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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스트 Aug 17. 2024

코펜하겐에서 배운 대화의 힘

 덴마크 코펜하겐에 다녀왔다.


 그동안 여름휴가를 오롯이 한국에서만 보내던 패턴에서 벗어나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짧은 한 주를 보내는 동안 코펜하겐의 호텔을 예약했다. 네덜란드의 집으로 돌아가면 차를 몰고 슬슬 다녀오리라. 아무 계획도 없이 즉흥적이고 느릿한 여행을 하고 싶었다.

 한참 성수기인 코펜하겐 중심가의 호텔 숙박료는 상당했다. 예산에 맞춰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그래도 전철을 타면 20분 내에 시내로 갈 수 있으니 가격 대비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첫날은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독일 함부르크를 거쳐 이틀 동안 거의 800km를 차로 달려온 후였다. 이튿날 아침, 잘 차려진 호텔 조식을 먹고 전철을 타고 나가서 시내 구경과 사람 구경을 했다. 화창한 여름 날씨, 25도가 넘지 않는 쾌적한 온도, 놀랍도록 깨끗한 거리,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 근사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호텔로 돌아온 그날 밤 까지는.




 때르르르릉~~!!!!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경보음이 들렸다. 침대 중앙 위 천장에 붙은 화재경보기가 내는 소리였다. 처음엔 경보기 오작동일 거라 생각을 하고 침착하게 호텔 프런트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저녁 10시 40분.

 휴대폰의 호텔 앱을 켜고 전화를 걸면서 동시에 호텔 채팅 앱으로 문자를 보냈다. 역시 무응답. 약 5분 동안의 대기 끝에 호텔 리셉션이 전화를 받았지만 "사람을 올려 보낼 테니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끊어졌다.

 다시 기다림. 머리 위의 경보기는 계속 찢을 듯이 울려댔다. 멈추지 않는 경보음을 듣고 있으니 점점 불안해졌다. 여긴 호텔의 꼭대기인 23층. 벽은 통유리창으로 막혀있고 다른 호텔에서 보던 완강기 같은 건 없었다. 이게 진짜 불이면 딱 타 죽겠구나. 초조한 마음에 복도로 나갔다. 투숙객이 우리뿐인지 텅 비어 있었다. 한참 후 호텔 시큐리티와 두 병의 소방대원들이 복도 저 끝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느긋한 동작을 보니 화재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들은 당최 어느 방에서 알람이 울리는지 모르는 듯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그들을 우리 방 쪽으로 부르면서 무심코 방 키를 뽑자 얼마 후 알람이 멈췄다. 상황 종료.


 "No fire, it was a fake alarm. 화재는 아니고, 경보기 오작동입니다."

 소방대원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한 후 그대로 우리 방을 지나쳐갔다.



 다시 침대에 누워 시계를 보니 밤 11시.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 고작 이십여분 간의 소동이었다. 날카로운 경보음을 계속 들어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잠이 싹 달아났다.


 남편과 누워 대화를 시작했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 호텔에 더는 못 있겠다.

 전화를 받지 않는 프런트 데스크. 화재 경보 중 투숙객 방치. 23층의 고립된 방에서 겪은 불안.

 그렇다고 이대로 여행을 마칠 수는 없으니 남은 3일 동안 묵을 다른 호텔의 방을 찾아봤다. 아… 이런. 시내에 위치한 좋은 호텔들은 방이 없거나, 지난주에 검색했을 때 보다 숙박료가 더 올라있었다.


 핸드폰의 호텔 앱에 뒤늦게 두 개의 문자가 왔다. 첫 번째 문자는 처음 내가 보낸 “화재 경보가 울림”에 대한 답변으로 “지금은 다른 일로 바쁘니 나중에 연락하겠다”였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자동 응답이었지만 화재경보라는 상황과 맞물리니 다르게 읽혔다. 그리고 막 도착한 두 번째 문자. “해당 화재 경보는 오작동한 것이며 화재는 없었고, 호텔은 화재 시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제대로 수행했다”는 내용이었다. 투숙객은 안녕하신지 1도 관심 없어 보이는 건조한 문자에 나의 분노 게이지가 우상향 해버렸다. “이 호텔 투숙객의 안전을 담당하는 책임자를 만나야겠소”. 곧바로 아침 9시에 프런트로 오면 안내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음 날 아침 9시, 호텔 프런트로 내려갔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10여 분을 기다린 후 나는 프런트 직원에게 어젯밤의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며 책임자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또다시 기다리라는 안내. what?!


