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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스트 Aug 11. 2024

슈퍼우먼은 없다


 엊그제가 생일이었다. 고맙게도 친구들, 지인들, 회사의 동료와 직원들이 축하 문자를 보내주었다. 인생은 아름답다. (아직까지는)

 그중 유난히 마음을 잡아끄는 메시지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만난 다재다능하고 마음 따뜻한 동생 정원의 문자였다. 한 아티클*을 읽고 있는데, 슈퍼우먼인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아티클 제목은 'Why Women Still Can't Have It All' 왜 여성들은 여전히 모든 것을 누릴 수 없을까. https://lweb.cfa.harvard.edu/cfawis/slaughter.pdf.  미국의 학자이자 공공정책 전문가, 그리고 일하는 엄마인 앤-마리 슬로터 Anne-Marie Slaughter가 쓴 글로, 사회의 시스템이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는 한 성공적인 워킹맘-슈퍼우먼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내가 슈퍼우먼?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24년의 커리어, 유럽에 위치한 글로벌 기업 본사의 경영진.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20여 년 동안 잘 꾸려온 가정.

 우리 주변에서 롱런하는 워킹맘 롤모델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조언을 구하는 후배들에게 무조건 '저는 아닙니다'라고 손사래 치지 못했다. 그래서 토론에 참여하고, 멘토링을 하고, 크고 작은 강연 무대에 섰다. 청중의 기대에 부응하려다 보니 '쉽지는 않지만 누구나 이룰 수 있다'는 긍정과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곤 했는데, 내 마음 한편에는 진실의 반쪽만 보여주는 것 같은 찜찜함이 남았었다.

 오늘은 그 나머지 반쪽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앤 마리 슬로터의 글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를 갈아 넣지 않는다."

  

 나는 무엇에든 열심이었다. 대학에서는 성적 우수자로 줄곧 장학금을 받았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남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은 일을 하는 방법으로 성과를 내고 나를 증명했다. 인풋 input과 아웃풋 output 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었고, 노력은 보상으로 돌아왔다.


 노력에 대한 내 믿음은 세 아이 중 막내 딸아이를 낳으면서 무너졌다.

 쌍둥이가 태어나고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셋째를 임신했다. 아직 첫 출산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셋째를 낳고, 엉망진창인 몸으로 18개월 쌍둥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쌍둥이 때 혼합 수유를 해야 했던 나는, 딸아이만큼은 모유만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당시 우리나라에 불었던 모유 수유의 열풍은 분유 업계를 불황으로 내몰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분유 먹이는 엄마는 나쁜 엄마, 모유 먹이는 엄마는 좋은 엄마. 노 프라블럼. 노력은 내 전문이 아니던가. 나는 제대로 잠을 자지 않았고, 제 때 먹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얼굴 한쪽이 움직이지 않는 안면 마비가 찾아왔다.


 다시 병원으로.

 첫 번째 진료에서 의사 선생님이 한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지금 산모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모유를 중단하는 겁니다. 산모의 몸이 엉망이니 모유에 제대로 영양이 있을 리가 없죠. 아기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놈의 모유 수유를 하겠다고 입이 돌아갈 만큼 애썼는데, 오히려 내가 아기의 건강을 해치고 있었다니.


 그로부터 열여덟 해가 더 지났지만, 내 얼굴에는 아직 후유증이 남아있다. 이 후유증이 나에게는 꽤 효과적인 리마인더 (reminder) 다.

'남들이 세운 의미 없는 기준에 휩쓸려 나를 갈아 넣지 말자.'

 분유로만 키운 우리 딸은 매우 잘 자랐다. 그리고 육아든 사회생활이든 온갖 '정답'들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서 '남들이 세운 기준은 중요하지 않고,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다'는 마음 가짐은 나를 단단히 지켜주고 있다.



 "내가, 나의 시간이 돈보다 귀하다."

  

 페이스북 (Facebook)의 셰릴 샌드버그는 일과 가정을 양립하려는 여성들에게 '밤에 기저귀를 갈아주는 남편과 결혼하라'는 조언을 남겼다. 이 기준에 의하면 내 결혼은 합격이다. 남편은 내가 세 아기의 울음소리를 '못 듣는 척'하던 수없이 많은 밤에 조용히 일어나 분유를 타고 기저귀를 갈았다.


 하지만 그와 나는 시간과 돈에 대한 가치관이 서로 달랐다. 남편은 자수성가를 한 보수적인 집안에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삼시 세끼를 직접 요리하는 검소하고 헌신적인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시어머님은 가족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전국 어디든 직접 나서서 재료를 구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부엌에서 보내는 분이셨다.


 그런 그가 나와 결혼했다.

 아기들이 이유식을 시작하는 시점에 갈등이 불거졌다. 내가 좋은 고기와 야채를 사서 곱게 갈아 따뜻한 불에 천천히 익혀서 이유식의 일부는 아기들 먹이고 일부는 냉동실에 잘 얼려두고... 했을 리가 없다. 결혼 초반 몇 번의 시도 끝에 '요리에 젬병'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후, 나는 손을 놓았다. 시간과 노력 대비 결과가 형편없다면,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믿었다. 대신 나는 정성스러운 온라인 검색을 통해 좋은 브랜드의 이유식 아침 배달 서비스를 신청했고 남편은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이유로 여러 번 갈등을 겪었다. 남편은 돈을 아끼기 위해서 시간을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돈으로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 시간을 내가 원하는 일에 쓸 수 있다면 돈을 쓰는 편을 택했다.

