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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영 May 10. 2023

파라다이스에서의 삶

Ticket to Paradise







여행했던 곳 중에서 paradise를 꼽는다면 단연 길리섬이다. 천국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몇몇 섬을 떠올려보지만, 딱 그만큼이다. 길리섬은 거기에 더해진 무엇 하나가 더 있었다. 길리섬에서 나는 파라다이스라는 워딩을 써서 글을 쓰곤 했다. 편지를 썼다. 혼자 떠난 여행이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파라다이스였으니까.


길리섬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해 봄에 쵸이가 길리섬에서 만난 영국남자를 한국에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영국남자를 만나야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남자를 만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길리섬의 남자들, 여자들과 친구가 되어 매일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 중 한 명은 실제로 내게 대시를 했는데, 나는 길리섬에 남을 혹은, 함께 할 상상을 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거절했고, 그는 나와 절교를 택했다. 이런 말들이 거창해보이지만, 파라다이스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다. -



<Ticket to Paradise>라는 영화 제목을 보고 난 바로 길리섬을 떠올렸다. 결말은 뻔하겠지만 기분은 좋아질 그런 영화인 것 같아서 어느 날 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넷플릭스를 열었다.


영화는 생각한 그대로 흘러갔다. 20년간 공부만 한 착한 딸은 로스쿨을 앞두고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발리의 작은 섬에서 거짓말처럼 운명의 짝을 만나고, 단 한 달만에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 발리의 작은 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부모님을 초대한다.


부모(줄리아 로버츠와 조지 클루니)는 당연히 반대하는 마음으로 딸을 보러 갔지만, 일단은 트로이의 목마 전술을 펼친다. 겉으로는 결혼을 축복하는 척하지만, 뒤로는 결혼을 망칠 생각 뿐이다.


왜 아닐까. 부모는 딸이 잠깐의 마법에 빠진거라 확신한다.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로 시작하여 ’이 섬에서는 일 년도 못 버틸거야.‘라는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혼자 떠났던 발리/길리 여행






언제부터였을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나를 부러워한다는 말을 종종 듣기도 할만큼 내 마음대로 살며 여행했던 시기가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안정기에 돌입했다. 파라다이스는 파라다이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이성의 자리가 점점 커졌다.


아, 이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철없는 스무살 딸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변호사를 포기해? 한 달만에 결혼을 한다고? 저 작은 섬에서 그냥 산다고? 변호사로서 꼭 돈을 많이 벌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래서 그냥 지금처럼 그렇게 매일 산다고? 아직 보지 못한 더 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다고...! ’ 후…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기분을 남겨두어야겠다 생각했다. 이 찝찝하고 답답하고 지루한 감정은 내가 틀렸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주어진 ‘현재의 행복’을 나의 잣대로 흔들려고 했다는 사실, 이제는 그런 용기가 내게 없다는 이유로 영화 속 주인공을 부정했다는 사실이 나를 잠깐동안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내가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 발리의 작은 길리섬에 들어가 살아볼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년엔 제이와 훌쩍 떠나볼까!?)



길리 트라왕안의 밤






우리는 '박모(薄暮)의 시간' 이라고 하고, 프랑스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 이라고 한다. 시골에서 저녁은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진다. 석양의 빛들이 사물과 풍경을 환하게 물들였는데, 어느새 빛은 증발해버리고 그 빈자리를 푸른 이내가 밀물로 밀려와 채우는 것이다.


...... 푸른 이내는 '침묵과 부동의 시간' 이라고 하고, 프랑스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 이라고 한다. 시골에서 저녁은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진다. 석양의 빛들이 사물과 풍경을 환하게 물들였는데, 어느새 빛은 증발해버리고 그 빈자리를 푸른 이내가 밀물로 밀려와 채우는 것이다.


...... 푸른 이내는 침묵과 부동不動 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빛이다. 그 시각 내 가슴에 사무치는 것들이 여럿 있었다. 덧없이 지나간 인생의 찰나들,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애인들. 이것들이 새파랗게 살아와서 내 가슴을 들쑤시는 것이다.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中, 장석주






엮인 글 : 2019년에 썼던 발리에서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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