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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뜽삼이 Aug 02. 2023

당연한 일이 아니다.

23.08.01.화요일

오늘은 하루 종일 마음 속에 먹구름이 낀 것과 같은 착잡함과 음울함이 한동안 이어졌다. 실루엣 정도는 알아챘으나 그 실체에 대해선 명확히 캐내기가 어려웠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저녁으로 만든 제육볶음을 근처에 게신 아내의 부모님께 가져다드리러 잠시 나갔다온 다음, 그제서야 아내와 함께 느긋하게 동네를 산책하는데 그 때 이야기를 나눴고 드디어 좀 명료해진 것 같다.

최근, 나에게 새로운 일이 주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새로운 일도 아니다. 4월에 만들었던 교육 영상을 또 만들게 된 것이다! 지난 번처럼 작업량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은 적잖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특히 아내의 목소리를 녹음해야 하는 작업도 포함되어있어 마음의 부담이 느껴졌다. 나는 이 상황에 대해 뭐라 또렷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에 대해 팀장님에게 말을 하고 싶으면서 또 동시에 말하지 않고 싶은, 그런 상태가 오늘 내내 이어졌던 것 같다. 사실 그 시작은 어제였겠으나 점점 작업 내용이 구체화되어갔던 오늘, 그 감정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최근에 내가 느낀 것들을 좀 얘기해보는 게 좋겠다.

나는 지난 4월, 내가 '원해서' 교육 영상 3편을 만든 적이 있었다. 원래는 MVP가 만들기로 예정되어있었으나, 당시 MVP가 작업 일정을 맞추기가 어려워 내가 나서서 제작하게된 것이다. 정말 힘든 시간들이었다. 약 2,3주간 주말을 반납하고, 평일에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작업을 해나가는 그런 강행군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원해서, 내가 선택한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성과도 아주 좋아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나는 또 다시 내가 이 영상을 제작하리라고 전혀 생각지못하고 있었다. 팀장님은 나에게 고객사의 교육 담당자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며,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볼 것으로 권했다. 어제 교육 담당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4월에 작업했던 교육 영상 1편의 내용 중 일부를 수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번에 제작하는 영상을 볼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담고, 불필요한 내용을 제외하는 식의 수정 작업이었다. 그러나 말이 수정이지, 영상의 일부 구간에 대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작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작업을 '수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쩐지.. 매우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을 정확하게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흔히 '수정'이라고 하면 단순히 전체 가운데 일부 내용을 지우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는 작업을 이야기하는데, 이미 다 만들어진 완성본 상태에서 수정을 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 필요하기 때문에 뭔가 느낌이 맞질 않는다.

아무튼, 나는 얼떨결에 해야 할 일을 떠안고 대화를 마치게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하기로 합의가 되어있지도 않은 상황이었는데, '할 일'을 안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교육담당자가 각종 요구사항을 이야기하는 동안 '그런데 이걸 내가 하는 게 맞나요?'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 정리하자면, 나는 단순히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떠맡게된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고 있지 않던 일이 갑작스럽게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다. 나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았고, 이번에 '또' 영상을 제작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영상 제작은 애시당초 MVP들 몫으로 계약한 상황이다. 그런데, 1편 영상을 내가 만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또 내가 그 작업을 하는 것은 불합리한 가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과정에서 배제되었다고 느꼈는데, 이에 대한 당혹스러움, 당황스러움, 불편함 등을 과연 팀장님에게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겼다. 아직까지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 않아 아내에게도 물어보았다.

"만약 내가 팀장님에게 현재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까?"

"반대로 내가 이야기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까? 혹은 무엇을 피하기 위함일까?"

이미 내가 무엇을 원했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아 어떤 느낌을 경험했는지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내가 과거에 영상 제작 작업을 했던 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으며, 나의 성장은 물론 회사를 위해 나름의 희생을 감내했었음을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다. (내가 1편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당시 계약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편을 만들었더라도, 내가 이번에 영상 작업을 맡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원했다.  


    이러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아 나는 당황스럽고, 짜증이 났다.   

그런데 내가 팀장님에게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것은, 사실 점심시간에도 밥 먹으러 나가는 길에 이야기할까?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내가 이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이렇게 일이 진행된 마당에) 뾰족하게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녁에 아내와 대화를 나누며 보다 명확해졌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감정을  팀장님이 알아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팀장님이 과연 그것을 알아줄까 하는 두려움도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괜히 얘기했다가, 혹 떼러갔다가 혹 붙이고 오는 꼴이 되진 않을지. 

그리고 과거에 내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을 당시에는 퇴근 후, 사무실에 나와 팀장님만 남아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환경에선 사실 이런 이야기 꺼내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람들이 들으면... 특시 N님이 들으면 옆에서 또 씨부렁씨부렁... 그런 상황도 원치 않는다. 

그래도 내가 이야기한다면 팀장님은 현재 상황을 인지하는 데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떤 해방감 내지... 시원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오늘 지금과 같이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고 내가 원하는 것 나의 현재 상태 등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교훈을 얻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 사람이 그 일을 '당연하게' 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이야기를 하든 하지 않든 나름의 장단점이 있기에 계속 고민되는 것 같다.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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