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 사회초년생이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몇 주 전 뜬금없는 DM을 받았다. 내가 광고회사를 떠났다가 다시 광고회사로 돌아온 이유가 너무나 궁금하다는 DM이었다. 그 분은 내가 신입사원 타이틀을 달던 따끈따끈한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감사하게도 브런치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접하셨다고 했다.
DM을 받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나의 행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단 것이 신기하고 고맙기도 했지만 솔직하게 말해도 될지 주저됐다. 사실, 무 자르듯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세 번의 이직으로 얻은 교훈은 "좋은 일터, 좋은 직업, 좋은 회사는 다르다"는 것일 뿐. 즉, 내가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팀원들과 일상을 보낸다"고 인식하는지, "직업 전문성을 갈고 닦는다"고 인식하는지,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과 돈을 등가교환한다"고 인식하는지에 따라 만족도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일 뿐이었다.
광고학과를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저 광고쟁이가 된 것이 좋았다. 어렵지만 기획서 쓰는 일도 재밌었다. 다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한 브랜드를 오랜 기간 마케팅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결국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의 마케팅 사이드로 이직에 성공했다. 얼마 가지 않아 "광고회사가 아이디어를 발산하고 미시적으로 실행하는 조직이라면, 마케터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캠페인을 거시적으로 실행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체감하며 그 갭이 주는 딜레마에 빠지긴 했지만.
아이데이션을 할 때의 즐거움이 대폭 축소된 환경에서, 개인적으로 새로운 역량을 쌓고 그것에 재미를 붙이는 일이 상당히 힘들었다. 성장을 부르짖던 나였지만 처음으로 "이 환경에선 생각하는 것 만큼 성장할 수 없을 것 같다"라는 낙담도 해봤다. 고민이 길어지자 몸에도 이상이 생겼고 자주 아파왔다. 결국 봉착한 질문은 "이 업계에서 내가 5년은 다닐 수 있을까?"였다. 겨우 5년 후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다니, 나답지 않았다. 이에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퇴사를 결정했고, 잠깐의 쉼 끝에 꼭 한번 일해보고 싶던 스타트업에서 커뮤니티 기획을 경험했다. 일 년 남짓한 시간이지만 인사이트적으로나, 인생에 있어서나 무척 값진 배움을 얻을 수 있던, 갭이어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광고가 아니었기에, 마케팅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내 전공을 살리는 일을 빨리 다시 하고 싶다는 불만족과 갈증이 일었고 결국, 다시 광고회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광고 마케팅의 미래는 오프라인 경험 창출에 달려있다는 비전을 갖게 됐기에 이번엔, ATL이 아닌 BTL 쪽으로.
누군가는 이러한 커리어패스를 메뚜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글쎄, 단 한번도 허투루 생각하거나 깊게 고민하지 않은 적이 없기에 나는 커리어패스에 있어 당당하다. 내가 손도 빠르고 생각도 빠른 만큼 의사결정 역시 빠르게 택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내가 당당히 걸어갈 수 있을 만한 길을 만들어놓을 수만 있다면, 이직의 횟수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 나는 이제서야 뭔가 뚝심있게 오랜 경험을 쌓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이직의 시기를 겪으며 좋은 일터, 좋은 직업, 좋은 회사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감정적으로 행복했지만 성장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때도 있었고, 너무나 불행했지만 실력적으로 크게 좋아졌던 때도 있었다. 결국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하느냐가 관건이라면, 이 시기에 내가 가치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직업 만족도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 같다.
좋은 일터의 핵심은 사람, 좋은 직업의 핵심은 자아효능감, 좋은 회사의 핵심은 처우라고 본다면 그 세 가지 가치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가느냐가 앞으로 남은 직장인으로서의 미션이 아닐까. 물론 한 20년 뒤면 벗어던져야 할 껍데기겠지만, 삶의 절반정도를 살았을 때 그 20년이 참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오길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