 싸우기도 하도, 양보하기도 하고, 절충안을 찾아가면서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고 사회생활을 했다.

 그는 여전히 그의 방식대로, 나는 여전히 나의 방식대로 살지만, 서로에게 때때로 쿨하게 맞춰주고 뒤끝은 없는 편이다.



 "죄책감과 자기 연민은 적당히."

  

 전 세계를 아울러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워킹맘은 없을 것이다.

 이제 쌍둥이가 스무 살이 되고 막내딸이 열여덟이 되었지만, 유튜브에 오은영 박사의 숏폼이 올라오거나, 부모와 아이들의 심리학에 대한 신간 책 소개를 보게 되면 여전히 가슴 한편이 아리면서 죄책감이 솟아난다. 왜 나는 저걸 몰랐을까. 왜 그 작고 여린 아기들에게 그리 모질게 굴었을까.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감기만 걸려도 내 탓인 것 같았고, 아이들이 다 성장한 지금은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겪는 이런저런 어려움들이 아이들을 해외에서 키운 내 잘못 때문인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와 네덜란드를 거쳐 지금은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는 둘째 아들이 얼마 전 방학을 맞아 서울로 갔다. 도착하고 며칠 후 둘째의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어두웠다. 어눌해진 한국말 때문에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게 망설여진다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마음이 아팠다.

 어린 시절, 나에게 해외 유학생들은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유창한 영어, 화려한 학벌, 그리고 어눌한 한국말은 유학생 판타지의 삼박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내 아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나 때문에.


 속이 상해서 곁에 있던 딸아이에게 넋두리를 했다. "엄마는 어릴 때 한국에 놀러 오는 유학생들이 그렇게도 부러웠었어. 너희 셋을 외국에서 키우면서 엄마는 너희에게 좋은 것을 해준다고 생각하고 고생스러워도 꾹 참아냈는데 그게 꼭 좋은 건 아니었나 봐."

 막내딸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엄마, 우리는 엄마가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길러준 거 잘 알아요."


 그 말이 고마웠고, 마음을 울렸다. "그래, 나는 엄마로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최선을 다했어."

  




  일과 가정의 균형을 찾으려는 여성을 위해 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고, 정부가 어떤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지에 대해 앤-마리 슬로터 (앞서 언급한 아티클의 저자)처럼 거창한 제안은 없다.

 하지만 세 나라 - 한국, 싱가포르, 네덜란드에서 워킹맘으로 살아오면서 보고 느낀 몇 가지를 나누고 싶다.


 첫째, 항상 가족이 먼저다. 일과 가정의 균형 (work-life balance)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는데, 이 둘은 비교 선택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가정을 이룬 후에 커리어를 지속하기로 결정한 여성에게도 가족은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이고, 사회는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고 지원해야 한다.

 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한국에서 싱가포르 오피스로 옮겼을 때 상사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건강이 첫째, 당신의 가족이 둘째, 일은 그다음입니다. 건강 상의 이유와 가족의 일로 자리를 비워야 할 때에는 그냥 그렇게 하세요. 사유를 설명하거나 사전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이 지침을 현재 내가 네덜란드에서 이끌고 있는 사업부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다들 그렇게 하니 특별할 것도 없다.

 둘째, 학교의 스케줄은 일하는 부모의 일정에 맞춰져야 한다는 앤-마리 슬로터의 주장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쌍둥이가 한국에서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칠 때까지 나는 줄곧 죄인모드로 살았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각종 행사와 면담은 죄다 근무 시간 중에 이루어졌고,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불참해서 죄송합니다), 회사 상사와 동료에게 미안해야 했다 (이번 주는 제가 녹색 어머니라서 매일 한 시간 늦게 출근합니다).

 풀타임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학급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다고 양해를 구하는 나에게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던 말이 생각난다. "저도 워킹맘이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참...

 아이들이 다닌 네덜란드 국제학교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학부모가 참석해야 하는 거의 모든 행사의 일정이 늦은 오후에서 이른 저녁에 맞추어져 있다. (오후 4시부터 저녁 9시 사이) 퇴근 후에 가 보면 엄마와 아빠의 비율이 반반이거나 아빠들이 더 많은 경우도 흔하다. 선생님들의 오버타임 근무는 평일에 수업이 없는 날로 대체된다.

 셋째, 일하는 엄마가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아이들은 서울 대단지 아파트 내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학부모들이 전부 같은 아파트 단지의 주민이었고 좋은 환경이었다. 무엇이든 열심인 나는 학급 엄마들(대부분 전업맘)과 어울리려고 애써보았는데 참 난감했다. 그 동네에서 '비전문직 워킹맘 - 의사, 판사, 변호사가 아닌 직장인'은 남편의 경제력이 부족한 딱한 사람이거나, 가족을 팽개치고 자신의 욕심을 좇는 이기적이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로 구분 지어졌다. 나는 뜻하지 않게 종종 위로의 말을 들어야 했다. 조심스럽게 '시댁에서 생활비 보조를 안 해주시나 봐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성인은 곧 경제 활동을 하는 사회인이라고 생각하는 유럽 사회에서는 '능력이 있음에도 일을 하지 않는 성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사회적 압력을 받는다.

 어떤 한쪽이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업맘이든 워킹맘이든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고, 서로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생기길 바란다.


  



 * '워킹맘'이라는 포괄적인 언어를 사용했지만 저는 제 상황이 상대적으로 특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모든 분들이 저와 같은 환경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워킹맘들, 그리고 미래의 워킹맘들에게 제가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 하고 있으므로 이미 충분합니다. 모든 워킹맘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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