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도서관 1
을사늑약乙巳條約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이범구, 이근상, 박용화, 민형식, 윤치호, 이봉래는 근대적 도서관의 필요성에 뜻을 모았다. 이들은 회현방 미동 이용문의 집을 임시사무소로 삼아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
도서관 건립 움직임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자세히 보도되면서 각계 인사의 기증과 지원이 이어졌다. 1906년 3월 25일 도서관장에 탁지부대신 민영기, 평의원장에 궁내부대신 이재극, 서적위원장에 학부대신 이완용이 선임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종정부 청사를 사용하고 도서관 건축과 운영비는 임원이 공동 부담하기로 하였다.
1910년 2월 종정부 회의를 통해 ‘대한도서관’大韓圖書館으로 확장하면서 도서관 규모가 커졌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개관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한일 강제병합 이후인 1911년 5월 도서관 개관을 위해 수집한 10만여 권의 장서는 모두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 몰수됐다. 대한도서관의 장서는 몰수된 상태로 있다가 1928년부터 1930년에 걸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문헌정보학 분야에서는 백린의 『한국도서관사연구』로부터 남태우의 『문헌정보학사』에 이르기까지 대한도서관 설립 추진을 최초의 근대적 ‘국립도서관’ 건립 시도로 파악하기도 한다. 잘 알려진 대로 민영기, 이재극, 이완용은 모두 친일파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추진된 도서관을 ‘국립도서관’으로 볼 수 있을까?
‘국립도서관’은 말 그대로 국가가 세운 도서관이다. 국민과 영토, 주권을 모두 갖춰야 ‘국가’다. 망국을 목전에 둔, 주권을 상실한 국가는 국가라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추진된 ‘국립’도서관은 어불성설 아닐까. 게다가 국가를 팔아먹는데 앞장선 이들이 도서관을 세우려는 뜻은 무엇이었을까. 대한도서관을 ‘국립도서관’ 계보에 포함시키는 건 온당한 걸까.
대한도서관을 추진한 인물 중 이완용은 여러모로 동농 김가진과 비교할만한 인물이다. 1858년생으로 김가진보다 12살 어린 이완용은 1882년 10월 과거에 급제했다. 과거 급제 후 이완용은 1886년 3월 24일 규장각 대교로 관직을 시작했다.
관직 생활을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시작한 것도 같지만 외교관으로 일한 공통점도 있다. 김가진은 주일공사로 일했고, 이완용은 주미 조선공사관에서 외교관(참사관)으로 일했다. 당대 명필로 손꼽힌 점도 비슷하며, 독립문 현판을 쓴 사람으로 두 사람이 꼽힌 점까지 같다. 을사늑약 전후로 대한제국 대신이었다는 점 역시 공통점이다.
뛰어난 재능으로 대한제국 대신 자리에 오른 두 사람은 을사늑약 전후로 대조적인 길을 걸어간다.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린 ‘매국노’의 대명사로 알려진 삶을 살았고, 김가진은 대한제국 대신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의 길을 걷는다. 규장각을 거쳐간 두 ‘도서관인’의 삶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조선의 학교, 책방, 개인 집을 수색해서 51종 20여만 권의 책을 압수해서 불태웠다. 진시황과 히틀러도 그랬지만 책을 불태우는 만행은 군국주의자의 필연인가. ‘애국장서회진’이라는 이름으로 단행된 이 ‘분서’焚書 사건으로 조선 출판물은 크게 훼손당했다. 분서에 앞서 이토 히로부미와 데라우치는 규장각 귀중본을 포함한 조선의 고서적 상당량을 자료 조사라는 명목으로 ‘강탈’해서 일본으로 반출했다.
히틀러 시대 독일은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의 선동에 넘어가 자신의 장서를 불태웠다. 일제는 자신의 장서가 아닌 조선의 장서를 불태웠다는 점에서 나치보다 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독일 베를린 베벨 광장 지하에는 ‘빈 서가’가 묻혀 있다. 텅 빈 서가에는 1933년 나치 분서 때 불에 탄 하이네Heinrich Heine의 희곡 『알만조르』Almansor의 대사가 새겨져 있다.
“단지 그것은 서곡일 뿐이다. 책을 불태우는 자가 마지막엔 사람까지 태울 것이다.”
‘이성’이 아닌 ‘광기’가 지배한 지난 날을 증언하고 반성하기 위한 미하 울만Micha Ullman의 작품이다. 나치의 선동에 넘어가 수많은 책을 불태웠던 독일은 자신의 만행을 이렇게 반성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분서’와 ‘위안부’ 같은 만행을 저지른 일제는 어떤 식으로 반성하고 있을까.
