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시시각각 01화

모든 사태의 다음 날 아침을 향한 다리 없는 것들의..

신해욱 <무족영원>

by 우주에부는바람

바람이 분다. 다급하다. 부족하다. 굼뜨다. 느긋하지 못하다. 파랗다. 솔직하지 않다. 다짐하다. 소슬하다. 피력하다. 자꾸 걷다. 뒤돌아서다. 담다. 집다. 까닥거리지 않는다. 숨다. 들키지 않다. 확실해지다. 아니다. 기다. 서다. 사실이다. 우려하다. 찍다. 보다. 말하다. 펼치다. 거부하지 못하다. 많다. 적다. 기록하다. 꺼내다. 들여다보다. 먹다. 일하다. 울다. 삭히다. 나오다. 들어가다. 연락하다. 안다. 모른다. 살아야겠다.


무족영원


깊은 잠을 자는 개의 규칙적인 숨소리 옆에는

음을 영원히 놓친

가수의 표정만이 허락된다고 하지.


그런 표정을 연습한 적이 없으니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애국가보다 재미있는 노래를 하나라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족영원의 순간이라 중얼거려봅니다.


열대에 서식하는 백여 종의 눈먼 생물이

양서류 무족영원목 무족영원과에 속한다고 합니다.


다리 없는 것들이 바람 없는 곳으로 들어가려 한다. 명암의 구분이 의미 없는 곳에서 내 어린 시절의 다락 같은 곳에서 내 더 어린 시절의 묘지 같은 곳에서 손가락 마디를 더듬어 시간을 헤아리려 한다. 시간도 인습이어서 시간마저 거부하려는 마음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종횡의 궤적을 그린다. 그 궤적을 더듬어가며 시간이 흐른다. 다리를 절고 팔을 꺾고 고개를 외로 틀고 좀비처럼 흐른다.


“물이 끓는다. 머리가 뜨겁다. 무너진 문장과 무너진 계통. 깨진 문장과 깨진 그릇. 상한 문장과 상한 양분. 난생설화를 새로 휘갈겨 뒤죽박죽으로 지저귀는 새에게 바치고. 부르르 열패감의 쾌락에 무릎을 꿇고. 눈이 풀리고 // 입냄새가 나고 // 요물이 꿈틀그리고 // 낄낄거리고” - <휴머니티> 중


성급한 애도와 섣부른 불가피와 가까스로 찾아낸 낙관이 뒤섞인다. 두렵고 싫은 것들이 무리를 이뤄 거리를 가득 채운다. 이국의 취향이란 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득한 곳도 먼 곳도 없다. 지구는 순식간에 압착되었다. 내 머리와 네 다리와 우리 어깨와 너희들의 발바닥이 구분되지 않는다. 구분되지 못함을 알고 있는데도 찾아내고 밀어낸다. 잘라내고 부수고 멀뚱멀뚱 바라본다.


“주전자가 반짝인다 // 주전자에 비친 요정은 뚱뚱하다. 터질 것 같다. 상식이란 게 없다.” - <홀로 독> 중


우리의 갈망은 땅으로 떨어지고 폐허가 환상 속으로 떠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갈라짐이 갈라섬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우리는 우리를 실어 나르는 어떤 우리가 되어 우리를 실어 나른다. 어떤 이는 너무 과묵하고 어떤 이는 너무 소란스럽다. 소수의 사람들이 과묵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소란스럽다. 과묵과 소란이 그대로 끝나지 않으려고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제멋대로인 모두가 제멋대로 붐빈다.


“삶에는 웃음의 농도가 높아서. 삼투압에 시달리게 되어 있어서. 흘러든다. 흘러들 것이다. 흘림체로 씌어질 것이다. 하루에 한 줄씩. 줄에서 줄로 의미를 두려워하는 듯 전전긍긍하다 부패하는 글씨. 물 얼룩으로 뒤틀린 종이.” - <웃지 않는 소설> 중


허약한 이들의 연대와 가여운 이들의 유대가, 주저하는 마음들과 충분하지 못한 생각들이 거리에 도착해 있다. 도처에 있다. 되풀이되는 일상이 주던 감동을 파괴된 거리에서 떠올린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던, 주어진 소소한 역할을 감내하던 이들이 미증유의 사태 앞에서 무릎 꿇지 않기를, 따로따로 기도하는 이들도 있다. 이 무모한 사태의 다음 날 아침을 향한 지금의 어둠은 깊기만 하다.



신해욱 / 무족영원 / 문학과지성사 / 127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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