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의 재발견
신기한 곳에 다녀왔다.
작년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교육받을 때, 라케쉬 수리 박사 (Dr. Rakesh Suri)를 만났다. 미국의 클리브랜드 클리닉을 UAE의 아부다비에 설립한 인물이다. 질의 응답시간에 그는 본인이 의료 전문인에서 글로벌 리더로 변모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리더십 프로그램이라면서 런던의 라다 비즈니스 (RADA Business)를 언급했다. 얼른 받아적었다. 회사에서 지원해주지 않으면 휴가를 내고서라도 갈 작정이었는데, 다행히 이번에 좋은 기회를 얻었다.
RADA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봤다. 어디 소규모 조직에서 하는 독특한 프로그램인가 보다 했다. 하루 전에 런던에 도착해서 다음 날 아침 주소를 따라 걸어가니 붉은 벽돌로 지은 근사한 건물이 나타났다. 내가 가는 곳은 16번지인데, 18번지부터 RADA 포스터가 보였다.
눈을 들어 간판을 보니 Royal Academy of Dramatic Arts. 왕립 연기학교. 와! 이런 곳 바로 옆에서 수업을 받나 보네! 여기 있으면 유명한 배우들도 보나?
바로 옆, 16번지 문으로 들어가서 리셉션에 등록하고 출입증을 받은 후, 자그마한 바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인사했다. 수강생은 예닐곱 명 정도였다. 영국인이 반 이상. 스코틀랜드인 1명, 스위스인 1명, 그리고 나. 서로 자기소개를 하면서 어색함을 달래고 있는데 갑자기 까만 옷을 입고 무선 마이크를 착용한 공연 스태프 두 명이 나타나선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람들을 따라가 좁은 터널 같은 곳을 지나 도착한 곳은 시커먼 방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백스테이지로 왔군!"
곧이어 커튼을 통과해서 들어간 곳은 텅 빈 극장의 무대 위였다.
두 명의 스태프가 마이크로 "Welcome to RADA Business 라다 비즈니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했다.
그제야 내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RADA 가 그러니까 'Royal Academy of Dramatic Arts' 왕립 연기학교? 내가 리더십 교육을 받겠다고 온 곳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연기 학교라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무대가 깜깜하게 암전 되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중앙 앞 의자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그 위에 하얀 봉투 하나. "지금부터 '리더십이 무엇인가'에 대한 10분짜리 연극을 준비합니다. 관람객은 리더로 행동하지 않는 관망자들 (bystanders)입니다. 준비와 리허설 시간은 30분입니다. 모두가 무대에 참여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카운트다운 시작!"
그렇게 시작된 3일간의 교육 동안 나의 멘털은 너덜너덜해졌다. 매일 찢어발겨졌다 하고 하는 게 더 맞겠다.
Day 1.
- 연극.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랑 갑자기 공연을 하고 나중에 그 영상을 보고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수치스러웠다.
- 스피치.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3분 스피치 후 20여 분간 교수진과 수강생들의 피드백을 받았다. 당사자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가 있으므로, 옆에 앉은 사람이 피드백을 대신 받아 적어주었다.
- 맨발 수업. 한쪽 면이 거울로 된 환한 스튜디오로 옮겨서 리더십의 4가지 스타일에 대한 이론 수업을 몸으로 배웠다. 서기. 앉기. 호흡하기. 고함지르기. 성큼성큼 걸어 다니기...
- 드로잉. 갑자기 커다란 종이와 마커를 주더니 '나의 리더십이란 무엇인가'를 3분 안에 그리라고. 그다음 프레젠테이션, 피드백.
Day 2.
- 맨발 수업. 온몸으로 배우는 리더십. 말없이 눈빛과 동작으로 압박하고 소통하기.
- 노래. 갑자기 한 노신사 등장. 브로드웨이와 공연계 양대 산맥인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20여 년간 활동하신 분이란다. 무대 한편에 피아노가 들어오더니 곧바로 발성 수업. 그리고 우리 8인이 돌아가면서 독창. 천하제일 음치인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다리가 덜덜 떨렸는데, 옆에 여자분이 노래하다 울어버리는 바람에 급 진정됐다.
