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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스포츠 경기 중계를 한 이야기

국내파 고군분투기

by 미학자P Jan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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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동계청소년 올림픽이 끝난 지 어느새 1년이다.

너무 정신없어 잊고 지냈는데, 종종 1년 전 사진이라고 뜨는 알람 덕에 시간이 이리 흐른 것을 알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국내파로서 영어 방송 어떻게 준비했는지 간략히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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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청소년 올림픽에서 영어로, 설상 종목 스포츠 경기 중계를 하게 되었다.


 이건 나에게 굉장히 큰 전환점이 된 지점이다.

지역 KBS 아나운서 시절을 지나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 그 언어로 방송을 하는 경지에 왔다는 것.

눈물로 지새운 많은 날들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맡은 종목은 설상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바이애슬론이었다. 긴 호흡을 가지고 경기 내내 말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에서 비인기라 불리는, 다소 생소한 종목을 원해서 1지망으로 썼고 합격했다.


제일 큰 성인 올림픽에서 영어 아나운서는 나 같은 외국인을 쓰지 않는다.

해당 종목 전문 SPP 외국 캐스터들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내게 주어진 이 기회를 소중하게 준비하고 싶었다.




비원어민의 영어 SPP 중계 준비 과정을 짧게 요약하자면,

1. 종목 공부

2. 영어로 된 해설 경기 딕테이션 후 모든 시나리오 정리(사고, 경기 중 발생하는 모든 이벤트)

3. 나만의 시나리오 대본집 만들기(오프닝부터 클로징까지 기본 경기 시나리오, 선수 소개 및 유망주 정보, 경기 중간 시간 끌기, 종목 역사, 올림픽 기록 및 유명 선수 등등 배경 지식 멘트, 시상식, 시상식 지연 상황, 각종 사고 발생 대처 멘트 등)

4. 원어민 방송인에게 방송용 스피치 집중 과외

5. 그러나 가장 많이 배우고 다시 준비해야 했던 것은 역시 현장(올림픽 기간 내내)




몇 달간 종목 공부를 하고,

여러 올림픽에서 남아 있는 자료 중에 영어로 된 경기 해설 딕테이션을 통해 대본을 만들었다.

자료가 많을 것 같지만 정말 없었다.

왜냐? 경기 시간이 너무 길어서 하이라이트 영상만 존재하는 경우가 대다수.

그것마저 북유럽 인기 종목이라 영어 해설 경기는 정말 소수였다.

나에게도 생소한 종목이고, 나는 해외 유학파도 아니기 때문에 실제 중계에서 하는 표현을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해 그야말로 뼈를 깎는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대학원과 아이 둘 육아도 병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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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경기전 만든 내 자료집. 오른쪽, 경기중 실시간 쏟아지는 자료

그렇게 해서 나만의 대본집을 만들었다.

상황별 영어 멘트를 모두 작성했다.

책 여러 권 분량이 나왔다.

상황이라 함은, 그간 경기 진행 중 나왔던 다양한 사고를 토대로 일어날 수 있는 사고 대처 멘트부터, 시상식 시간 끌기, 선수 소개 시 유용한 표현과 설상의 마라톤인 만큼 역대 올림픽 속 이 종목의 기록 등등을 토대로 한 시간 끌기 멘트들.

경기가 접전 일 때, 피니쉬라인에 동시에 선수들이 들어온 상황 가정처럼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준비했다.


한국어였다면 물론 경기 배경 지식 공부에 집중적으로 할애해 더 좋았겠지만,

영어였기 때문에 오바육바쌈바를 해가며 안내 멘트 하나하나를 준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를 토대로 원어민 방송인 선생님께 영어방송 과외를 받았다.

스포츠 경험이 있는 분으로, 현장성을 살린 경기 중계 발음에 신경을 썼다.

참고로 나는 대학과 아카데미에서 스피치 과목을 가르친 경력이 꽤 되며, 여전히 출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스피치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었고 망설임 없이 좋은 선생님을 찾고자 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화할 때 발음이 좋다고 느끼는 것과 방송할 때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아무래도 다르다. 그래서 굳이 어렵게 영어 방송인까지 찾았던 것이다.

 해당 청소년 올림픽 영어 중계는 큰돈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건 내 일생일대의 도전이었기 때문에 일단 돈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IOC 직원분께 칭찬과 함께 받은 뱃지IOC 직원분께 칭찬과 함께 받은 뱃지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10년을 지내왔지만,

영어 아나운서로서는 첫 데뷔이니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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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선수들과!


물론 현장에 가서 더 새로운 표현도 알게 되고,

준비한 것을 활용하기도, 못 활용하기도 하고 다양한 배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즐겁고 감사한 우리 팀들을 만나 정말 재미있게 시간 보낸 것 같다. 팀분들의 초상권이 걱정되어 단체 사진은 생략.


이렇게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 일을 무척 즐겁게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대표단에게 받은 뱃지우크라이나 대표단에게 받은 뱃지



대학원도 끝난 지금, 무엇을 할 것이냐 묻는 분들이 많은데

열정의 폭주기관차 같았던 지난 10년이 이제 마무리되는 시점 같다.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하던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고,

우선 이번 겨울은 가족들과 푹 잘 쉬는 게 우선이다. 그간 엄마로서 아내로서 부족했던 시간들을 꽉 채워나갈 것이다.


마음은 전전긍긍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많은 경험을 쌓아온 젊은 시절의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새해도 잘 부탁한다 내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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