일제의 출판물 탄압은 ‘분서’에서 그치지 않았다. ‘분서’ 이후에는 대대적인 ‘금서’ 조치로 단행본 출판을 철저히 막았다. 분서와 금서에 이어 데라우치 총독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다. 「조선교육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일본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교육하고, 둘째 일본에 충성하는 조선인을 양성하며, 셋째 조선인 노동력 확보를 위해 낮은 수준의 실업교육을 실시하고, 넷째 향교와 서당 같은 조선의 교육시설과 구미 선교사가 운영하는 사립학교를 규제했다. 이른바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시작이다. 대일본 제국에 충성하는 신민, 충실한 노동력으로 길러내겠다는 것이 「조선교육령」의 취지였다.
「조선교육령」을 발표한 1911년 일본 본토는 적령 아동의 98.1퍼센트가 초등교육을 받았다. 같은 해 조선은 1.7퍼센트만이 초등교육을 받았다. 18년 후인 1929년에는 18.6퍼센트로 나아지지만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일제 식민 통치 중반까지 기초적인 초등교육이 이런 실태였는데, 도서관 상황은 말할 나위 없는지 모른다.
심지어 조선총독부는 총무, 내무, 탁지, 사법, 농상공 5부를 두었는데,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는 아예 두지 않았다. 교육은 내무부 아래 학무국이 맡도록 했다. 1914년 1,068개였던 사립학교가 일제의 무단통치기를 거치면서 1919년 749개로 ‘급감’했다. ‘학교’마저 없앤 일제가 ‘도서관’을 건립하려 했을까. 반면 일본 본토의 공사립 도서관은 1904년 99개에서 1926년 4,336개로 크게 늘었다.
‘도서관’에 관해 특기할 대목은 일본 국내에서는 1879년 「교육령」을 통해 도서관을 독립 교육기관으로 명문화했다는 점이다. 일제는 「조선교육령」에서 도서관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도서관을 부정했다.
일제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조선에 도서관을 건립하지 않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도서관을 건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생적으로 문을 연 조선인의 도서관을 폐쇄했다. 말 그대로 도서관이 없는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일제가 실질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한 1905년 을사늑약 때부터 1920년대 초까지 한국통감부나 조선총독부 차원의 도서관 건립은 아예 추진하지 않았다.
훗날 동경시립도서관이 되는 ‘대일본교육회서적관’은 1887년에 문을 열었고, ‘제국도서관’이 도쿄 우에노上野 공원 도쿄음악학원 부지에 개관한 것은 1906년이다. 제국 본토와 비교하면 조선총독부도서관 개관은 20년 가까이 늦다. 일제가 조선과 함께 식민 지배를 한 타이완臺灣의 경우 1915년 8월 9일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이 문을 열었는데, 조선은 이보다 10년이 늦었다.
그나마 조선총독부에서 도서관 건립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도 1919년 3∙1 운동 이후부터다. 3∙1 운동을 겪으면서 일제는 강압적인 동화정책인 ‘무단통치’武斷統治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3∙1 운동 후 일제는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3대 총독으로 임명하며 유화적인 식민통치를 시도했다. ‘문화통치’文化統治의 시작이다. 일제의 통치가 본질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조선 동화정책을 더욱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통치 스타일을 바꾼 것이다.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바꾸고, 이전과 달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같은 민간 신문과 잡지의 발행을 허용했다. 교사에게 칼을 차지 않게 하고, 조선인에게 총독부 관직을 허용하는 조치가 시행됐다. 헌병 대신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조선총독부 본부에 경무국을 설치하고 경찰 수를 크게 늘렸다. 일제는 패망 때까지 조선 경찰 수를 전체 관리의 20퍼센트 선으로 유지했다.
1910년 481개였던 경찰관서는 1920년 2,761개로 크게 늘었다. 같은 시기 5,694명이던 경찰 수도 18,376명으로 3배 이상 늘렸다. 경찰관서에 ‘특별고등부’라는 비밀경찰부도 이때 설치했다.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무단통치’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일제는 조선인의 숨통을 일부 틔워주며, 조선인 사이에 격차를 발생시키는 동시에 ‘친일파’를 양성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도서관 건립도 이때 이뤄졌다. 1921년 문을 연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에 부지와 건물을 무상 제공하고, 1922년 경성부에 첫 공공도서관(경성부립도서관)을 건립한 후 1925년에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개관했다.
‘무도서관’ 정책으로 일관하던 일제는 왜 조선에 도서관을 건립했을까?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를 1919년 3∙1 운동으로 폭발한 조선의 저항에 대한 ‘유화 조치’로 본다면, 이 시기 잇달아 문을 연 도서관도 조선 민중의 투쟁으로 얻은 성과로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을 쓴 가토 가즈오와 가와타 이코이, 도조 후미노리는 이렇게 지적한다. 일제는 “독립된 사회교육기관이나 문화시설이 아닌 ‘통치도구’로 도서관을 건립”한 것이라고.
