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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서관여행자 Nov 17. 2019

일제는 왜 ‘도서관’을 건립했나?

조선총독부도서관 2

조선총독부도서관은 도서관 운영 면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1930년 9월부터는 공휴일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문을 열었다. 1930년 11월에는 도서관 주간을 맞아 라디오 방송을 했다. 책이 부족한 지방도서관을 대상으로 매월 50권씩 책을 대출하는 ‘순회문고’를 운영하기도 했다. 1932년 1월 8일에는 도서관 이용을 늘리기 위해 60명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문고’를 열었다. 


1935년 7월 15일 아동석 30석, 부인석 20석을 갖춘 ‘부녀자문고’를 무료로 운영하기도 했다. 부녀자문고는 1942년 5월 폐쇄했다. 박완서가 친구 복순이와 조선총독부도서관을 방문한 건 부녀자문고 폐쇄 이후였던 모양이다. 


1935년 1월부터는 조선총독부도서관장을 회장으로 하는 조선총독부도서관사업회를 만들어 각종 강연회, 강습회, 독서회, 전람회, 좌담회, 영화회를 열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사업회 회원에게는 도서관 관보官報가 배포되고 도서관 장서의 관외 대출이 가능했다.


분류는 듀이 십진분류법decimal classification이 아닌 조선총독부도서관 분류표를 따로 만들어 사용했다. 1876년 발표된 듀이 십진분류법이 국제 표준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건 192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총독부도서관 분류표는 시마자키 스에히라島崎末平를 중심으로 여러 도서관 분류표를 참고해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시마자키 스에히라는 1924년 4월 조선총독부도서관 사서로 부임했다. 관장인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가 교토제국대학 출신이어서 그런지 「교토제국대학 부속도서관 분류표」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장서의 1/3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총독부도서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전신, 제국도서관 ⓒ Wikipedia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총독부가 건립한 도서관이었음에도 초기 예산은 이범승이 운영하던 경성도서관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일본 내 현립도서관인 아키타秋田현립도서관보다 예산이 적었다. 개관 때 확보했던 1만 2천 권의 장서 중 1만 권은 조선총독부의 사무용 도서였다. 나머지 2천 권은 조선교육회로부터 기증받은 책이었다. 


건물부터 짓고 보자는 식의 도서관 정책은 식민 시대의 유산이었던가. 도서관장이었던 오기야마 히데오조차 개관 당시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책이 없는 ‘도서무관’圖書無館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여성과 김세용이 발간한 『숫자조선연구』에는 1930년도 조선과 일본 본토의 도서관 현황을 비교한 자료가 있다. 당시 조선은 48개 도서관이 있을 때 일본 본토에는 4,609개 도서관이 있었다. 장서수는 조선에 있는 도서관 전체 장서가 315,244권일 때 일본 본토는 9,635,566권으로 1천만 권에 육박했다. 


열람 인원은 조선이 731,337명일 때 본토는 23,354,767명이었다. 일본 본토와 조선의 수치를 비교하면 도서관 수는 1.04%, 장서는 3.27%, 열람인원은 3.13%였다. ‘내선일체를 부르짖은 일제의 도서관 차별은 수치로도 확연히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총독부도서관이라 하기에 초라한 수준이었지만, 1934년부터는 장서수가 12만 권을 넘겼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제외하고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이 되었다. 1937년에는 20만 권에 육박하는 장서를 갖추고 하루 이용자 수도 1천 명에 가까웠다. 문제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조선 도서관 장서의 1/3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장서의 편중이 심했다.


1937년 당시 일본 제국 안에는 장서량 10만 권 이상 도서관이 38개 있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장서량으로는 199,032권으로 18위에 해당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보다 9년 먼저 개관한 타이완총독부도서관 장서량이 15만 4천 권 수준이었음을 고려할 때 조선총독부도서관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장서량을 늘렸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5월에는 323,121권으로 장서량은 계속 늘었다. 장서 10만 권 이하의 공공도서관이 지금도 흔한 걸 생각하면 75년 전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장서 규모는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제외하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滿鐵]가 건립한 다롄大連도서관(212,876권)에 이어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일본 식민지에 있는 도서관 중 두 번째로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도 조선총독부도서관보다 더 많은 장서를 가진 공공도서관은 오사카부립도서관(271,170권)이 유일했다.


