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작은 창문으로 봄내음이 흘러 들길래 봄이 왔구나, 싶었다. 그 날 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진하게 스며드는 봄내음에 정말로 봄이 오고 있구나, 싶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안내문자를 받고 급히 옷을 사러 나갔다.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취업지원제도를 신청하던 도중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신청한 인턴 지원에 통과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고민은 많았다. 어차피 서류보조나 하고 복사 심부름을 하면서 시간을 떼울 텐데, 그 시간에 다른 기업의 문이라도 두드려 보는 게 나은 것은 아닐까.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동시에 지극히 패배자다운 고민.
그러다 그냥 문득 이 고민을 하고 있을 시간에 예상 질문 하나라도 더 뽑는게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면접 한 번 본 적 없으면서 지레 겁먹고 물러나려는 꼴이 스스로가 보기에도 한심해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절박한 사람이 누군데.
지극히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자아성찰의 시간이 이어졌다.
문자를 곱씹으며 고민을 두, 세 시간하고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옷걸이에 걸린 색이 바랜 어벙한 후드티와 보풀이 다 일어나 헤진 니트가 전부인 옷장에서 공기업 면접을 위한 복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먼저 취업한 동생에게 십만원을 더해 갚을 것을 약속하고 돈을 빌려 다짜고짜 백화점으로 향했다.
여태 내 마음 돌보는 것에 벅차서
그리고 또 살아가기에만 급해서
애써 외면했던 준비를 위한 첫걸음을 떼어보려고 들어간 반지르르한 옷가게는 역시나 눈이 휘둥그래지는 가격의 연장이었고, 나는 역시나 또 한심하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뒷걸음쳐 가게를 나왔다.
실은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살 수 있었던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는 못난 생각과 함께 도망친 것이었다.
사무보조 인턴이 이런 비싼 정장을 입고 간다고 한들, 정직원채용도 아닌 그저 그런 면접에 이만한 돈을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어리숙한 생각.
적당한 가격의 자켓 하나와 세일하는 구두 한 켤레를 사서 돌아오는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축축 늘어질만큼 고됐던 것 같다.
배우지 못해서 생긴 무지에 대한 깨달음은 다음날 면접장소에서 강렬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번쩍번쩍거리는 높은 정문을 지나 소심하게 몸을 웅크리고 들어간 대기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들로 가득이었고, 그들 모두 한껏 긴장된 얼굴로 딱봐도 값이 나가보이는 멋스러운 정장과 깔끔한 넥타이, 블라우스, 구두를 갖추고 있었다.
혹시나 정말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캐쥬얼한 갈색 자켓을 입었다면
아마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과 그리고
그저 부끄러웠다.
내가 입은 ‘정장 흉내’ 를 위한 옷들의 가격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말로만 취직, 취직 거렸던 스스로의 한심함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면접을 위한 정장 한 벌 갖추지 않았으면서, 그마저도 그 필요에 대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제대로 된 명확한 목표 하나 설정하지 못했으면서
이제껏 가장 절박한 것은 나라고 여기며 흘려보낸
아까운 시간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사무보조 인턴은 정직원의 채용 때와 다름없는 인성질문이 주를 이뤘다.
혹시나 하고 준비해보았던 면접질문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말더듬이가 되어 눈알만 꿈뻑 굴려대다가 오는 길에 맥주 한 궤짝을 사왔을 거다.
늘 그렇듯, 공백기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별 대단한 경험도, 별 특별한 시험을 준비했던 것도 아니었던 내 공백기는 그저 살기에 급급했던 지독한 현실이었을 뿐이나
그때만큼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만한 대답을 해야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없는 경험을 지어서 말할 수도 없어서 내가 선택한 것은 정면돌파였다.
내 공백기는 무언가를 해볼 용기도 감히 꿈꿀 수 없었던 퍽퍽한 현실이었고 그럼에도 살아보고자 택한 것은 흐르는 시간을 아쉬움과 묻어두고 당장의 앞길이었노라고.
그렇게 간신히 도달한 곳에서 이젠 적어도 얼마동안의 현실 걱정 따위 없이 하고픈 일, 배우고팠던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래서 나에겐 남들에게 다 있는 대단한 스펙은 하나도 없지만 스스로에게 떳떳하다고 말이다.
달달 외워서 더듬거리며 내뱉은 다른 질문의 답보다
오로지 딱 하나 당당히 내뱉은 꾸밈없는 답을 들은 면접관은 그 날 가장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뛰는 것만 같은 욱신대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와 도시락 하나를 까먹었다.
질겅이며 음식을 씹어대고 곱씹는 하루에는
늦은 줄만 알았던 내 나이가 면접장소에 가득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
내 절박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더 절박한 사람도 있었고, 각자가 지닌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고스펙을 가진 사람이나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나 떨리긴 매한가지였고 바삭거리는 입술을 애써 훑으며 목구멍을 열어 내뱉은 모든 말에 각자의 시간이 녹아있다.
나는 그저 말로만 떠들었던 어줍잖은 한 인간임을 뉘우친 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묵묵히 오늘 할 일을 하고 짬을 내 책을 읽고 잘 먹고 잘 자는 것이었다.
채용인원보다 두 배 가까이 몰렸던
나름대로 빡셌던 면접에서
나는 끝내 합격 소식을 받았다.
봄내음이 첫걸음을 떼며 다가오는 이 날
나 또한 부끄러움을 알고 배우며 다짐하며 살아가야지.
그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니.
아 기뻐하라 그대는 그 밤에 혼자 있는 게 아니고
별빛 속에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그대에게로 오고 있는 것이다
- 옛 샘 ‘ 한스 카롯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