 부글거리는 마음으로 로비 라운지에 앉아있는데 문득 얼마 전 읽은 찰스 두히그의 책 '대화의 힘 (Super Communicator)‘이 생각났다. ’모든 대화는 협상이다.‘ ’ 좋은 대화는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준다’. …


 한참 지나서야 호텔 운영 책임자라는 마크 (Mark, 가명)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나는 일어나 활짝 웃으면서 악수로 인사를 청했다. 바쁜데 시간을 내주어 고맙다고 한 후 말을 이어갔다.

“어젯밤의 일이 화재경보기 오작동으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불이 나지 않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죠.” 마크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들었다. 내가 불같이 화를 낼 거라고 예상하기라도 한 걸까.


 그는 호텔의 모든 화재 대응 절차가 매뉴얼대로 수행되었다며, 자신들이 얼마나 잘 대처했는지 과도할 정도로 세부사항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말을 끊고 싶었지만, 찰스 두히그의 조언을 떠올리며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매뉴얼을 이행했다'는 그의 반복된 설명에서, 이 부분이 마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마크가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도록 기다린 후 내가 말했다. “상황을 직접 겪은 제가 느끼기엔 조금 다르지만, 직원들이 매뉴얼을 따랐다는 것이 중요하죠. 잘 된 일이네요. “ 마크는 침착하게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이 잊힌 것 같아요. 저희는 경보음이 울리는 동안 아무런 안내를 받지 못해 매우 불안했어요. 실제 화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크는 나의 불안을 이해한다며 사과했다. 이어 그는 남은 숙박 기간 동안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으며 그 외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어젯밤에 이미 이 호텔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아 졌어요. 다른 호텔로 옮기고 싶은데, 제가 알아보니 시내 호텔의 가격이 많이 올라있더군요. 추가 비용 없이 남은 3일 동안 여행을 계속할 방법이 있을까요?”


 마크는 잠시 생각하더니, 코펜하겐에 있는 같은 호텔 그룹의 다른 호텔 체인의 방을 알아보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금방 돌아와서는 코펜하겐 시내의  M호텔과 잘 협의가 되었고 이로 인한 추가 비용은 마크 측 호텔에서 부담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우리는 감사 인사를 나누며 대화를 마쳤다. 마크는 자신의 개인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호텔을 옮기는 동안 우리에게 아무 불편이 없는지 몇 번 더 문자로 확인했다.


 새로 옮긴 M호텔은 코펜하겐 시내 중심에 위치한 더 좋은 곳이었다. 처음 묵었던 A호텔 창문 너머 저 멀리 보이던 코펜하겐의 중심가와 강물이 바로 우리의 눈 앞에 떡하니 펼쳐졌다. 어머나 세상에나.

 

(좌) 코펜하겐 시내가 저 멀리 내다 보이던 A 호텔 23층의 뷰. (우) 마크는 우리를 코펜하겐 시내 한복판의 M 호텔로 옮겨주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좋은 대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찰스 두히그의 책에서 배운 기술들이 이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대화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세 가지인 것 같다.


첫째, 감정싸움을 피했다. 나는 화가 날 법한 상황에서도 감정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대화에 임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니,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둘째, 상대방의 말을 경청했다. 마크가 화재 대응 매뉴얼에 대해 설명할 때, 나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무척 힘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마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고, 그에 맞춰 대화를 이어갔다.

셋째, 서로의 요구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을 투명하게 공유했다. 나는 마크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했고, 마크 역시 호텔 측에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을 설명했다. 이러한 솔직한 소통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대화는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 서로의 이해를 돕고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가는 강력한 도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덧. 8월 초의 코펜하겐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덧 2. 마크를 만나러 가기 전, 나는 혹시나 남편에게 험한 꼴을 보일까 싶어 혼자 나섰다. 전장에라도 나가는 듯 비장한 내 뒤통수에 “절대 화내지 말고 웃으면서 교양 있게!”라고 코치해 준 남표니에게 감사를 전한다.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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