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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의 조용한 대화 - 조금씩 한 걸음씩

by 루비

“기분은 어떠셨어요?”

“그냥 괜찮았어요.”

“여행은 어땠어요?”

“아주 좋았어요.”


정신과의사선생님과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나는 진료실에 들어가면, 조금 긴장이 된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조용히 있고 싶다. 그러다가 의사선생님이 질문을 해주시면 말의 포문이 열린다.


진료실은 아늑하고 좋다. 나는 의사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는 게 쑥스럽다. 그래서 거의 항상 의사 선생님 너머의 책이 꽂혀있는 곳을 바라보곤 한다. 거기에는 여러 정신건강의학과 관련된 책들과 의사선생님의 수료증 같은 게 놓여있다. 전문적인 느낌을 준다.

의사선생님은 대화 도중에 항상 키보드로 대화 내용을 기록하신다. 어떤 부분은 적고 어떤 부분은 그냥 지나치신다. 그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다. 할 말에 집중하다보면 신경을 쓸 여력도 없다. 맨 처음 낮 병동에 갔을 때 의사선생님은 내가 동안이란 것도 상세히 적으셔서 신기했었다. 내가 정말 동안인가보다 싶어 뿌듯했다.


정신과의사 선생님들은 약물 치료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하지만 난 솔직히 약이 싫다. 약은 뇌의 신경물질을 조절해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거부감이 심하다. 상담 치료만 받고 싶다. 그리고 솔직히 상담 시간도 충분하진 않다. 하지만, 내가 다니는 병원은 다른 병원에 비해서 상담 시간이 길어서 좋다. 그마저도 더 길었으면 좋겠지만. 어떤 병원 의사선생님은 정말 딱 약만 처방하고 상담은 거의 안 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무슨 대화를 할지 망설여질 때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지 하고 메모를 하고 가도 막상 진료실에서는 말이 안 나올 때가 많다. 꼭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온 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좀 답답하고 슬플 때가 있다. 이건 내 성격 문제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럴 땐 글을 쓰거나 편지를 쓰는 게 도움이 된다. 쑥스러웠던 이야기도 편지를 쓰면 술술 써진다. 가끔 의사선생님이 나에게 키다리 아저씨처럼 느껴진다. 주디가 키다리아저씨에게 매번 편지를 보냈듯이 나도 의사선생님한테 편지로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피곤하실 테니깐 아주 가끔만.


원래 의사선생님들은 사생활 이야기를 안 한다고 하는데 나는 아주 조금은 안다. 진료가 오래되어서 이야기해주시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조합하면 의사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은 그려진다. 그러한 점들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마치 어두운 그림에 조명이 한 부분만 비치다 조금씩 넓게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가끔 내가 학생이 된 기분이다. 우리반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고 따르듯이 나도 의사선생님을 따르는 학생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다른 점은 순수한 어린이들과 달리 나는 어리지 않다는 점이다. 의사선생님께 희노애락 애오욕의 모든 감정이 다 드는 것 같다. 이야기하고 싶지만 너무 쑥스러워서 말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너무 혼란스럽고 힘들다. 어떨 땐 의사선생님이 너무 좋다가도 어떨 땐 미운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여러 정신과의사와 관련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탐구해나가고 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 치료란 무엇인지? 나는 언제까지 치료를 받아야하는지?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지... 지금은 의사선생님과 계속 그 작업을 해 나가야할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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