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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떡 May 02. 2024

밤의 피구

단편소설, 엽편소설 | 성탄절은 끝났고 우리는 살아 있다

우리는 나무에 조악한 미니 전구를 단 주택 단지를 가로질러 학교로 향했다. 도서관 바깥은 한산했고 새해를 앞둔 겨울 저녁은 선선했다.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교문 앞을 서성이다가 담을 넘기로 했다. 교문 옆에 미니 전구를 단 나무를 한 걸음씩 타고 올라가는데 도현이 문득 자기는 성탄절이 지나고도 나무에 달려 있는 전구들이 싫다고 말했다. “나도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손을 놓자 가지에 달린 미니 전구들이 한껏 흔들렸다.


도현과 함께 파헤쳐진 운동장을 걸었다. 우리는 이 학교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쳤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동급생이 5명이었는데, 6학년에 올라갈 무렵부터 나머지 3명이 우리를 싫어했다. 그애들은 다 벌써 죽었다. 한 명은 금을 밟았고 다른 두 명은 공에 맞았지. 그런 식으로 아웃 점수를 모두 채워 세포원으로 끌려나갔다. 금을 밟은 애가 세포원이 되어 끌려나가는 모습은 오랫동안 우리의 대화거리가 되었는데, 피구를 아무리 잘해도 정신을 못 차리면 금은 밟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애는 아웃이라는 말을 듣고도 자기인 줄을 몰라 경기가 중단된 후에도 우두망찰했다. 그러다 뒤늦게 금을 밟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울었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기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금을 밟지 마라, 금을 밟지 마. 우리는 매번 피구에 나설 때마다 서로에게 당부했다. 기도를 들어줄 신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운동장 뒤편 작은 보도블록 위에 벌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열 명 남짓은 되어 보였다. 우리는 다른 팀이 되기 위해 무리 앞에서 갈라졌다. 아웃 점수를 채워 세포원이 되지 않더라도 패배 팀이 되어 세포가 뜯기고 나면 며칠은 정신이 없었다. 여러 명이서 온 사람들은 누구나 팀을 갈랐다. 누군가 패배하면 승리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보살펴야 했다. 승리한 사람이 받은 돈은 대개 나눠가졌다. 


피구 게임이 시작되기 전 기나긴 안내문이 나왔다. 인기 많은 아이돌이 반짝이는 옷을 입고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환한 표정으로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설명했다. 나는 트리에 달린 장식들을 뜯어먹는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예쁘지만 맛이 없는 간식. 인류는 오래전에 인간의 세포를 에너지로 사용하는 방법을 발견했고, 죽지 않을 만큼만 세포를 뜯어내 편리한 삶을 영위해왔다. 세포를 연료로 사용하면서부터 인류의 삶은 급속도로 풍족해졌다. 기껏 하늘이나 날고 휴대용 스마트 기기에 만족하던 사람들이 우주의 맛을 보고 난 뒤로는 정신을 못 차리고 신기술에 빠져들었다. 세포를 주기적으로 뜯어내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가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화석연료를 태우며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데에 도덕적인 만족감까지 느끼기에 이르렀다. 불과 1세기도 못 되어 세포를 뜯는 시술이 인간의 생식능력에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문명의 이기를 누린 사람들에게 그런 경고는 백색소음에 불과했다. 대가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목숨이었다. 순수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경제가 먼저 흔들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세포를 뜯어내면 안 된다는 경고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대책은 하나였다. 생식능력을 잃어도 괜찮을 사람들의 세포를 뜯는 것. 그리고 가끔은 신체 전체를 세포원으로 만들어 유용하게 쓰는 것. 


경기 초반을 이끄는 건 언제나 그렇듯 공격적인 플레이어였다. 몇 번 본 적 있는 남자는 빠르게 공을 던지고 받으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가 노리는 사람들은 주로 아웃 점수를 채우기까지 아직 여유가 있는 신입들이었다. 피구 라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신에게 선물을 바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방박사들처럼 지친 몸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도현도 춤을 추듯 공을 피해 다니며 틈틈이 발아래를 확인했다. 이쪽 팀의 페이스에 휘말리자 수비로 빠져나가 있던 몇몇이 경기 똑바로 하라며 소리쳤다. 생식능력을 빼앗기는 것이 상관없다면서도 그랬다. 


한 차례 신입들이 피구 라인 바깥으로 쫓겨나고 나자 우리 팀의 에이스도 지친 듯 플레이의 속도를 늦췄다. 나는 공을 받아들고서 아무도 없는 방향으로 던졌다. 수비가 달려가 공을 주워왔고, 다시 공격수에게 던졌다. 그 사람도 아무도 없는 방향으로 공을 던졌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한 팀은 지고 누군가는 죽어야만 경기가 끝나는데 누구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았다. 도현은 공을 받았을 때 미니전구가 달린 나무를 맞췄다. 공이 튕겨나감과 동시에 철 지난 전구들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이국의 신은 이미 탄생했고 구원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탄생을 그렇게나 오래 기릴 수 있다는 점이 기이했다.


수비가 공을 주워왔고 다시 공격수에게 던졌다. 피구는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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