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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스트 Jul 08. 2024

왜 알아듣지를 못하니

 

 영어는 피곤해

 싱가포르 근무를 시작한 지 서너 달 때쯤 된 무렵, 카페에서 동료들의 영어 수다를 듣고 있었다. 순간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아니 왜 저렇게 말을 길게 하지?'

 우리말로 하면 한 두 단어로 끝날 걸 영어에서는 주어 동사 목적어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밥은?' 하는 대신 '너는 점심을 먹었니 Did you have lunch?'

'오랜만에 아빠 봐서 좋았어'가 'It had been a while since I last saw my father, so this time I made sure to see him. It was great.'

 '척하면 어'하는 효율의 문화 속에서 30년을 살다 온 나로서는 듣기도 말하기도 답답스러운 게 영어였다.


  그런데 외국에서 지내다 보니 한국식 의사소통을 어려워하는 외국인 동료들의 모습도 종종 보게 된다.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영어'라는 공용어 안에 욱여넣고, 한참을 떠들었는데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싱가포르에서 동료들이 이따금씩 개인적인 부탁을 하곤 했다. "이거 좀 봐줄래? 한국팀에서 보낸 문서인데 당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 스무 장이 넘는 슬라이드를 넘겨봐도 도대체 결론이 없다.

 그럴 때면 꼭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건방지게 네가 왜 결론을 내?'

 내가 한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부사장님의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 일이 있었다. 미국과 한국의 법규 차이, 유통사 계약 조건에 따라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의 차이를 분석해서 이 건은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는 제안서를 만들었다. 상무님이 먼저 보시고는 '건방지게 네가 왜 결론을 내? 시나리오를 서너 개 만들어서 부사장님이 결정하시도록 올려!."라고 하셨다. "눼눼..."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한국을 포함, 세계 각국에 지사를 둔 글로벌 기업이다.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인 싱가포르 팀의 관리를 받는다. 싱가포르 팀이 상위 보고라인이므로, 한국 담당자는 '결론은 윗선인 너희들이 알아서 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속 빈 강정 같은 파일을 들고 당황하는 동료에게 한국의 위계질서 문화를 설명하고, 한국의 담당자에게는 지사 임원과 결론까지 합의한 후에 싱가포르로 다시 문서보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건 탑 다운 top-down인데요?'

 네덜란드의 본사에는 일 년에 두 번씩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린다. 이때 각 지사와 본사 팀이 만나서 다음 해의 신제품 정보를 나누고 사업 계획을 논의한다. 나에게 이 행사는 한국의 후배들과 모처럼 우리말로 수다를 떨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그날 행사장에서 이보 (Ivo, 네덜란드인)가 신이 나서 나에게 다가왔다. "나 다음 회의가 한국팀이야. 다녀올게!" 이보는 당시 회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제품 카테고리의 글로벌 팀장이었다. 잘생기고 명석하고, 무엇보다 신사적인 에티켓이 몸에 밴 멋진 친구다.

 바쁜 일정이 끝나갈 무렵 한국팀의 유경 차장(가명)이 나를 찾아왔다. "회의는 잘 됐어요?" 묻는 나의 말에 유경 차장은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저희 너무 속상해요!! 이보는 대체 어떤 인간이에요? 회의 중간에 나가버렸다고요!"


 이보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지난번 회의에서 한국팀과 두세 가지 실행 계획을 협의했었는데 아직 제대로 실행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씩 이유를 물어보니, 번째 안이 엎어진 것은 '위에서 시켜서 it was a top-down decision', 번째 안에 대해서도 물으니 그것 또한 top-down이라고 하면서 유경 차장을 포함한 실무진 서너 명이 모두 '하하하' 웃더란다. 민망함에서 나온 웃음이란 걸 이보가 알 턱이 없다.

 이보는 그 모습이 프로페셔널하지 않고 책임감도 없어 보였다고 했다. 게다가 '하하하' 하는 웃음에 모욕감까지 느껴서 참지 못하고 회의장을 나가버렸다고...





 영어학원에는 답이 없다.

 아무래도 해외 근무가 길어지다 보니,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한국의 후배들이 종종 외국인 동료들과 의사소통하는데 어려움을 호소하고 조언을 구해온다.

 자주 듣는 사연 중 하나가 지역 본부나 본사에서 자꾸만 같은 내용을 묻고 또 묻는다는 거다. "그럴 땐, 결론부터 알려주고 왜 그렇게 결론을 냈는지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하세요. 절대로 위에서 시켜서 (top down)라고 넘어가지 말고요."

 그리고 하나 꼭 해주는 조언은 '영어 학원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 후배들 영어 잘한다. 문제는 영어가 아니고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자기의 생각에 책임을 지는 마음, 미안할 때는 정중하게 사과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절대 미안한 상황에서 웃지 않기).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다. 이럴 때마다 척하면 아 하고 알아주는 한국이 그립다. 하지만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다양한 사고방식을 연습하고 경험을 넓혀가는 재미가 있다.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시는 분들이나 서양인들과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분들, 모두 그 즐거움을 조금씩 느껴보시기를.




(대문 이미지 출처: https://www.shutterstock.com/image-vector/business-communication-breakdown-symbol-misunderstanding-negotiation-2168949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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