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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서관여행자 Jan 21. 2019

도서관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는가

용산도서관

서울 남산에는 남산도서관과 용산도서관, 두 곳의 대형 도서관이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종로도서관과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만큼은 아니지만, 용산도서관과 남산도서관은 지근 거리라 할 만큼 가깝다.


궁금했다. 도서관이 흔치 않던 시절, 대형 도서관 두 곳을 이렇게 가까이 지었을까?


남산도서관은 1964년 소공동에서 남산으로 옮겨 왔다. 용산도서관은 1981년 남산도서관 근처에 문을 열었다. 두 도서관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사연은 뒤늦게 문을 연 용산도서관 개관 과정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용산도서관의 과거를 아시나요?


용산도서관 ⓒ 백창민


지난 1월 남성 열람실 축소 문제로 화제가 된 용산도서관은 도서관 용도 지은 건물이 아니다. 용산도서관 건물은 깜짝 놀랄 ‘과거사’를 지니고 있는데, 박정희 시대를 풍미한 공화당 중앙당사中央黨舍였다(허경영 씨의 공화당 아님!). 박정희 시대 공화당이라고 하면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박정희 시대 여당 노릇을 한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말이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3년 공화당을 창당했다. 공화당 창당은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주도했다. 창당 과정부터 공화당은 문제가 많았다. 중앙정보부는 정치인과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1961년 말부터 민정民政 이양에 대비해 비밀리에 창당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는 워커힐호텔,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 파친코 등  ‘4대 의혹 사건’을 통해 막대한 돈을 모아 정치 자금으로 썼다. 경쟁자의 손발을 묶고 불법 자금으로 창당했으니 출발부터 불공정 경쟁을 한 셈이다.


박정희는 이렇게 만든 공화당 후보로 5대 대선에 출마,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이 되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공화당은 집권당이었다. 


공화당이 남산에 자리잡기까지

 

남산 민주공화당사에서 현판을 내거는 박정희 ⓒ 국가기록원


공화당 창당 과정으로 돌아가 보자. 1962년 1월 4일 중앙정보부는 충무로 1가 맥주집 카네기홀 2층에서 창당 준비를 시작했다. 공화당 산파 역할을 한 김종필이 회고록에서 언급했듯, 중앙정보부는 1962년 1월 말 종로 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빌딩으로 옮겨 ‘동양화학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창당 준비를 이어갔다.


『민주공화당사』에 따르면 공화당은 삼영빌딩, 감리회관으로 옮겼다가 1963년 2월 13일 구 세브란스병원 건물, 에비슨관으로 이전했다. 같은 해 2월 26일 창당한 공화당은 3년 동안 에비슨관을 당사로 썼다. 에비슨관 시절인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을 간신히 꺾고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와 윤보선의 표 차이는 겨우 15만 표로 역대 대선에서 가장 적은 표차였다. 


서울역 앞 에비슨관에 있던 공화당은 1966년 6월 2일 소공동으로 당사를 옮긴다. 당사를 옮긴 이듬해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다시 맞붙어 이긴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도,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94만 표 차로 이긴 것도 모두 소공동 당사 시절 일이다.


소공동에서 6년을 머물던 공화당은 남산 기슭(후암동) 한국문화인쇄 소유 3층 건물을 사들였다. 공화당은 2개 층을 증축하고 1972년 9월 26일 입주했다. 공화당이 사들인 건물은 교통이 상당히 불편했다접근성으로 보면 남산 공화당 당사는 대중정당이 위치할 곳이 아니다. 공화당이 대중정당을 지향하지 않았음을 입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남산에는 공화당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앙정보부와 수도경비사령부(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도 남산에 자리했다. 박정희 시대 국가 권력의 핵심 기관이 모두 남산에 있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친위쿠데타인 10월 유신을 통해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 영구 집권을 시도했다. 1971년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다시는 국민 여러분께 저를 찍어달라고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후 유신 쿠데타를 통해 체육관 선거로 전환,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부탁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김대중이 1971년 대선에서 예언했듯 ‘종신 총통제’로 전환한 것이다.


창당 9년 만에 공화당은 자기 당사를 갖게 됐지만, 정치를 부정하는 유신 체제에서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세입자 신세에서 건물주가 되었지만 정작 본업인 정치에서 소외되는 아이러니에 처한 것이다. 10∙26으로 박정희를 쏜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공화당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공화당엔 정치하는 자가 없고 아첨하는 자만 있었다.”  


어쩌면 공화당은 정치를 본업으로 삼는 ‘정당’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정구영에 이어 1963년 2대 총재가 된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에 죽을 때까지 공화당 총재였다.


공화당과 도서관의 남다른 인연


민주공화당 소공동 당사 현판식 ⓒ 국가기록원


공화당과 도서관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66년 6월 1일부터 1972년 9월 28일까지 6년 동안 공화당은 소공동 건물을 당사로 썼다. 


공화당 소공동 당사는 다름 아닌 일제 시대 경성부립도서관, 즉 남대문도서관 건물이다. 남대문도서관은 1964년 12월 31일 남산으로 이전하면서 ‘남산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남대문도서관이 남산으로 옮기면서 비운 건물에 공화당이 입주, 6년 동안 당사로 쓴 것이다. 남대문도서관 건물은 대한제국 영빈관인 대관정이 있던 곳으로 일제가 한국주차군사령부로 쓰기도 했다.  


공화당은 6년 동안 소공동 옛 남대문도서관 건물을 임대해서 썼는데, 건물 매입도 고려했다고 한다. 건물 매입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해 공화당이 망설이는 사이, 1967년 효성물산이 이 건물을 인수했다. 공화당은 1972년 후암동 당사를 매입하면서 세입자 신세에서 벗어났다. 


