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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3시간전

아니 에르노 《그들의 말 혹은 침묵》

육체와 정신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성장을 도모하는 그 시기에...

  소설은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나는 중학생인데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방학을 앞두고 있으며, 선생님으로부터 작문 숙제를 받은 상태이기도 하다. 적당한 수준에서 자의식, 그러니까 여성이라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딸이라는 사회경제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육체와 정신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성장을 도모하는 딱 그 시기가 소설에서 그려진다.


  “가끔 내게 비밀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비밀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구가 없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니까. 정말 이상도 하지. 셀린은 한 학년 위인 고등학생 남자애와 사귄다. 걔는 4시면 우체국 거리 모퉁이에서 셀린을 기다린다. 적어도 그건, 셀린의 비밀이란 건 훤히 보인다. 내가 셀린이라면 그런 비밀은 숨기지조차 않을 텐데. 하지만 내 경우에는 형체가 없다. 그 생각만 하면 스스로가 둔하게 느껴지고 굼벵이가 된 것 같다.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될 순간까지, 열여덟 어쩌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쭈욱 자고 싶다. 모든 게 명확해지고 제자리를 찾는 날이 있겠지...” (p.7)


  하지만 이 합심이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보통은 육체가 앞서가고 정신이 그 뒤를 따르는 양상이고, 소설 속의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남자가 있는 동년배의 여자친구들을 질시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도 마뜩잖다. 나는 조심스럽게 부화하고자 하는 나비 같은 존재이고, 사실은 부모의 간섭도 어지간하여 쉽게 날아오르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 그들에겐 휴가도 생피에르 축제도 없고, 마치 현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다. 늘 직업, 교육, 장래만을 향해 돌아가는 고개. 그런 생각이라면, 두 발을 모아서 곧장 미래로 도움닫기를 하거나 아니면 말짱한 상태로 미래에 도달했음이 확실해질 때까지 날 가둬 두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조금 늦었다고 그런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을 보면, 혹시 날 가둬두는 게 그들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개학. 고등학교. 개학. 그러고 나면? 평생 그렇게 지속될 수는 없을 텐데...” (p.62)


  하지만 나는 충분히 컸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는 오후에 움쑥 들어간 어머니 등에 붙어서 함께 잠드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 라고 스스로를 표현할만 하다. 나는 친구 가브리엘의 남자였던 마티외와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관계를 진척시켜 나간다. 방학 캠프의 지도 교사를 담당하는 마티외를 비롯한 일군의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다. 나는 작은 실패들에 굴하지 않는다. 


  “... 그 일은 어쨌든 제대로 이루어진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고통스러운 그 모든 몸놀림만 없었어도, 그를, 마티외를 즉각 사랑했을 텐데. 땀투성이 그의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변모가 일어났던 거기, 그곳을 아직 만지게 되지는 않았는데, 그가 떠나는 순간 원피스 위로 자기 손을 얹으며, 내 거야 이거, 말했다... 어째 됐든 웅크리고 있던 그 작은 짐승, 그게 무엇을 원하는지 우린 모른다. 그것을 처녀성이라고 부른다먼, 과연 정확할까. 게다가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닌 거기에 크루뉴뉴라는 이상한 이름을 붙인다. 명명할 수 없는 대상이라니, 쳇, 내 안에 그런 건 없었다...” (pp.130~131)


  나는 마침내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이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나는 마티외를 겪은 이후 또 다른 남자 얀과도 관계를 맺는다. 나는 이러한 나의 행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 육체의 속도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마티외는 나의 이런 행태를 비난한다. 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 당사자 아닌 또 다른 젊은 육체가 거들고 나선 것인데, 그러니 그 비난이 성공적일 리 없다.


  “... 교사가 내준 주제에 대해서 아무 할 말도 없다. 내 마음 가는 대로 쓴다면, 뒤죽박죽 엉망이 되겠지. 자유롭게 써도 된다면 피와 비명에 대해 말할 텐데. 그뿐만 아니라 빨간 원피스, 그리고 청바지도 있었다. 사람들은 사건에서 옷가지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그리고 부엌에서의 식사도 중요함을 짐작하지 못한다. 또 한 끼 넘겼구나, 아버지가 말하고, 어머니가 피곤한 두 다리를 쭉 펴면, 나는 그 올무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 한다. 그런들 뭐 대수겠어, 나도 내 부모처럼 자잘한 것들에 빠져서 길을 잃을 거야, 그 두 사람이 한 얘기를 또 하고 거듭 같은 얘기를 시작하면 진정 출구란 없다...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나도 그렇게 될까. 이제는 온갖 일이 다 겁나고, 마음속에 아주 모호한 뭔가가, 마치 구름이 낀 것 같다. 작문 과제를 절대 마치지 못할 텐데, 교사는 내게 빵점을 주겠지. 바로 그 교사가 이런 말을 한다.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저 여자는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pp.190~191)


  그리고 소설은 위와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어린 소녀라는 육체적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나와 변변한 자산을 갖지 못한 계급의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나는 어쩌면 동전의 양면 같다. 혹은 제로섬의 두 당사자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앞의 나가 성공하는 순간 뒤의 나가 실패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소설 속의 나는 이 두려움으로 가득하면서도 동시에 그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어 아찔하다.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 정혜용 역 / 그들의 말 혹은 침묵 (Ce Qu’ils Disent ou Rien) / 민음사 / 202쪽 / 2022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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