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리에 살으리랏다
2017년 7월 6일 목요일
날씨 흐리고 습도 높음
제주에 온 지 벌써 4일이나 지났다.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아직 뭐하나 채우지도, 비우지도 못했는데 마음의 고향 대평리까지 걸어서 가겠다는 다짐을 오늘 비워야겠다. 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버스를 탄다. 8코스를 정주행해서 대평리까지가 오늘의 걸음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다. 물론 내 알람은 아니다. 게스트하우스 규칙으로 입실시 스마트폰을 반납시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다음에 게스트하우스를 열게 된다면 꼭 해봐야지. 게스트는 스마트폰의 노예에서 잠시나마 벗어 날 수 있어서 좋고, 아침에 남의 알람 소리를 들으며 깰 필요도 없다. 사진은 내가 직접 찍어주면 될 것이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은 공용 태블릿을 마련해 놓으면 해결될 일. 다시 생각해봐도 참 괜찮은 아이디어 같다.
자의 반 타의 반 여덟시 조금 넘은 시간에 숙소를 나선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한 오늘의 선택은 둘째 날 등산을 패스한 이후로 두 번째 훌륭한 선택이다. 마침 702를 타면 목적지까지 한 번에 간다. 배차간격이 헬인 제주 버스시스템이지만 운 좋게 10분도 안 돼서 원하는 버스가 온다. 자리도 맨 앞자리에 에어컨도 빵빵하다. 다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게 한 가지 있으니 바로 기사 삼춘의 운전 실력이다. 제주의 모든 버스를 타보진 못했지만, 대부분의 버스 기사님들이 난폭운전을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배차시간이 정확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
8코스의 시작점부터 걸으면 좋겠지만, 8코스도 거진 20km 가까이 되는지라 무리하고 싶지 않아 중문우체국쯤에서 8코스로 합류했다. 날이 흐려 햇살이 뜨겁진 않지만, 습도가 정말 대박 높다. 땀이 주르륵 흐른다. 체감 기온은 낮지만 4일 중 가장 힘든 걷기가 될 것 같다.
제주에 와서 그 좋아하는 해산물을 아직 한 번도 먹지 못했다. (해물라면 제외) 오늘은 꼭 먹으리라 다짐하던 찰나 걷기 얼마 되지 않아 해녀 할망이 바구니에 해산물을 넣어 팔고 있다. 배도 안 고프고 아직 갈길이 멀어 해삼의 유혹을 떨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중문관광단지를 관통하는 올레 8코스는 몇몇 호텔 산책로를 부득이하게 지나게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배낭을 메고 화려하고 잘 가꾸어진 호텔을 지나다 보니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사람의 상황이 참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불가 한 달 전엔 나도 저기서 여유롭게 수영을 즐겼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제주도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불쌍한 행색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1급 호텔 스윗룸 투숙객 못지않다.
올레길을 걸으며 꺼려지는 몇 가지 상황 중 하나가 관광객이 많은 관광지와 차가 많은 차도를 지날때이다. 빨리 벗어나고 싶어 발걸음을 서두른다. 목적지인 대평리까지 버스를 타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지친 걸음을 아무리 재촉해도 속도가 나지 않는다. 마땅히 쉴 곳도 없고, 하늘은 꾸물꾸물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을 걸으며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큰소리로 따라 부른다.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이름 모를 생태공원에 들어선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생태공원길은 상당히 길다. 사람도 없고 상큼한 공기와 새소리가 힘이 되지만 딱 뱀 나오기 좋은 날씨와 장소라 긴장감을 놓칠 수 없다. 뜻하지 않던 생태공원길은 꽤 괜찮은 길이다. (뱀만 나오지 않는다면)
얼마 정도 걸었을까 동네 주민으로 추정되는 50~60대 아저씨가 산책을 하고 계신다. 아저씨를 지나쳐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누런개 한 마리가 나타난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다양한 견종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시골 마을에는 덩치도 크고 사나운 개들이 많다. 개를 좋아하는 나 같은 성인 남성도 움찔할 때가 많은데, 생각보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목줄이 없는 사나운개에게 외딴길에서 물리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목숨이 위험할수도 있겠다.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걸을때에는 올레꾼 스스로도 충분히 조심해야 될 것 같다. 아무튼, 직감상 저 누런개는 충분히 사람을 물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늦추고 아저씨에게 당신개냐고 물어보니 아니라고 하신다. 이 동네에는 주인없는 들개가 많다며 쿨하게 대답하시지만 아저씨의 발걸음에도 두려움과 긴장감이 한껏 실려있다. 쿨하지만 두려운 아저씨를 앞세워(?) 무사히 누런개를 지나친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개님이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나보다.