일본 본토의 국가도서관 격인 제국도서관과 비교하면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장서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1937년 3월 말을 기준으로 도쿄 제국도서관은 847,676권을 소장하고 있었고,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4 수준인 199,032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장서량이 1/4 수준이었지만 하루 열람인원은 제국도서관이 1,327명, 조선총독부도서관이 949명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제국 내 도서관 중 조선총독부도서관은 하루 이용자가 네 번째로 많은 도서관이었다. 인프라는 열악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도서관에 대한 열망은 그만큼 컸던 것일까. 


총독부 홍보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도서관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 위키백과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소장했던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출판 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제는 1909년 2월 「출판법」을 만들어 시행했다. 「출판법」은 책으로 출간하려는 원고의 사전검열과 사후납본을 의무화해서 출판물을 통제하는 법이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경무총감부 아래 고등경찰과를 승격시켜 도서계에서 신문, 잡지, 출판물, 영화의 검열과 단속을 담당하도록 했다. 도서계는 경무국 도서과, 검열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일제 패망 때까지 이어졌다. 


일제의 검열과 통제를 거친 책만이 도서관에 소장되고 이용자가 읽을 수 있는 시대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황국신민 서사를 제정하고, 일어日語 상용, 창씨개명, 신사 참배와 같은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한다. 


비슷한 시기인 1937년 6월 일본 본토에서는 고노에近衛 내각이 출범했다. 이때부터 일본의 사상 정책은 ‘사상 통제’에서 ‘사상 동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37년 9월부터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이 시작됐다. 1938년 5월 5일부터는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었다. 전선front에서 전쟁 승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후방[銃後, home front]에서 동원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전쟁에 복무하도록 하는 법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도 자료 수집과 열람, 운영 면에서 총독부의 정책과 방침을 선도하는 기관이었다. 총독부도서관은 문헌보국’文獻報國을 도서관 깃발과 노래로 만들어 기치로 세웠다. ‘문헌보국’은 문헌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 조선총독부도서관과 관립도서관은 조선어 책을 철저히 배제하고 일본어로 쓰인 책을 수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 일제의 일본어 강요로 이중 언어 상황에 놓였다. 1913년 0.61%였던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률은 1930년대 중반 10%를 넘어 1943년 말에는 22.15%까지 상승했다.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 중에는 조선어를 아예 하지 못하는 사람도 상당수 생겨났다. 문맹률은 여전히 높아서 1930년 즈음에는 80%에 육박했다. 당시 일본의 문맹률은 8.5%였다. 일본인은 열 사람 중 한 사람 정도가 글을 읽지 못할 때 조선인은 열에 여덟이 까막눈이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근본적으로 조선총독부 학무국 소속 기관으로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에 발맞춰 운영되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935년 10월부터 발행한 도서관 기관지 『문헌보국』을 발행했다. 『문헌보국』에는 도서관 신착도서 목록뿐 아니라 조선 내 발매금지 도서목록, 경무국 납본 목록, 문부성 추천도서 소개가 실렸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금서를 차단하고 일제 추천도서를 홍보하는 사상 통제 기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의 저자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사회교육기관이라기보다 총독부의 홍보기관으로 기능하다가 패전을 맞았다’고 평했다. 


식민지 도서관 비교 : 조선과 타이완 


타이완 국가도서관인 국립타이완도서관National Taiwan Library ⓒ Wikimedia Commons

조선총독부도서관 관장은 개관 때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오기야마 히데오가 계속 맡았다. 오기야마 히데오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으로 교토제국대학 도서관과 이왕직, 중추원, 학무국, 조선사편집위원회 촉탁을 거쳤다. 열정적인 사서라기보다 총독부 방침을 충실히 실행하는 행정가의 면모가 강한 인물이었다.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의 경우 총독부 학무과장 스미모토 시게키치隅本繁吉가 초대 관장을 맡아 개관했다. 이후 제국도서관 사서관 출신이자 일본도서관협회장이었던 오타다메 산로太田爲三郞를 초빙해서 2대 도서관장을 맡겼다. 1915년부터 1921년까지 부임한 오타다메 관장 후 3대 나미가타다 히로시竝河直廣 관장을 거쳐 1927년 7월부터 4대 야마나카 키코리山中樵 관장이 부임했다. 


