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호영 Aug 12. 2023

모든 기분을 상쇄하는 기내식 설렘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1.

비행기가 이륙하려는데, 옆에 앉았던 남성분이 사라졌다. 승무원이 짜증 나듯 영어로, "지금 안전벨트 불 들어온 거 안 보이나요? 얼른 앉으세요. 곧 이륙합니다." 그분은 그러거나 말거나 오버헤드빈에서 짐을 꺼내고 있었다. 승무원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버렸다. 아무래도 한국을 조금 싫어하는 것 같다. 그 남성분은 그저 영어를 잘 이해 못 한 것 뿐일 수도 있다. 어떤 여성분에게도 짜증 내듯, seat! seat! seat! 을 정확히 세 번 외쳤다. 의자 똑바로 올리란 뜻이었는데, 그걸 잘 알아듣지 못하셨기에 지시에 따르지 못한 것뿐이다. 영어로 소리치며 마음껏 불친절할 권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2.

옆자리 남성분이 껌을 무지막지하게 씹고 있다. 껌 씹는 소리, 그 소음을 기체 안 바로 옆자리에서 듣고 있자니 괴롭다. 게다가 나는 청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아서 저 멀리 귓속말도 잘 들리는 사람인데. 너무 괴로워서 한 마디 할까? 하고 고민에 돌입. 그런데 뭐라고 하지? ”저기요… 껌을 좀 살살 씹어주실 수 있을까요? “, ”저기요… 껌 씹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요. “ 아마도 이분은 누군가로부터 껌 씹는 행위 그러니까, 큰 소리(소음)를 내는 것에 대한 제재를 받아본 적이 없을 것 같다.




3.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약 14시간의 이코노미석 비행은 아기나 부모나 힘들 거란 생각을 한다. 방금 어느 외국인 아빠가 아기를 안고 복도를 지나다니며 아기를 달래는 걸 봤다. 쪽쪽이를 문 아기는 금방 잠에 빠져 들것처럼 잠잠해졌고, 연신 하품을 하는 아빠는 48시간 깨어있던 사람처럼 피곤해 보였지만, 둘이 합쳐진 모습만큼은 아름다웠다.




4.

기내식을 먹을 때, 음료수를 꼭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보통 맥주나 와인에 더해 물이나 주스를 함께 받곤 하는데, 이번 비행에는 앞주머니에 기본적으로 300ml 물병이 꽂혀있었다. 그래서 와인만 주문했고, 제이는 맥주와 제로코크를 주문했는데(정확히 말하면 내가 마시고 싶은 걸 또 주문한 셈), 전부 다 합치니 양이 많았다. 미니 와인병, 맥주 한 캔, 콜라 한 캔을 다 마실 수 있을 리 만무하지. 게다가 이미 인천공항 라운지에서 맥주 두 잔을 마시고 왔다. 와인병은 열어서 맛만 보았고, 어차피 경유를 해야 하니 남은 와인을 가져갈 수도 없는데, 내 욕심 때문에 낭비를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기내식은 그런 식이다. 어차피 남길 때가 많은데, 그래도 일단 받고 보는 것. 기내식을 받아보는 그 자체에서 느끼는 순수한 행복. 죄책감을 상쇄시키는 설렘. 여행의 시작이다.






• 비행기에서 메모장에 끄적여 본 기록_


매거진의 이전글 파라다이스에서의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