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지난 하드 보일드의 딱딱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순례하다...
*2009년 3월 16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내 나이를 반영하는 듯한 내가 야속하여서 한동안 두문불출 하였다. 그 사이 아내는 적지 않은 규모의 수술을 하였고, 이제는 상당히 좋아졌다. 오랜만에 서툰 시간들을 배회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제는 어떤 부담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고군분투 하는 중이다. 비수처럼 꽂히는 말들이 싫어서 느리게 느리게 글들을 읽어 왔는데 이제는 좀이 쑤셔서 안 되겠다. 그래서 이렇게 리뷰를 다시 쓰자면...
아마도 구십년대 PC 통신에서는 만나기 힘들었던 (내 나이도 나이였던지라) 몇몇 손윗분들의 입을 통하여 전설처럼 레이먼드 챈들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사방에 침을 튀겨가며 침 튀기듯 레이먼드 챈들러를 전파할 때에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이제야 그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느낌은... 글쎄? 그들이 전하던 어떤 전설의 위용이 부담스럽던 것인지 내게는 조금 딱딱한 스타일의 추리 소설일 뿐이다. 그러고보니 하드 보일드 스타일은 그럭저럭 제대로 전달된 셈일런지 모르겠다.
“키가 크시네요, 그렇죠?” ...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오.”
“프로 권투 선수예요?” ... “꼭 그런 건 아니고. 난 탐정이오.”
왠지 거들먹거리는 듯한 말투의 주인공 필립 말로는 탐정이다. 전직 형사이지만 조금 고지식한 편이다. 어찌 보면 통하지 않는 유머를 구사하는 이 탐정은 눈썰미가 좋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배짱을 가지고 있다. 어지간한 위험 내지는 위협 앞에서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다. 딱히 믿는 구석도 없지만 그렇다고 인적 네트워크가 전무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보편적인 인정과는 거리를 두고 푸석푸석한 것을 멋으로 자신의 방식으로 사건과 부딪칠 따름이다.
“... 장식이 거의 없이 딱딱한 남성적인 침실이었다. 반들반들한 나무 바닥에 인도풍 디자인의 작은 융단이 두 장, 등이 똑바른 의자가 두 개, 검은 나뭇결 무늬의 커다란 청동 촛대에 꽂힌 검은 초가 두 개. 침대는 폭이 좁고 딱딱해 보였으며 진갈색 밀랍 염색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그런가하면 소설에서의 묘사 방식 또한 마치 사진을 찍어내듯이 무미건조하다. 사건의 현장은 그렇게 주인공의 눈을 통하여 시시콜콜 독자에게 전달되지만, 딱히 그것 안에 사건의 실마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해결과는 무관한 부분들까지 소설은 냉랭하게 묘사할 뿐이다. 구구절절 칭찬 세례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눈에 쏙쏙 들어오지 않은 것은 사실 이처럼 건조한 문체가 내게 맞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모두 다. 가이거와 깜찍한 협박 사기, 브로디와 사진, 에디 마스와 룰렛 테이블, 캐니노와 러스티 리건이 데리고 도망가지 않었던 여자. 모두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거지.”
하지만 퇴역 장군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는 것에서 시작하여 퇴역 장군의 망나니 같은 두 딸, 이들을 유혹하거나 이들이 유혹하는 남자들, 몇몇 사기꾼과 이 사기꾼의 협조자들 그리고 필립 말로를 돕는 경찰과 그를 위협하는 경찰들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아예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이름 석자에 경도되지만 않는다면 그럭저럭 읽을만한 추리 소설일 수도 있다는 그런 말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 박현주 역 / 빅 슬립 (Big Sleep) / 북하우스 / 375쪽 / 2004 (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