- 뮤지컬. 노래 한번 불러본 후 바로 안무 짜고 공연. 첫날 연극 때와 달리 서로 전우애가 싹터 밀어주고 당겨주며 공연 완성. 생각보다 근사해서 우리 모두 놀랐다.
-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가서 그림 그리기,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피드백.
솔직히 이쯤 되니 저녁 식사고 뭐고 그냥 네덜란드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Day 3.
- 롤 플레이. 첫날 우리를 맞아준 두 명의 스태프가 알고 보니 연기 선생님들이었다. 이 분들이 우리 8명의 개인 상황에 맞게 각자의 조직에 있는 빌런을 연기하는데, 우리가 제시한 몇 가지 키워드만 가지고도 캐릭터 해석이 대단했다. 다 연기인 거 아는데도 진땀 흘리고, 분노하고, 눈물 흘리고. 나 또한 그동안 배운 거 다 까먹고 흥분하며 쪼랩임을 인증했다.
- 점심 식사 후 세 번째 그림을 완성해서 스토리텔링 스피치.
- 마지막 공연. '나의 리더십'을 주제로 3분간 스피치. 모두가 무대에서 천천히 걷다가 한 명씩 돌아가면서 걸음을 멈춘 채 즉흥 스피치를 했다. 우리 대부분 사오십대로 인생의 중반에 온 사람들인데도 몇몇은 마치 ‘알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크리스토퍼 (Christopher 가명). 신장 전문의. 영국 의료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인데 목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작고, 중요한 미팅에서 말을 두서없이 하는 바람에 이 프로그램으로 보내졌다. 둘째 날 노래 수업에서 득음을 하더니 마지막 무대에서 목청이 제대로 트여버렸다. 우리 중 제일 연장자인 멋진 신사.
토미 (Tomi 가명). 원치 않은 승진으로 갑자기 임원이 되어 현실을 부정하던 인물. 임원 회의 장면을 롤 플레이하는데, 그는 동료를 마치 상사 대하듯 했다. 그의 마지막 대사에서 찐한 울림이 느껴졌다. '아무도 남에게 허락을 구하는 리더를 필요로 하지 않아. 아무도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리더를 필요로 하지 않아. 이걸로 충분해. 이제 달라질 때가 됐어. Enough is enough! '
사라 (Sara 가명). 고졸의 노동자 가정 출신. 지금은 웨스트민스터에서 장관을 보좌하는 고위 공무원이고, UN에서 영국을 대표하여 활동하고 있지만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녀는 마지막 무대에서 '이제는 어린 시절의 나처럼 '저곳은 나 같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소녀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모두의 독백이 끝나고 무대에 조명이 조금 켜져서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되자 다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지난 삼 일간 지위나 타이틀을 다 내려놓고 서로 날것의 모습을 하도 봐서였을까. 각자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감정이 벅차올랐다. 우리는 작별인사 대신 서로를 끌어안고 땀으로 축축해진 등을 토닥여주면서 여름휴가 후 런던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에게 리더십이란 도착지가 막연한 긴 여행같은 거였다.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조심스럽게 한 발씩나아가야 하는 여정. 실수해서는 안돼.
프로그램을 마친 후 두 가지의 새로운 생각을 얻었다.
1. 리더십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2. 리더십은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고 그 재료는 나 자신의 몸, 호흡, 그리고 목소리다. (Body, Breath, and Voice). 어려운 상황일수록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딛고 아랫배에 힘을 주어 '후~' 하고 내뱉은 후 내가 생각하는 바를 천천히 말하면 된다. 그뿐이다.
덧 1. RADA의 졸업생 명단은 대단하다. BA (학사 과정)에는 일 년에 28명의 학부생만 입학가능해서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잠시나마 배움을 얻을 수 있어서 영광스러웠다.
덧 2. 내가 참여한 3일 프로그램인 Leading Role의 수업료는 VAT를 포함, 7800 파운드로 굉장히 비싸다. 이렇게 Business 수업에서 얻는 수익을 RADA 학부생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데 쓴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K-POP 양성과 공연 시스템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데 RADA처럼 비즈니스와 접목해 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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