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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의사 Oct 08. 2019

겪어본 적 없는 처절하게 유쾌한 기분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이 넘어선 서사 이상의 감각

원작이 유명하고 강렬하다면 이를 바탕으로 한 극이 재현되는 방식에는 전형적인 것과 비전형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원작의 힘과 권위를 살리기 위한 해석에 극단적으로 치밀하거나, 원작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의 새로운 충격을 발생시키는 것. 제작자라면 전자에도 후자에도 각자의 고통과 매혹을 느끼리라.


'이갈리아의 딸들'은 분명히 그런 원작이다. 이 소설은 1977년 발간 이후 전 세계를 여행하며 연령대와 성별을 막론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읽혔으며 여성학 분야의 고전으로 불린다. 일시적 사건을 넘어서 수년을 이어가는 조류로 페미니즘이 자리 잡은 한국에서 이를 원작으로 극을 한다는 것은 어떤 보통 이상의 자신감 혹은 자만심일까? 두 시간이 넘는 1,2부의 극을 마치고 다시 한 시간여의 관객과의 대화가 끝난 시점이라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명히 알게 된다.


이 연극의 제작자와 배우들은 모종의 책임감으로 엮이어 있다. 그들은 극이 올려지기 일 년여 전부터 이 극의 방향과 형식을 연구해왔으나 그 시작부터 무대에 올려진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공통적으로 술회한다. '나는 이 역(할)을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이 맞나? 충분히 내부로 들어와 있는가?' 아무래도 베테랑일수록 더욱 굴욕적인 '척하는 연기'가 아닐까 고뇌한다는 뜻이다. 연출자 역시 고민한다. '이런 형식으로, 이렇게 다루어 가는 것이 맞나? 이런 연출이 혹여 의도대로 이해되기보다 새로운 왜곡을 만들지 않을까?'의 갈등을 드러낸다. 극이 마친 관객과의 대화에서 질의응답은 그런 의욕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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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는 판타지의 세계다. 익숙한 가부장제를 꼭 닮은, 가모장제가 강력한 사회를 설정한 섬. 여성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생물학적 기능은 동일하지만 육아를 하지는 않는다. 장관으로, 선장으로, 잠수사로 요직을 꿰차고 워카 홀릭 일하는데 몰두하며 각 가정의 일, 가사는 남성이 전담한다. 남성은 '부성 보호'를 받는 대상이 되고 선택은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지닌 여성이 한다. 물리력에 있어서도 일반적으로 여성이 더 강인하고 완력이 센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예외적인 인물도 등장한다.)


가정 속에서의 역할 전이, 전복은 상세한 필치로 표현된다. 수줍어하고 내성적이며 조심스럽고 감성적인 것이 디폴트이고 상냥하고 순종적이길 요구받는 남성들과 무뚝뚝하고 권위적이며 야망에 사로잡히는 여성들의 세계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어색함과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는가? 그렇다면 관객인 내가 그만큼 상투의 세계에 물들어있는 건가 자문할 차례가 된 것일 테다.


기법적으로 풍자와 해학이랄 수 있는 자극과 반응의 악마적 디테일은 그저 유희의 소재로 사용되고 버려지지 않는다. 배우가 보여주는 성역할의 전위된 전형성을 통해 관객은 스스로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자신의 역사성을 돌아보는 동시에 이성의 젠더적 삶에 이입하게 되는 경험이다. 현실에서 남성인 배우가 극 중 강간을 당해 사시나무처럼 떨며 고통스러워할 때 여성 관객들이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낸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성역할은 그리 대단하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학습하고 길들여진 표현형이었다는 것을 사변적 논증이나 사회학적 분석이 아니고도 발견하는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은 그래서 빼어난 매체가 된다.


발랄하면서도 우울하고, 익숙한 듯 불편하고, 마침내 처절하게 유쾌한 이 극은 현재 공연 중이지만 아쉽게도 티켓 오픈 당시 수시간만에 급속 매진되었다고 한다. 취소표를 기다리며 재관, 삼관을 할 흥행성을 갖추었지만 이 극의 가장 큰 강점은 시의성이나 자극성이 아니다. 적확한가, 적절한가, 더 나을 수 없겠는가를 고통스럽게 탐구해가는 배우들과 연출진의 합작이라는 점이다.



거칠고 지난하지 않다면

과연 순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을 할 작품의 오픈런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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