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이런 선언이 멋쩍은 일이 되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 '위대한 일을 하겠다'라는 꿈은 어린아이들의 것이 된 듯한 느낌이다. 어쩌면 세상엔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국은 여러모로 정신승리의 문제이고,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다 해도 결국은 아침마다 욕하면서 일어나게 되는 거라고, 사회를 겪으며 그런 식으로 냉소적으로 변한 탓일까. 먹고살기가 바빠서, 그저 꿈이 주식으로 돈 좀 번다던가, 부동산을 좀 가진다던가 그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내 나이답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만, 이게 왜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위대함, 멋진, 훌륭함 등의 단어에 열광한다. 나는 초등학생처럼 거창하게 꿈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럴 때, 주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큰 희열을 느끼고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주변 사람들이 이에 지쳤을지 어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 삶에서 나에게 주어진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어찌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명이라거나 운명이라거나 팔자라거나 무엇이든 좋다. '훌륭함'이 주어진 어떤 의도를 찾아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훌륭함은 내 강의에서 궁극적으로 전달하고픈 오래된 주제이기도,
아이가 둘씩이나 되었는데, 새벽 다섯 시에 나와 컴퓨터 앞에 지금 앉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은 하루들이 모여 결국 훌륭한 사고를 칠 거라고 믿는다. 이런 거창한 믿음은 사소한 것들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새벽 기상의 어려움 같은 작은 장애물들 말이다.
나의 남편 역시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본인은 스스로 믿고 있겠지만, 와이프로서 가장 가까이 지켜보니 어딘가 낭만적인 사람이고, 이런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일 아침 이 새벽에 공부하라고 어린아이 둘을 보고 있으니.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데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엄마가 되었다는 게 이따금 어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위대한 한 팀을 이뤄 나름 헤쳐나가고 있다는 것이 실질적인 응원과 힘이 되어준다.
이 글을 보는 모든 이의 소중한 하루가 훌륭함으로 나아가는 작은 불씨가 되길. 자, 이제 이 새벽을 아깝지 않게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