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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쓰 Nov 29. 2020

친구 결혼식

행복하길.

어제는 로스쿨에서 만난, 제일 친한 친구 결혼식이었다.

축사를 부탁받아서 결혼식 한 일주일 전에 초안을 완성하고, 이틀 전부터 본격적으로 외웠다.

초안 쓰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던 친구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실 축사를 쓰면서도, 별로 와닿지가 않았다.

결혼해 본 적이 없으니. 친구가 결혼을 정말 하는 건지 실감도 안나고.

이렇게 친한 친구의 결혼은 처음이라 아마 더 그랬던 듯 하다.

매번 사람들이 거하게 결혼식하는 걸 보면서, 그 지루한 허례허식의 일부가 되기 싫다는 생각에 매번 일찍 나와버리곤 했으니까. 그래서 결혼식에서 뭘 하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내 친구라고 단촐하게 식을 올린 건 아니다.

덕분에 호텔에서 고기도 썰었고.

그런데도 신기하게 내 친구 결혼식은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원효대사가 해골물 타령을 괜히 하신 게 아닌 것.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렸다.


다른 친구는 자기가 식 전날 잠을 못 잤다는데.

나는 식이 끝나고 나서야 참 요상하게도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지, 그 친구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닌데.

우리 사이는 변함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마음은 모두 식이 끝난 후에 밀려왔고.

어제 식이 진행되는 동안은 오히려 살짝 들떠있었고, 친구 얼굴 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진심으로 친구가 행복하길 바랐다.


친구야.

축사하면서는 오열할 것 같아서 짧게 줄였던 마음을 여기 살짝 풀어둔다.


나보다 어리지만 항상 언니 같았던 네 덕분에 길었던 로스쿨 + 재시 생활을 견뎌냈어.

내 지랄 맞은 성격을 다 알면서도 받아준 몇 안되는 사람인 걸 안다.

사실 네가 나한테 해준 만큼 나도 너에게 해 줄 수 있을지 가끔 의문도 들더라.

앞으로는 받은 것보다 더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네가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 없다.

외동인 너한테도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기댈 수 있는, 형제 같은 친구였으면 좋겠다.


참 식상한 말이지만 오래 행복했으면 해. 너무 많이 싸우지 말고, 현명하게 어떤 일이든 이겨낼 수 있기를.

사랑한다.




아래는 내가 한 축사 전문.

식장에서 아주 조금씩 변형을 하긴 했지만, 많이 다르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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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객 여러분.

오늘 귀한 시간 내어 두 사람의 시작을 축하해 주러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신부 **양과 로스쿨이라는 이름의 고통을 함께 견뎌낸 사이인데요, 군대 동기 같은 거라고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공부를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어쩌다 보니 로스쿨에 들어간 케이스라, 들어가서 적응하는데 고생을 꽤 많이 했습니다. 근데 힘들때마다 **이가 정말 큰 힘이 되어줬구요. 사실 **이가 없었더라면 제 변호사 자격증도 없을 겁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제 변호사 자격증을 **이에게 바칩니다.


**이와는 계약법 첫 시간에 옆자리에 앉으면서 친해졌어요. 예쁘게 생겨서 성격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너무 재밌는 친구인 거예요. 덕분에 정말 웃을 일이라곤 없었던 로스쿨을 다니면서 많이 웃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위트 있는 친구라, **이랑 같이 있는 내내 웃었던 기억밖에 없어요.  **이를 아시는 분이라면 공감하실 겁니다.


그렇게 저희는 친해졌고, 저는 운좋게도 여기 두 사람 신랑과 신부가 시작할 무렵에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가 소개팅을 한다더라구요. 그래서 한 번 만나고 왔는데, 남자분이 맘에 든다고, 아마 한 번 더 볼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두 번째 보기로 한 날 즈음 어떻게 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가 하는 말이, 언니 이 사람 좀 특이한 거 같애. 다리 두 쪽 다 부러졌는데, 휠체어 타고 나 보러 오겠다는데?


? 그게 무슨 말이니?

알고보니 신랑이 그 때 교통사고가 엄청 크게 났던 거예요. 정말 다리가 두 쪽 다 부러지고 갈비뼈도 다치고 - 많이 다쳐서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무리를 해서 다리 두 쪽 다 깁스를 하고 **이를 보러 오겠다고 한 거죠. 나중에 신랑한테 물어보니까, 약속 파토내기 너무 좋은 핑계처럼 들리지 않냐고. 그래서 더 보자고 했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저희는 그때는 그런 걸 잘 모르니까...

어떻게 생각해야 될 지 모르겠더라구요. 정말 그렇게 크게 다쳤으면 정말 안정을 취해야 할 거 같은데 - 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소개팅한 여자를 만나러 온다는 게 - 감동을 받아야 할 일인지, 좀 무섭다고 생각해야 할 일인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결국 그 때 신랑이 저희 학교 있는 쪽까지 **이를 보러 오면서 두 사람은 만남을 지속하게 됐고, 그 결과 저와 여러분은 오늘 고기를 썰게 됐죠.

일이 이렇게 되려고 한 거였겠죠?


오늘 축사 부탁을 받고, 너무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생각해서 흔쾌히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승낙을 하고 보니까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구요. 제가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보다 엄청 많이 산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이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친구를 아끼는 마음으로, 두 사람의 앞길에 밝은 날만 있기를 빌어주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이는 똑똑하고, 재미있고, 현명하고, 굉장히 마음이 넓은,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같이 지낼수록 참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신랑도 **이와 비슷한 것 같더라구요. 그리고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보기드문 커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삶이 긴 만큼 결혼도 긴 여정이겠지요. 그 긴 여정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을 거예요. 결혼이라는 건, 결국 삶의 그 모든 희로애락을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나누겠다는 약속이니까, 내가 그 먼 길을 옆의 이 사람과 같이 가겠다는 결심이니까, 그런 약속과 결심을 나눌 짝을 찾은 두 사람이 오늘 참 멋지고, 대견하고, 빛나보이네요.


앞으로 쭉 아끼고 사랑하면서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 잘살 거예요. 저는 확신이 있습니다.

하객 여러분께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십시오.

**아, 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2020.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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