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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

by 루비

삶을 살다 보면 무수한 사람들을 마주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떠올리며 인연의 아쉬움을 생각하며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내가 한때 인연과 관련해서 좋아했던 사자성어가 ‘회자정리(會者定離)’였다.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단출한 인간관계를 좋아하는 나에게 딱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신기한 일을 겪었다. 이런 게 진짜 인연이고 운명인 걸까라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 사건이다. 스물아홉 살 여름, 나는 내 인생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인생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길을 걷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소리 내어 울었다. 직장은 휴직하고 오랜 시간 집 안에 틀어박혀 폐인처럼 살았다. 그 후로도 몇 년간을 슬럼프와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댔다. 그때 서울의 한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젊은 레지던트 선생님을 만났다. 병원을 다녀본 적이 거의 없는 나는 처음으로 가까이서 젊은 의사 선생님을 만난 게 정말 신기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빅 5 병원 중 한 곳이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불친절하고 의심이 많은 것 같아서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그때 의사 선생님을 기억 속에서 거의 다 잊었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어떡하다 보니 다시 진료를 보게 되어 만났을 때 먼저 아는 체해주시고 친절히 대해주셔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트라우마에서 많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정신과치료를 받고 있다. 그리하여 몇 년 전부터는 서울의 한 정신과의원을 다니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잠깐 가지 않은 한 달을 빼면 거의 매주 또는 격주로 가고 있다. 참으로 친절하고 유능하신 분이다. 그런데 우연히 이 의사 선생님이 내가 스물아홉 때 만난 레지던트 선생님하고 아는 사이란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내가 이 병원에 예약이 꽉 차서 잠시 다른 병원을 갔는데 거기서 만난 선생님도 그때 레지던트선생님하고 대학 동기면서 대학병원 동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그 대학병원 다닐 때 한 의사 선생님이 기억에 강렬히 남아있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그 선생님이었다. 처음엔 못 알아봤지만... (정말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 신기하고 세상이 이렇게 좁을 수가 있구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의사 선생님들이 더 친근감이 가고 신뢰가 더 깊어졌다. 그리고 내가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됐다.


어떤 작가님들은 의료계 파업과 관련해서 의사집단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는데, 내가 만난 의사 선생님들은 대부분 친절하시고 진실로 환자를 위하는 분이셨다. 어마어마한 의대 공부량과 수련 과정을 거치며 존경받는 의사 선생님이 되기까지 시간을 쪼개 애쓰시는 모습이 진짜 존경스럽다. 그런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도 내 일터에서 내 전문성을 키우고 존경받는 직업인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위에서 나는 회자정리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한다고 적었지만 마음이 슬퍼졌다. 언젠가는 진료가 끝나고 의사와 환자라는 관계가 종료되고 이별의 순간이 올 테니깐 말이다.(이미 두 분은 오래전에 진료가 종료됐다.) 그렇지만, 내게 보여줬던 진실한 마음과 정성스러운 치료과정은 영원히 마음속에 남아 나 또한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마음의 행위를 통해 보답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인간관계의 선순환이 아닐까?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나는 이렇게 사람으로 치유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더 많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감사히 여기며 매 순간 진실한 태도로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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