1945년 일본 패망 때까지 관장을 맡은 야마나카 키코리 관장은 타이완총독부도서관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니가타시청 사회과장 겸 니가타현립도서관장 출신인 야마나카 관장은 타이완 도서관망 확대와 도서관 이용, 독서 보급 확대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심지어 야마나카 관장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에도 타이완에 남아 도서관 재건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이완의 경우 1940년 일본어 해독율이 50%를 넘어섰다. 1943년 말에는 80%라고 선전했는데, 도서관 확대와 관련해서 눈여겨볼 수치다. 


조선총독부도서관장 임용은 1923년 11월 29일 개정된 「조선총독부도서관장 및 대만총독부도서관장 특별임용에 관한 건」(칙령 499호)에 따라 ‘제국대학 사서관’ 임용에 관한 규정을 적용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이나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이나 도서관장 임용에 관한 기준은 동일했다. 그럼에도 조선과 타이완에서 식민통치 기간 동안 도서관 인프라의 차이가 발생한 건 왜일까? 


타이완보다 못한 조선의 도서관 인프라


1914년 건립된 국립타이완도서관 ⓒ Wikipedia


‘식민지 총독부도서관’이라는 점에서 조선총독부도서관과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은 같다. 다만 타이완에는 ‘열정적인 도서관 전문가’가 관장으로 부임했다. 이 차이점이 조선과 타이완의 도서관 정책과 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23년 4월  「공립∙사립 도서관 규칙」이 공포되면서 대만 공공도서관은 크게 성장했다. 1923년 타이완총독부도서관과 사립 석판문고 2개 도서관뿐이던 타이완 공공도서관 수는 12년 만인 1935년 74개가 되었다. 1942년 3월에는 93개 관이 된다. 1942년 시점에 타이완의 공공도서관 보급률은 일본 본토와 비교해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타이완에서는 1935년 3월 시점에 전체 공공도서관 74개 관 중 35개 관이 순회문고를 운영했다. 독서클럽, 강연, 전시 같은 부대행사도 활발했다. 규모가 작은 도서관이 대부분이지만 총독부가 세운 공립도서관이 많았다는 점에서 조선과 큰 차이를 보인다. 타이완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청나라를 거쳐 일본까지 여러 나라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다. 타이완에서 일제 강점기 도서관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193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전국도서관대회’가 서울 경성제국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일본 본토, 조선, 만주, 타이완에서 도서관 관계자 200여 명이 참가했다. 이 도서관대회에서 조선의 도서관 사업이 일본 본토와 비교해서 크게 뒤처지고 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행정과 재정 상의 준비 부족을 그 원인으로 꼽았는데, 조선 도서관 인프라의 취약함은 이미 1930년대 중반에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도서관 사정은 일본 패망 때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과 타이완에 대한 일제 식민지 정책의 차이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총독부도서관장을 중심으로 식민지 도서관에서 일한 사서의 전문성과 열정의 차이도 두 식민지 도서관의 ‘격차를 만들어낸 요인으로 작용한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조선은 ‘불운’ 하기도 했다. 일제는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었지만 도서관 인프라만 놓고 보면 조선은 일본 본토와 타이완에 이어 ‘3등 신민’의 처지였다.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의 차이


