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밤이 오면 이 세계는 비록 시야에서 사라져 가지만 결코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나 동물도 죽음에 의해 소멸된 것 같지만 그 참된 본질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존속한다. - 쇼펜하우어 -
인간의 삶에서 전반부는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차 있지만, 후반부는 죽음이란 두려움으로 사로잡혀 있다. 즉, 인간은 누구나 생애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행복은 오직 망상의 산물에 불과하며, 두려움과 괴로움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신기루같은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 고통이 없기를 바라며, 조금이라도 예기치 않는 고난을 피할 수 있는 입장에 서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 유파 중 ‘견유학파’는 간소한 생활과 자연에 가까운 삶을 추구하며, 문명사회의 관습과 제도를 무시하고 걸식생활을 실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는 한 벌의 옷과 지팡이, 자루를 메고 통 속에서 살며 알렉산드로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 서라”고 말한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런 견유학파가 향락을 철저히 배척한 이유는 향락에는 다소나마 고통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간의 고통이 따르는 향락보다는 향락이 없는 대신 고통도 없는 삶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통을 없애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그들은 삶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지만, 그들의 삶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최근에 옛 직장 동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변덕스런 성격과 예민하고 괴팍스런 조직생활로 동료들과 다툼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던 친구다. 일적인 측면에서는 나하고는 찰떡 호흡을 과시하며 잘 지내기도 했지만, 그의 고질적인 변덕스러움에 서로 간에 상처만 입고 헤어진 지 수 년이 지난 후였다. 노쇠한 어머니를 간호하다가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가 되어, 슬프고 망망한 마음에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부모 밑에 외독자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냈는데, 미우나 고우나 마지막 핏줄인 어머니와 헤어져야 하는 입장이니 항망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을 것이다. 오랜 치매로 평상시에도 수시로 어머니와 전화하고, 고통스러워 했음을 기억해 본다. 그가 직장생활 내내 예민하고, 괴팍스럽게 굴었던 이유가 어머니와의 잦은 불협화음이 하나의 원인이었음도 그의 고백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그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아픔이 있지만, 부모와의 이별은 가족이라는 인생의 마지막 등불이 꺼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어머니와의 좋았던 추억, 수없이 반복됐던 갈등,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대화의 여운들뿐이다.
그는 오랫동안 고독을 견디며, 직장과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살아왔지만, 이젠 그 갑옷마저 벗어야 할 때가 왔다. 타인에게는 예민하고 경계심이 많은 모습으로 비춰졌지만, 내면에는 애틋한 마음과 삶에 대한 슬픈 집착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은, 어쩌면 누구보다 속 깊은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옛 동료에게 마지막 의지와 위로를 찾고 싶었던 욕구였으리라.
인간의 삶에서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이자, 모든 관계와 감정이 정리되는 시작이기도 하다. 노쇠한 부모와의 이별이 가져온 슬픔 속에서, 그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과거의 잘못과 아픔을 되돌아보려 한다. 삶이든 죽음이든, 불안과 공포, 애틋함과 허무함은 모두가 경험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과거의 상처보다 서로의 존재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나는 차분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조심스레 위로를 전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의 끝자락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잠시나마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작은 구원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에게 죽음은 필연이고,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과정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전투이자 고난이고, 절망이다. 어쩌면 인생 후반기에는 행복을 얻기위해 고난과 괴로움을 받아들이기 보다, 행복을 포기해서라도 고난과 괴로움을 덜 받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인생은 불행해지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위선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네, 저는 끊임없이 저에게 얼버무리고 있어요. 그래야만 죽음을 삶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죽음에 대해 끝까지 파고들어 알아내려 하지 않아요.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는 일종의 어림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장켈레비치 / 죽음에 대하여 -
나이가 든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나이 듦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쇠퇴 때문이라기보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가장 큰 수수께기가 다가오는 시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프랑스의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일부러 죽음이 무엇인지 결론지으려 하지 말고 얼버무리며 넘기는 편이 좋다고 했다.
죽음이란 모순이며 부재이고 수수께끼이다. 이렇게 살아있는데 죽어야 하고 존재도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왜 일어나야만 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죽음이다. 그렇기에 살아 있는 인간에게 죽음은 어디까지나 삶을 위한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답 없는 수수께끼에 말려들면 자신을 괴롭히게 될 뿐이다. 그것은 삶에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얼버무려야 하며, 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써의 어림셈이라는 뜻이다. 죽음을 대강 수용해 두는 것, 딱 떨어지는 결론을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명쾌하게 결론지을 대상이 아니라 회피의 대상이다. 모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에게만은 그런 일이 이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가. 장켈레비치는 그것을 ‘타인에게 죽음을 미루는’ 행위라고 말했다. 죽음을 남의 일로 전가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죽음과 진지하게 마주할 일은 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죽음이 뻗쳐 올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독한 고통 탓에 죽음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경우이다.
'아직 죽지 않은 한, 사람은 살아 있다. 마지막 1초까지 그러하다’
그에 비해 죽음이 아직 다가오지 않은 평범한 날들을 보낼 때는 마치 자신과 죽음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행동하고 얼버무리며 넘어간다. 이것이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다.
문제는 죽음을 회피하는 대신 남은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나에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응원과 부러움을 표현해 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용기있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심의 발로이다. 다소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되는 개척자 정신으로 살고 싶지 않은, 좀 덜 벌어도 적당히 욕먹는 월급쟁이의 삶을 이어가고 싶어한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믿었던 동업자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예기치 못한 고충이 다가올 때는, 너무나 뻔하고 심심하지만 예상이 되는 그럭저럭한 삶이 오히려 부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 생각을 달리하는 중이다. 뭔가를 얻기보다는 뭔가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건강해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병에 걸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또한 즐겁게 놀기보다는 욕을 먹거나 비난받지 않도록 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 말이다.
내가 평소에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삶에 지혜가 필요할 때, 삶이 나에게 시련을 주고, 어려움과 고통을 집단적으로 융단 폭격할 때 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중용의 미덕’이다. 10년 전 용문사로 ‘템플스테이’를 갔을 때 스님이 가장 강조해 주신 말이기도 하다.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고, 크게 실망하지도 않고, 크게 기대하지도 마라. 크게 실패해도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크게 성공해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게, 사실 크게 휘둘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