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밤,비,뱀》
’밤‘, ’비‘, ’뱀‘의 옆자리에 ’봄‘을 가지런히 놓아가면서 시집을 읽은 것이 어언 두 달여... 나는 그사이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으로 도망을 다니다가 그만 ’작고 굵은 것‘ 위로 자꾸만 넘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발뒤꿈치로 들어온 못 말리는 통증은 조금씩 위치를 바꿔가며 나를 괴롭혔는데, 그것은 만만치 않은 통증이었다가 이제는 어랏 그저 간지럼일 뿐인가, 의심하게 만들면서도 아직 내 발뒤꿈치의 근처에 머물러 있다.
“식물은 물결치는 밤의 머리카락 / 묶을 수 없다 // 목 뒤로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 // 작고 굵은 것을 잉태해, / 밤이 말한다 / 비탈길을 타고 도망가, / 뱀이 말한다 / 모든 것에 스민 후 재빨리 사라지렴, / 비가 말한다” - <밤의 식물원> 중 1
나는 원체 독이 오른 봄을 좋아해서 실컷 물려주마, 아무도 모르게 헤매고 돌아다니고는 했는데, 피치 못할 코로나의 형국에서는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봄이 여기로 왔는지 저기로 왔는지 눈 들어 사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달이 바뀌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어쩌면 그것은 억울하기 그지없는 봄의 마지막 투정 같은 것이려나.
“그는 이 식물원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존재. 물을 마시고 동물을 뜯어 먹으며 광합성에 실패한다. 그는 움직이면서 파괴되는 병에 걸린 식물. 우주가 그의 병상이다.” - <식물, 인간> 중
그러니까 다스려지지 않는 자연의 위력 아래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을 품은 조급하게 노화하려는 몸이 가까스로 버텨낸 봄이었다. 어떤 느낌들은 그저 느낌으로만 남아 있지 못하고 화인처럼 몸에 자국을 내기도 했다. 초조하게 상처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한 번씩 세계가 확 접혀버리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아서 다시는 펴지지 않을 것 같은 소리의 침묵을, 느꼈다.
“잠든 파수꾼 부르르, 몸을 떨겠지 / 지키지 못한 것은 꿈속으로 도망간 것 // 잠이 녹색 파도라면 / 파도는 은색 잠” - <파주, 잠든 파수꾼> 중
식어버린 봄의 찻잔 앞에 두고 탁자 위에 남은 봄을 톡톡 두들기고 있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리듬은 거듭되고, 출렁이며 넘친 봄이 남긴 것은 모두가 상처받았으니 모두가 위로해야 한다, 라는 점괘였다. 강가의 나무를 쓰러뜨린 바람은 상처였고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은 위로였다. 난폭하게 치닫는 세계는 상처이고, ’당신‘이라는 말 속에 산다는 ’작은 신‘은 위로이다.
“’당신‘ 이라는 말 속엔 작은 신이 살고, // 너무 작아서 // 당신은 자주 사라지나?” - <자꾸 돌아오는 이별> 중
봄을 건너뛰었다. 무엇도 아래에 없는 허공을 가로지른 느낌이다. 거기에 내 그림자가 우두커니 있었다. 아직 거기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불행의 일상화가 비교를 낳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내 그림자 사이의 비교 우위를 논하는 것도, 봄의 멸망 이후에는 무의미하다. 사실 우리 모두의 진심은 사라진 봄에 담겨져 있고, 우리는 어쩌면 이제 진심이 없는 봄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박연준 / 밤, 비, 뱀 / 현대문학 / 103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