소공동 시절의 국립중앙도서관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도서관 사서 수는 개관 시점인 1925년 3명, 1929년에는 4명, 1940년에는 6명, 1942년에는 8명이었다. 전체 직원 수는 개관 시점에 19명의 직원으로 출발해서 1940년에는 직원이 77명으로 늘었다. 이중 조선인은 54명이었다. 일제는 통치기구 내에 조선인 등용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조선에서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체제’를 시행했다. 전시 총동원체제가 시행되면서 관료 수가 늘어나는데, 조선인 관료 수도 함께 늘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통치를 위해 파견한 관리는 식민지 인구 2-3만 명당 1명이었다. 반면, 일제는 조선인 인구 4백 명당 1명의 일본 관리를 파견했다. 그만큼 일제 식민통치가 유럽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촘촘하고 세밀하게 조선을 옥죄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핵심인 중앙부서나 경제기관에는 일본인 관료를 주로 배치했다. 조선인은 말단으로만 썼다.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철도국이나 우편국의 경우 조선인을 단 한 명도 쓰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해당 기관에서 일본인 관료 배치 비율은 일제가 생각한 전략적 중요성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본인 관료 비율이 점차 낮아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일본이 생각한 도서관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걸까? 아니면 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이 다른 기관에 비해 협조적이거나 유능했던 걸까?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관장과 사서, 서기는 일본인이 차지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중 조선인으로 부관장 자리에 오른 이재욱과 세 번째 서열까지 올라선 박봉석은 해방 후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국립도서관’으로 재탄생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 하지만 잊힌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옛터’ 표석 ⓒ 백창민


해방이 되면서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국립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시설, 장서, 인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국립중앙도서관은 해방 이후부터를 자신의 역사로 인정하고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은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일제의 식민통치를 함께 겪은 타이완은 국립타이완도서관의 역사를 타이완총독부도서관 개관 때인 1914년부터 꼽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前身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선총독부도서관 개관에 앞서 총독부 학무국이 기자들에게 밝힌 4가지 도서관 운영방침이 있다. 첫째 조선통치의 주의 방침에 의하여 사상을 잘 지도하며 교육의 보급, 산업의 진행 등에 관한 신구 참고도서를 갖출 것, 둘째 조선 민족의 문헌을 모을 것, 셋째 널리 조선 연구에 관한 화한양서和漢洋書를 모을 것, 넷째 전선全鮮에 도서관의 보급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지도 기관이 될 것. 


총독부의 운영 방침처럼 조선총독부도서관은 불온서적을 차단하고 총독부가 선정한 도서와 목록을 소개했다. 조선인을 사상적으로 통제하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구’로 충실하게 기능한 것이다. 동시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이 해방 후 국립도서관의 토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어두운 시대의 ‘흑역사’이기  때문일까.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부족해서 이 도서관이 어떤 성격을 가졌고, 어떤 기능을 했는지 그 전모를 알기 어렵다. 일제 강점기 조선 도서관 체제의 정점에 있었고 이후 국립도서관으로 전환된 도서관임에도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대한 책과 논문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1973년 발간된 『국립중앙도서관사』에서 다룬 수십 페이지 분량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조선총독부도서관 시대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근대 도서관 제도의 큰 틀이 이때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뜨거운 이슈로 ‘식민지 근대화론’과 ‘근대화 맹아론’이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도서관은 일제 식민통치를 겪으며 근대화된 것인가. 아니면 일제의 통제와 수탈에 의해 한국 도서관의 ‘자생적 근대화’가 거세된 것인가. 


식민 시대를 거치며 근대 문화시설인 도서관이 도입되고 틀이 놓였지만, 도서관이 사상과 지식의 통제,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국가주의가 확산∙선전되는 장이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해방 후 우리 도서관의 과제는 이런 일제 강점기의 유산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에 맞춰졌어야 했다. 


문제는 우리 도서관 분야에서 그런 논의와 실천이 이뤄졌느냐 하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도서관은 식민 시대의 청산보다는 현상 유지와 도서관학 지식∙담론의 수입에 급급했다. 우리 도서관은 식민 시대의 ‘청산’을 미루면서 또다른 식민의 현장으로 ‘전락’한 건 아닐까. 


조선총독부도서관은 해방 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바뀌었지만, 이 자리는 롯데백화점과 롯데호텔이 들어서며 그 흔적이 사라졌다. 1925년 문을 열어 1974년까지 반세기 동안 조선과 대한민국 도서관 체계의 정점에 있던 건물은 그렇게 사라졌다. 소공동 6번지, 지금은 롯데백화점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공간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옛터’라는 표석 하나만 남았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옛터


주소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81 (소공동) 롯데백화점 주차장 1층

이용시간 : 월-목요일 10:30 - 20:00, 금-일요일 10:30 - 20:30

이용자격 : 제한 없음. 

홈페이지 : http://store.lotteshopping.com/

전화 :  02-771-2500

운영기관 : 롯데쇼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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