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로 만난 사이, 회사 사람들: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됐어요.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제 보스의 보스가 네덜란드인 (Dutch 더치)였는데 중국과 네덜란드 두 곳의 자리를 제안해 줘서 이왕이면 유럽에 한번 살아보자 해서 나오게 됐지요.
2. 사적으로 만난 사이: 한국에서는 일하면서 애들 키우기 영 힘들잖아요. 일도 계속하고, 애들한테 한국식 교육이랑 다른 경험을 주고 싶기도 해서 나왔어요.
3. 찐친들: 왜 나갔느냐는 질문 대신 대체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는다.
네덜란드로 오기 전 먼저 싱가포르로 갔었다. 쌍둥이 아들들이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막내딸이 1학년 1학기를 막 마칠 무렵이었다. 그 꼬맹이들을 데리고 싱가포르로 갔다.
가족들에게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딱 맞는 시기에 너무나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했다. 어차피 나는 '애들 엄마'일뿐이니까, 내 생각이 어떻고 내 마음이 어떤 지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와서 그때의 내 마음을 돌아보자면 이랬던 것 같다.
개방적인 가정에서 아들 딸 차별 없이 기세등등하게 자란 나에게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었다.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일 잘한다고 상도 줄곧 받았다.
결혼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만 스물 넷에 소개로 만난 사람과 만난 지 7개월째 되던 날 결혼식장으로 들어갔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열심히 살 작정이었다. 노 프라블럼.
그런데 계획에 없던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고 (심지어 쌍둥이고), 스물여섯에 애 둘 엄마가 됐다. 나라는 존재는 온 데 간데 없어지고, 시댁이라고하는 모르는 사람들이 내 인생에 대거 등장했다. 신혼집 아파트의 비밀번호가 어디까지 알려졌는지, 벨을 누르지 않고 아무 때나 들어와서 애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건지 가르치는 사람들의 수가 자꾸만 늘어났다. 나는 결혼이 원래 이런 건가 보다 하고 속없이 배실배실 웃었던 거 같은데, 시댁에서는 며느라기가 아주 싹싹하다고 좋아하셨다고 한다.
쌍둥이를 출산한 수술자국이 아물기도 전에 셋째가 생겼고 스물일곱에 애 셋의 엄마가 됐다. 출산 휴가 후 출근을 준비하는 나를두고 시댁에서는 “네가 뭣이 부족해서 일을 나간다고 집안 망신을 시키냐”면서 꾸짖었다. 그 당시에 많이 들은 말이 “우리 애들이 어떤 애들인데”였다. 글쎄요, 어떤 애들인지는 좀 커봐야 알겠고요 일단 제가 낳았거든요.
가마니마냥 가만히 있는 남편, 안타까워만 할 뿐 나서지 않는 친정 부모님, 그리고 유난히 감정 기복이 심하던회사의 새로 온 상사까지 더해서, 내 인생 이렇게 나락인가 하던 차에 회사에서 싱가포르에 급히 가줬으면 한다는 제안을 했다. 월급도 주고, 집도 주고, 애 세 명 국제학교 학비까지 내주겠다니. 부처님 조상님 감사합니다 하고 냅다 짐 싸서 도망간 게 이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나를 ‘급히 모셔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임자가 요상하게 망쳐놓은 비즈니스를 복구해야하는데, 그 전임자가 하필 회사의 윗선에 뒷배가 있는 자였다. 그를 해고할 수 없으니 스스로 나가게 하려는 ‘압박용’ 무기로 차출된 도구가 바로 나였다.
앞니가 숭숭 빠진 꼬무래기를 셋이나 데리고 건너와 근본 없는 영어로 더듬대던 나를 다행히도 싱가포르의 동료들이 가족처럼 보듬어줬다. 미셸, 루카, 조지, 크리스틴, 줄리아, 그리고 데이비드. 내 글의 등장인물은 전부 가명이지만 이들은 실명이다. 내 소중한 친구들. 한참 지나서 그때 나한테 왜 그렇게 잘해줬냐고 물어봤더니 내가 그렇게나 안쓰럽고 딱해 보였다고 한다.
미셸 루카 조지 크리스틴 줄리아 데이비드, 그리고 어딘가에 나 (초상권을 위해 블러 처리)
서러움이든 외로움이든 울컥 올라올 때마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꾹꾹 눌러 담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싱가포르 생활도 좀 익숙해지고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성과도 몇 가지 생겼다. 그러다 이게 웬일, 유럽에 있는 글로벌 본사로 그것도 승진을 시켜서 데려간단다. 그렇게 ‘ 와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 하고 네덜란드로 오게 됐다. 그게 벌써 8년 전.
이곳 네덜란드에 와서 차별도 당하고, 드라마처럼 누명과 루머의 주인공도 되어보고, 앞에서 망신, 뒤에서 무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어쩐지 꼴까닥 넘어갈 것 같은 순간에는 꼭 귀인이 나타나서 손을 잡아줬다. 그리고 묵묵히 일한 시간은 좋은 성과로 보상받았다.
뭐가 어찌 되었든 여전히 외국인이고 이방인이다. 내가 보는 세상은 온통 금발에 백인들이니 나도 그들 중 하나라는 착각에 빠질만하면, 여지없이 내 영어를 못 알아듣고, 단순한 의견 충돌에도 문화의 차이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그렇지, 여기서 나는 마이너리티’라는 정체성을 일깨워준다.
그래도 세상 어디나 그렇듯 좋은 사람들이 있고 좋은 일들이 있다. 꼬무래기 셋은 이제 어른이 다 되어간다.
울다 웃다, 눈물 콧물 빼는 날도 있고, 어깨 펴고 잘난 척하는 날도 있다. 그렇게 버티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