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시시각각 03화

나부끼던 새들 온데간데없고, 하루는 서둘러 기록되어..

김선재 <목성에서의 하루>

by 우주에부는바람

비가 내리면 나부끼던 새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내가 이미 묻은 것들과 묻어야 할 것들 사이로 비가 내린다. 치매에 걸린 개가 비를 맞으며 짖고 꼬리가 꺾인 고양이가 웅덩이를 건너며 본다. 자라다 만 구름이 쏟아져 내린다. 가라앉은 하늘을 헤엄쳐 다니던 것들이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조용하게 멈춰 선 공터로 쏟아져 나온다. 온종일 비를 기웃거리던 하루가 서둘러 기울었다.


“바람은 바람의 의지일까 지구의 의지일까 우리의 의지일까 풍선만큼 줄어들며 생각했다 잠이 든 새를 대신해서 생각했다 누군가 있는 힘껏 옆구리를 꼬집을 때까지 대신 살고 대신 웃었다” - <오늘 하루 무사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중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유로운 하루들이 모여 신산한 삶이 완성될 것이다. 어느 하루와는 타래가 풀리기 시작한 우와기처럼 서서히 헤어졌다. 어떤 하루는 반듯하지 않게 꿰매진 퀼트처럼 촘촘하지 못하여 서서히 부서지곤 했다. 내가 밟고 지나온 그림자들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동안 내가 밟은 적 없는 내 그림자들만 소란스러웠다. 영영 간 것들과 이제 막 도착한 것들은 마주치는 법이 없다.


“하루라도 다 같은 하루는 아니어서 // 나는 여기 있어요” - <목성에서의 하루> 중


날다, 를 대신하는 헤엄치다, 의 시간들이 계속 쌓이고 있다. 시간은 쌓여가지만 나는 점점 나의 밀도를 낮춘다. 날지 못하는 대신 거대한 물의 도가니에서 가라앉지 않는다. 무게가 사라진 자리에 소리도 사라지고,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사라진 자리를 줄지은 물방울들이 차지한다. 제아무리 큰 한숨도 뱉어내자마자 흩어지고 결국은 터져버린다. 그것들 사이로 날다, 를 대신하여 헤엄치는 것이다.


“때로 사람의 기록과 사랑의 기록 사이에 갇힌다. 기억은 종종 기억을 버리고 기록이 되는 쪽을 택한다. 나는 기록을 지우는 사람. 지워지는 사람. 서쪽의 구름처럼 모여드는 이름을 되뇌는 사람. 어떤 겨움의 겹은 계단처럼 희다. 셀 수 없이 부풀어 오른다. 부드럽고 고소하게, 고소하고 따뜻하게.” - <희고 차고 어두운 것>


빠름의 숙주는 느림이어서 혹은 느림의 숙주는 빠름이어서, 속도와는 무관하게 산다. 어느 쪽에 기생을 하던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속도가 변질되지 않도록 섞는 일에만 골몰한다. 기록은 기억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마구 섞는 일에 가깝다. 왜곡은 증명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증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애초에 없었던 일이 벌어질 때에만 기억은 마무리된다.


“날마다 새는 날고 나는 / 운다 / 새는 날면서 울고 / 나는 / 울면서 늙는다” - <큰 새> 중


도통 내딛는 걸음들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러다 새라도 된다면 좋겠지만, 글쎄다. 비 오는 날이면 종적을 감추던 패기가 그립다. 순서를 잊은 시간들이 아무것도 없는 현재로 불쑥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반기는 것인지 밀어내는 것인지 분명치 않은 궤적으로 손을 젓는다. 그러고도 남겨진 시간이 있으면 그것을 기록한다. 나는 것을 대신하여 헤엄치고 기록하면서 늙어가고 있다.



김선재 / 문학과지성사 / 144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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