동해 모두가 잘 보이는 테이블 끝 쪽 가운데에 앉았다. 그날 우리는 좋은 대화와 짧은 게임, 많은 농담을 나눴고, 고기가 없어도 충분히 배부른 저녁을 먹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착각했던 것 같다. 자리는 타이틀이나 관계가 마땅히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왜 아직 이 자리에 있는지 설명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을 하고, 팀원들과 업다운을 반복하는 순간들을 나누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굳이 청하지 않아도 내가 앉아 있어도 괜찮은 구석 하나가 조용히 생겨났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돌아보니 생각보다 꽤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대문 이미지: Sun On An Empty Chair Painting By Christopher Brenn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