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힘들다
대퇴사 시대라고들 한다. 글로벌리 대잔류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한국에서는 아직도 '퇴사'라는 단어가 생생히 유행처럼 살아있다. 퇴사 사유는 제각각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해받지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도 못해서 퇴사라는 결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직 내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사소한 아이디어에서부터 큰 의사결정까지 천편일률적으로 모두가 같은 의견이 나올 수는 없다. (만약 그런 조직이 있다면, 그건 분명 상명하복 조직이거나 누군가의 눈치를 본단 뜻이다.) 그러나 그 갈등을 다루는 법에 미숙한 사회초년생일수록, 갈등 상황에 마주할 때 마음 속 당황이와 불안이가 날뛸 가능성이 높다. 모든 게 내 잘못 같고, 내가 무능력한 것만 같고.
사소한 실수가 전광판에 걸린 것처럼 공개채널에 박제되기라도 하면 그 날은 잠 이루지 못하는 날이 된다. 건강한 조직은 이를 알고 '실수가 안 일어날 수는 없다'며 이해와 관용, 배려와 자비를 베풀고자 노력하지만 (당연히 그 사람이 다음엔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군대식 문화에 익숙한 조직은 '실수를 들키면 끝장, 이 실수의 원인이 내가 되면 아웃'이라는 생각으로 내리갈굼을 시전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차이는 전자는 "내가 그래도 너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할게"라는 뉘앙스지만, 후자는 "내가 왜 너를 이해해야 돼?"라는 뉘앙스란 점이다. 심리적 안전감은 '내가 이해받고 있음을 인지할 때' 일어나는데, 후자에 놓인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마음이 불편한 채로 출근길에 오르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슬프게도, 올해 5년차 회사원인 나는 이해받은 기억보다는 이해받아본 적 없는 기억이 훨씬 많다. '그래서 그랬구나' 대신 '왜 그랬어?'가 주가 되는 일터에서 일을 하다 보면, 확실한 건 회사와 사람에 정이 떨어진단 거다. 그래서 내가 이직을 세 번이나 하고 지금 네 번째 회사에 다니나 보다. 다행히 지금은 "모든 부담은 내가 질게. 그냥 천천히 적응만 잘 해줘."라고 말씀해주시는 팀장님을 만나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출근을 하고 있지만, 그간의 일터들을 돌아보면 어쩜 그리 채찍질만 받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사와 부하는 신뢰는 커녕 서로를 이해하기도 힘들다는 점을, 나는 불행하게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알게된 것 같다. 서로가 "쟤는 왜 저럴까?"라고 생각하면 일이 제대로 굴러갈 리 만무하다. 그래서 소통이 중요한데, 또 밑 사람이 윗 사람에게 소통하자고 들이대기도 쉽지 않다. 이래서 리더십, 리더십 하나보다. 가장 좋은 건 그간의 경험들을 반면교사 삼아 내가 리더십을 가지게 됐을 때 이해를 잘 베푸는 것이겠지만, 생각이야 쉽지 나 역시 어떤 리더가 될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저 '나와 일하게 될 누군가에게, 절대 회사 오기 싫다는 마음은 안 갖게 해야지'란 다짐을 벌써부터 할 뿐이다.
이해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해의 언어가 무엇인지, 이해받는다는 감정이 얼마나 크고 넓은 것인지를 보고 듣고 느껴보지 않고서는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정답'이라는 태도를 버릴 때부터 이해가 존재하게 된다는 점을, 부디 가까운 미래의 내가 잊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