도서관 건물을 당사로 쓰다가 당사로 매입한 건물이 다시 도서관으로 바뀌었으니, 공화당은 도서관과 남다른 인연을 가진 정당으로 기록될 듯싶다. 


공화당사가 도서관이 된 사연은


1980년 8월 6일 전두환에게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는 최규하 대통령 ⓒ정부기록사진집


1979년까지 대한민국에 군림한 공화당 중앙당사는 왜 도서관으로 바뀌었을까?


1979년 박정희 사후 12∙12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新軍部는 19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했다. 이 조치로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졌다. 김대중과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 인사가 체포됐다. 광주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것도 이때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은 최규하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264일 만에 권좌에 오른, 누구 말처럼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였다. 권좌에 오른 전두환은 1981년 10월 제5공화국 헌법을 공포했다.


제5공화국 헌법을 통해 신군부는 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당사를 포함한 공화당의 전 재산은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민정당) 자산으로 귀속되었다.


1980년 12월 10일 공화당 청산위원회는 공화당의 후암동 중앙당사(대지 525평, 연건평 2천1백 평)와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3층 건물(대지 1만 2천 평, 연건평 1천6백 평), 전국 8개 시도에 있던 시도당 사무국 건물과 사무비품 일체를 민정당에 ‘무상양도’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100억 원대로 추산되는 공화당 자산을 '무상인수'한 민정당은 가락동 훈련원과 8개 시도당 사무소는 그대로 쓰되, 남산에 있던 공화당 중앙당사만 매각하기로 했다.


전두환의 민정당은 왜 공화당 중앙당사만 매각했을까? 신군부는 남산 공화당 중앙당사가 갖는 상징성이 강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박정희 뒤를 잇는 군부 통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싶었던 걸까. 새롭게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공화당 당사를 도서관으로 ‘급조’했다. 


1980년 12월 민정당은 공화당 중앙당사를 서울시에 서둘러 매각했다. 공화당사를 인수한 서울시는 1981년 2월 용산도서관 설치 조례(서울특별시 조례 제1488호)를 공포하고 1981년 4월 21일 용산도서관을 개관했다. 이것이 불과 5개월 만에 공화당 중앙당사가 도서관으로 ‘변신’한 경위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지 않았다면 그는 독재를 이어갔을 것이다. 용산도서관 건물 역시 공화당 중앙당사로 계속 쓰였을 것이다. 용산도서관은 박정희의 죽음과 신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탄생했다. 


도서관은 왜 자신의 역사에 소홀할까


용산도서관 '민족의 지도자상' ⓒ 백창민


용산도서관을 둘러보면 건물 구조가 도서관으로 쓰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쇄회사가 쓰던 건물을 당사로 썼기 때문에 책 소장과 도서관 이용에 최적화된 구조가 아니다. 


도서관 4층 강당은 공화당 시절 결혼식장으로 시민에게 개방한 적이 있다. 도서관에서 가장 전망 좋은 5층 도서관장실은 총재실로 쓰던 곳이다. 청와대에서 군림한 박정희가 이곳 총재실에 머문 시간은 많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도서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계단 벽면에는 『민족의 지도자상』이라는 작품이 크게 새겨져 있다. 용산도서관이 민주공화당사였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이다.


용산도서관 건물이 담고 있는 과거사는 도서관 입장에서 ‘어두운 역사’ 일 수 있겠다. 하지만 어두운 시대 기록도 전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도서관의 역할 아닐까. 용산도서관 어디에도 과거사를 알 수 있는 안내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점이 아쉽다. 


우리 도서관은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모으고자 하면서 정작 도서관 자신의 역사와 정보는 소홀히 한다. ‘도서관의 역설’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모으기 바빠 자신을 챙길 틈이 없는 걸까. 아니면 도서관 자신의 역사에 무관심하거나 게으른 걸까.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공화당 중앙당사를 시찰하는 박정희 ⓒ 국가기록원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선포식이 거행된 환구단과 석고단을 가릴 목적으로 조선철도호텔과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지었다. 도서관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전두환 신군부는 일제와 다르지 않다. 


도서관은 정치와 무관한, 탈정치적 공간으로 보이지만 가장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도서관이 시민혁명을 통해 공공도서관으로 재탄생했음을 생각할 때 도서관, 특히 공공도서관은 태생부터 ‘정치적’이다.


도서관 건립 관점으로 보면 용산도서관은 남산도서관에서 떨어진 다른 곳에 문을 열었어야 한다. 가뜩이나 도서관이 부족한 마당에 대형 도서관 두 곳을 이렇게 가까이, 그것도 접근성이 나쁜 산자락에 함께 지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용산도서관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도서관 건립 관점이 아닌, 박정희와 공화당 흔적을 지우려는 신군부의 정치적 의도’ 때문이다. 시민을 위한 도서관이 생긴 것은 기쁜 일이나 도서관 탄생에 숨은 역사와 신군부에 의해 말살된 ‘서울의 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며 전진한다. 용산도서관의 과거사는 사소한 역사일 수 있으나 우리가 되새기고 기억할 역사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는가.

 



주소 : 서울시 용산구 두텁바위로 160(후암동)

이용시간 : 문헌정보실(평일 09:00 - 22:00, 주말 09:00 - 17:00), 어린이실 / 디지털.간행물실(평일 09:00 - 18:00, 주말 09:00 - 17:00), 자율학습실(평일 07:00 - 23:00, 11월-2월 08:00 - 23:00, 주말 07:00 - 22:00 11월-2월 08:00 - 22:00)

휴관일 : 매주 둘째, 넷째 화요일, 법정공휴일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 소재 직장인 또는 학생. 무료

홈페이지 : http://yslib.sen.go.kr/

전화 : 02-6902-7777

운영기관 : 서울시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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