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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천년의 질문》

두텁기만 한 우리 사회의 어두움과 얄팍하기만한 우리의 선택지...

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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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지난 주말 서초동 검찰청사 주변을 촛불이 가득 채우던 시간에 조정래의 소설을 읽었다. 그곳에 가지 않았다. 이런저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야 한다는 마음이 컸던 나와는 달리 아내는 한 진보 인사가 지금까지 내뱉은 말들과 그의 가족들이 보여주고 있는 바의 불일치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조국의 행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검찰 개혁이 물 건너가도록 둘 수 없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어떤 사건을 얼마나 수사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수사권’, 기소를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기소독점권’, 기소한 다음에 재판에서 행하는 ‘구형권’, 경찰을 상대로 하는 ‘수사 지휘권’, 그리고 직접 수사권을 발동하는 ‘수사 인력 소유’까지, 검사가 행사하는 권한은 실로 ‘천하무적적’이었다...” (pp.112~113, 2권)


  시국이 이러하여 대한민국 검사의 막강한 특권을 언급하였으나, 소설은 우리 사회의 전방위적인 기득권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재벌가의 돈을 향한 막가파식 욕망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는 천민적인 행태, 이들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직업 윤리를 진즉에 내팽개친 언론, 재벌에 빌붙고 언론을 이용하고자 하는 국회의원의 노회한 아귀다툼 등을 중심으로 하여 21세기 우리 사회의 곯아버린 상층부를 직접적으로 겨눈다.


  “... 언론 재단 만들어 기자들 해외 연수 보내고, 이런저런 이름 붙여 기자들 상 주고 해서 효과 톡톡히 보아온 것이 다 그 꾀돌이 공 아닌가 말야. 그 일들은 광고비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하면서도 효과는 광고비 못지않았거든. 광고비야 사장 목 조이는 것이지만, 해외 연수나 상은 바로 기자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효과 만점 아니었던가. 좀 삐딱하고, 까칠하고, 시건방진 게 기자들이기 마련인데, 그 해외 연수와 상은 그들을 풀 죽게 하고, 유순하게 만들고, 마침내 무한 충성을 바치게까지 하지 않았던가...” (p.152, 2권)


  재벌과 언론과 국회가 부리는 패악질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어쩌면 이들 사이에 거래되는 돈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재벌가의 비자금을 사이에 두고 추격전이 벌어지고, 국회의원은 자신에게 정치 자금을 대줄 사업가의 뒤를 봐주고, 그림 구입을 통한 증여와 탈법의 세계가 등장하고, 범죄 행위를 덮기 위해 수십 억을 주고받는 재벌가와 전관예우 변호사 그리고 판사가 활개를 친다. 


  “자기보다 10배 부자면 헐뜯고

자기보다 100배 부자면 두려워하고

자기보다 1,000배 부자면 고용당하고

자기보다 10,000배 부자면 노예가 된다.” (p.275, 1권, 사마천의 말)


  탐욕의 정점에 있는 재벌로부터 시작되는 돈의 흐름은 그렇게 기득권이라고 부를만한 우리 사회의 이곳저곳을 향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세 권짜리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는 장우진 기자가 그렇다. 그 기자 곁에는 대학강사인 고석민이 있고, 좌천된 검사인 황원준이 있고 민변의 변호사인 최민혜가 있다.


  “... 우리가 하고자 하는 시민단체의 전국민화, 시민 활동의 일상화, 시민 요구의 정치화와 상통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1,000만 인이, 1,000원씩, 100개의 시민단체를 결성하는 것입니다...” (p.325, 3권)


  그리고 소설이 막바지에 다다르게 되면 작가는 (이들을 통해) 시민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작가는 소설이 진행되는 틈틈이 시민사회단체의 역할과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소설은 결국 장우진 기자를 비롯한 이들이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그것이 현실적이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획기적인 시만단체 결성을 도모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우리는 선거 때마다 탁월한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결국은 실망하여 차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에 늘 빠진다. 그 결과 지금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종언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원래 민주주의란 지도자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잘났든 못났든 민초들 자신이 공적 공간에서의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를 통해서 최선의 집단적 지혜를 얻는 방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사회자가 필요할 뿐, 지도자란 필요 없는 존재이다...” (p.368, 3권)


  다시 서초동의 촛불로 돌아가서, 아내와 엊저녁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관련하여 작게 다퉜다. 아내는 조국수호라는 구호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하였고, 나는 그 구호는 그곳에서 나온 여러 구호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얄팍한 선택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포기할 수 없는 올바름에 대해 반문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 아내와 질문을 받은 나는 각자의 복잡한 심경을 힐끗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조정래 / 천년의 질문 / 해냄 / 1권 413쪽, 2권 405쪽, 3권, 403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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