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후진 동네 vs. 가장 좋은 동네
지난 금요일 이른 저녁, 동네 주민이자 우리 회사 중역 중 한 명인 마크 (Marc, 가명, 네덜란드인)를 동네 카페에서 만났다.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네덜란드의 사람들은 해가 쨍쨍한 날이면 어김없이 죄다 밖으로 나돈다.
그날도 볕이 매우 좋은 덕분에 동네 카페 야외석은 금발과 은발의 더치 (Dutch, 네덜란드인을 뜻함)로 꽉 들어찼다.
주문한 무알콜 모히또 두 잔이 나오고, 우리는 스몰 토크를 이어갔다. 여름휴가는 어땠니, 가족들은 잘 있니, 등등.
마크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지역은 암스테르담에서 30여 킬로미터가 떨어진 북 네덜란드의 Gooi 지역이다. 전통적 부촌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집은 좀 더 복닥거리는 곳의 중산층 거주 지역에 있고, 마크의 집은 좀 더 구석의 단독 주택 지역에 있다. 정원이 몇백 평씩 되고 집 뒤뜰에서 말이 뛰놀지만 옆집 말 응가의 스멜이 내 집까지 오지 않는 띄엄 띄엄한 주택가. 말만 들어도 부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평소에 마크가 본인은 자수성가(self-made) 형 인물이라 했던 게 기억이 나서, 어떻게 지금의 부를 이루었는지 모히또를 쪽 빨아마시며 슬쩍 물었다.
마크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마크: 너는 가장 좋은 동네에 후진 집이랑, 후진 동네에 가장 좋은 집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어떤 걸 사겠어?
나: 응?
마크: 절대 절대로 후진 동네에 있는 좋은 집을 사서는 안돼. 그 집이 아무리 기깔나게 좋더라도. 나는 돈이 조금 모였을 때 아주 좋은 동네에 있는 폐가 수준의 집을 샀어. 그리고 월급을 모아서 조금씩 조금씩 고쳐나갔지. 원래 그 동네의 가치에 내가 고친 집의 가치가 더해져서 아주 좋은 가격에 그 집을 팔 수 있었고, 그렇게 이 동네로 올 돈을 마련했어.
나: 아항. 하긴 그래. 동네 전체를 뜯어고치는 것 보담야 내 집 하나만 고치는 게 훨씬 쉽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인생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다 때려치우면 어떨까 할 때가 있다. 사실은 꽤 자주 그런다. 요즘에 특히 그런다.
글로벌 기업의 본사에서 한 자리씩 하고 있는 매우 잘난 동료들 (대부분 미국 또는 유럽인), 내 윗선인 회사의 최고 경영진들과 부대끼다 보면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주눅 들고 초라해지는 날이 온다. 그럴 땐 걍 확 사표를 던지고 싶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 잘난 인간들이 있어서 내가 배우고 성장하는 동력을 얻는 건데 이런 환경을 박차고 나가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막연함도 있다.
매번 같은 결론: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으니 가만히 있자.
예전에 외국계 기업 한국 지사의 임원 (실질적 일인자)인 친한 선배 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망쳐버린 고객사 프레젠테이션 때문에 한 동료로부터 거친 피드백을 받은 후였다. 거의 욕을 먹다시피 했다. 자존심 상하고 쪽팔려서 어디 숨어버리고 싶다고 하는 나에게 언니가 그랬다.
선배 언니: 그래도 나는 그렇게 피드백해주는 동료가 있는 네가 부러워. 여기에선 모두 다 나만 바라봐. 나는 이제 배움이 멈추고 그냥 소모되는 느낌이야.
으리뻔쩍한 대기업 본사에 미운 오리 마냥 콕 박힌 유일한 동양계 여자애 (실은 중년 아줌마).
가장 좋은 동네의 가장 후진 집이 바로 내가 아닐까.
오늘은 더럽게 후지지만, 매일, 매달, 매 분기, 매년 조금씩 닦고 보수하고 광내다 보면 나도 언젠가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좋은 동네에 계시든, 그렇지 않은 동네에 계시든, 모두들 쓸고 닦고 기름치다 보면 좋은 날 오겠죠.
모두들 파이팅 하세요!
(대문 이미지: 이 좋은 날, 일요일인데 저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러 암스테르담 중앙 도서관에 왔습니다. 하루치 주차 요금이 무려 45유로!! 그래도 가장 전망 좋은 자리를 차지했으니 기분 좋아요.
사진의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