이름모를 생태공원은 천연기념물의 산지이다. 반딪불이부터 야생화, 온갖 식물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멸종위기 식물들의 설명이 꾸준하게 보여진다. 길을따라 옆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소리도 지친 발걸음에 작은 빛이되어준다.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되나 싶은 찰나 혹시나 혹시나 했던 뱀님이 나타나셨다. 햐. 나는 태생적으로 뱀을 무서워한다. 하물며 산길에서 만나는 뱀이라니... 나도 모르게 비명을 외치니 쿨하지만 두려운 아저씨가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신다. 자초지종을 들으시고는 역시 쿨하게 '그깟 뱀따위ㅋ'라며 지나치신다. 아저씨의 발걸음이 부쩍 빨라지셨다.
생태공원의 끝은 바다로 이어진다. 한 시간 넘은 숲길을 지나니 바다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논짓물'이라는 이름의 작은 바다마을을 보니 대평리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쿨하지만 두려운 아저씨는 아마도 이 동네에 사시는 것 같다. 누런개, 뱀과의 사투로 체력은 이미 바닥, 배도 몹시 고프지만 마땅히 끼니를 떼울만한 곳이 없다. 작은 횟집과 편의점이 하나 있었지만,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힘들지만 점심은 대평리에서 먹어야겠다.
논짓물에서 대평리까지는 고난의 연속이다. 바닥난 체력, 배고픔, 제주에 와서 처음 느끼는 외로움, 더움, 습함,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힘듦을 온몸으로 느끼며 걷는다. 심지어 오르막길도 많다. 중간쯤 전망 좋은 곳에 카페가 하나 있었지만, 그냥 지나친다. 숱하게 노력중이지만, 아직도 '여유'를 마음에 품기엔 많이 부족한 것 같다.그렇게 이성의 끈을 놓칠 찰나, 대평리의 상징인 '박수기정'이 멀찍이 보인다. 내 마음속의 고향 '대평리' 가슴 깊은 곳에서 알지못할 무언가가 조금씩 올라온다.
8코스 종점, 9코스 시작점인 대평포구에 예전에 해물라면을 먹었던 해녀의 집이 없어지고 꽤 그럴듯한 식당이 하나 생겼다. 마침 먹고 싶었던 한치물회도 있다. 기대했던 맛은 아니지만 만족한 한끼를 마치고, 대평리 최고의 힐링플레이스 카페 '쓰담쓰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바다가 보이는 바위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비우고, 게스트하우스 체크인 시간을 기다린다.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제주에 와서 실패의 연속인 게스트하우스지만 오늘의 숙소인 '티벳풍경'은 실패할래야 할 수 없는 숙소기에 기대도 크다. 티벳풍경은 나에게 단순히 하루를 묵어가는 게스트하우스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일 년 전 홀로 처음 제주를 찾았을 때 아무런 계획도 목적도 없이 들렸던 곳. 그 날 이후, 제주는 내 인생에 새로운 장소가 되었다.
내심 오늘 저녁은 혼자 먹기 싫었는데, 나 포함 무려 여섯명의 일행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당연히 모두 남자.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티벳풍경이라는 공간은 낯선 이들의 어색함을 단숨에 사라지게 만들어 준다.
나는 제주에 오게되면 꼭 티벳풍경을 찾는다.
아니, 티벳풍경을 찾기위에 제주에 온다.
나뿐만 아닌 티벳풍경을 찾는 모두의 마음이 나와 같을 것이다라고 감히 얘기해본다.
오늘 저녁은 맘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