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시시각각 04화

포옹은 용서이고 나지막한 사랑인데...

박라연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by 우주에부는바람

들킬 염려가 없는 은신처의 문고리를 만지작거린다. 나는 닫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열고 싶은 것인지, 허락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되돌려보내고 싶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어느 때 나는 문외한이다. 접촉은 유령처럼 희미하고 모험은 심해의 바닥처럼 모호하다. 오랫동안 절벽 끄트머리의 바람, 한 번 오고 나서 다시 가지 않는 바람이 나를 가로질렀고 좁고 긴 하루가 그때 시작되었다.


아직은 우리 집


새벽이 잠 깨어 물 한 모금을 마시는 자유


얼마나 광활한가!


아직 흐르지 못한 시간들이 고여 있는 시간, 입을 열면 하얗게 젖은 입김이 만들어내는 공간, 뉘앙스의 한 가운데로 돌진하는 안이한 모습으로 가득해도 좋았다. 나는 태어난 적이 있고 당신은 죽은 적이 있지만 우리 삶의 교차로에서는 고작 신호 대기음만 짧게 울렸을 뿐이다. 우리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우리가 있어 두 사람이 모두 살았거나 죽었거나 다시는 부인하지 않으리라.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이 세상 모든 눈동자가 옛날을 모셔와도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이제 저는 아니랍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 되었습니다.

천근만근 애인의 근심만은 입에 물고 물속으로

쿵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 사라질 태세입니다


그림자의 손이 아무리 길게 늘어나도

ㅉ이 ㅃ으로 ㄴ이 ㅁ으로 쳐질 때 있습니다

한계령에 낙산사 백사장에 우리 함께 가요,라고

말할 뻔했을 뿐입니다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그림자 스스로 숨 거두어 가주던 그날

배고픈 정신의 찌

덥석 물어주는 거대한 물방울의 색깔을 보았습니다


경직되고 파괴된 나의 옛 피신처는 유일무이하다. 압박에 굴하여 무릎을 꿇었던 생의 거실에는 맹렬한 숨소리만 흔적으로 남았다. 신음하는 대신 설명하다 내가 놓쳐버린 것들로 자욱하다. 세계는 덤불에 가려져 있었고, 좁고 붉은 빛은 언덕을 넘어서지 못했다. 눈길을 먼저 보내고 나도 금세 따라갈 수 있는 줄 알았다. 내가 감싸쥔 것은 내가 움켜쥔 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해녀의 세계


몸으로 어둠의 혓바닥을 확 그을 때 환해진 어둠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생포한 어두만 생생한 물속 어둠만 들이켜는 해녀 물질할 때만 그 순간만 겨우 환해도 족하다


가마우지 날고 몸 하나 띄울 저 맑은 물살이면 족하다 수십 해의 숨비소리와 맞바꾼 쭈글쭈글한 심장을 팔아 몸에 밴 짠맛 팔아 잠재울 풍랑이면 족하다 환함을 물에 풀어 끼니의 등대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움직이는 대신 앉았다. 낮의 룰루랄라 벤치에 앉아 세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람했다. 잉걸불을 들여다보며 쪼그리고 앉았던 새벽은 그렇게 가파르기만 하였고, 서둘러 일어나느라 매일매일이 구르고 굴러 지금 여기로 쏟아졌다. 칼집 안의 칼처럼 침묵하는 시간만이 목소리를 잉태하는 것, 떠내려간 무표정들이 산란을 위하여 거슬러 올라오는 법은 지금 여기에는 없다.


“상처가 노을의 일부인 줄 몰랐을 때 / 그의 시간 속에 붉은 노을 스며들 때 / 남남인 어제의 아픈 고백들이 흘러들어와 / 조금은 더 붉게 붉어졌다” - <몬테그레토에 밤이 오면> 중


엎드려 있는 비탄의 저녁, 구원자의 계급은 맹수이고 맹렬히 경계하던 울타리는 부서졌다. 매혹이 보내는 가느다란 수신호가 스며든다. 서럽게 등극한 것이 왕좌에 앉아 있다. 좋고 나쁨을 분간할 수 없는 소식들이 발치에 놓이고 판결보다 눈물이 먼저 고인다. 포옹은 용서이고 나지막한 사랑인데, 이미 품고 있는 불안이 있어 저어하는 육신, 내가 묘사하려다 만 것들만 울고 있다.



박라연 /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 문학과지성사 / 139쪽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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