일제는 식민 지배를 시작하자마자 타이완과 조선, 만주 지역의 역사, 지리, 문화, 각종 정보를 샅샅이 조사했다. 조선에서 이를 담당하던 부서는 조선총독부 취조국이다. 취조국은 1911년 6월 궁내부 이왕직이 가지고 있던 홍문관, 규장각, 집옥재, 시강원, 북한산 이궁, 정족산사고에 있던 장서 11만 권을 이관받았다. 취조국이 가지고 있던 조선 왕실의 장서는 훗날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넘어가지만, 취조국이 담당했던 조선 문헌 수집 업무는 1925년 개관한 조선총독부도서관으로 이어졌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환구단圜丘壇 근처 ‘석고단’石敲壇 자리에 지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건립 위치도 ‘통치 도구’로 도서관을 지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조선총독부도서관 부지는 낙산 아래와 탑골공원이 거론되다가 최종적으로 석고단 영역으로 결정되었다.
1897년 10월 11일 완성된 ‘환구단’은 베이징北京의 천단天壇을 본떠 화강암으로 세 개의 단을 쌓고, 금색 원추형 지붕을 씌운 제단이다. 하늘과 땅을 비롯한 천지자연의 신위를 모셨다. 환구단과 함께 1899년 세워진 ‘황궁우’皇穹宇는 태조, 하늘, 땅 세 신위를 모신 3층 규모 ‘팔각정’이다.
동양에서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인식했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 사이에 ‘팔각형’이 있다고 생각해서 팔각형을 신성한 도형으로 여겼다. 제후국이던 조선은 팔각형을 사용하지 못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천자의 상징인 팔각형 정자, 황궁우를 세운 것이다.
석고단은 환구단 근처에 있어서 관련 유적으로 오해받곤 한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에 따르면 석고단은 1902년 송성건의소頌聖建議所라는 단체가 고종황제 즉위 40년과 망육순(51세)이라는 양대 경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는 돌로 만든 북[石敲]에 고종황제의 공덕을 새기려고 했으나 제왕의 업적은 서책을 통해서만 전하는 것이라 하여 돌북에 글씨를 새기지 않았다.
석고는 원래 ‘석고각’石敲閣이라는 건물을 지어 그 안에 두었다. 그런 석고단 자리에 일제가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지으면서 석고단의 ‘수난’이 시작된다. 석고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석고각은 1935년 박문사 종각으로 옮겨졌다. 석고각 앞에 있던 ‘광선문’光宣門은 1927년 동본원사 대문으로 이전했다(조선총독부도서관 정문이 들어선 곳이 광선문이 있던 자리다). 석고단 역시 1936년 황궁우 옆,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일제는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을 뿐 아니라 1913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환구단을 없앴다. 환구단 자리에는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의 ‘조선철도호텔’을 세웠다. ‘조선총독부도서관’도 대한제국과 고종황제를 지우기 위한 목적으로 석고단 자리에 지었다. 1938년에는 조선철도호텔 근처에 지상 8층짜리 ‘반도호텔’까지 들어섰다. 반도호텔은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환구단 영역의 축소와 대한제국 지우기는 일제 강점기 내내 이어졌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탄생과 독립을 상징하는 장소인 환구단을 가리고 훼손해서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대한제국이라는 독립국가의 성역을 일개 호텔 정원과 도서관 뒷마당으로 전락시켰다. 정치와 무관해 보이는 도서관을 가장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도서관이라는 문화 시설을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활용한 일제의 통치 전략이 놀랍기만 하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923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923년 12월에 마무리했다. 도서관 건물은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본관과 지상 5층 높이 서고로 완성했다. 도서관 업무는 개관 전인 1923년 11월부터 경성부 대화정 2정목 조선헌병대사령부 진단소 안 임시 사무소에서 시작했다. 도서관 사무실을 총독부 건물도 아니고 조선헌병대사령부에 마련해서 개관을 준비한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순우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립 비용은 총독부가 아닌 조선상업은행이 부담했다. 도서관 건립 비용이 없었던 조선총독부는 건축비와 비품비를 조선상업은행이 부담하도록 했다. 그 대신 총독부 소유였던 건물을 조선상업은행에 제공했다. 그 건물이 바로 ‘광통관’으로 알려진 지금의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다. 도서관을 지어주고 얻은 건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정작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물은 45년 전에 헐렸다.
도서관이 개관한 건 을축년 대홍수가 발생한 1925년이며, 개관한 날짜는 진무천황제일인 4월 3일이다. 진무천황은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전하는 초대 천황이다. 진무천황제일은 진무천황이 죽은 날을 기념하는 날로 이 날을 조선총독부도서관 개관일로 잡은 것이다. 도서관 개관 날짜만 봐도 천황의 ‘신민’臣民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으로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관 시점의 도서관 열람시간은 오전 8시 또는 10시부터 밤 9시까지였다. 매주 수요일과 기원절紀元節, 시정기념일, 천장절축일天長節祝日, 연말연시(12월 28일 - 1월 6일)는 휴관했다. 기원절은 진무천황이 즉위한 날이고, 시정기념일은 일제가 한국 통치를 시작한 날이다. 천장절축일은 천황의 생일이다. 천황의 지배와 일제의 식민 통치를 기념하는 날을 도서관 휴관일로 삼은 것이다. 열람료는 1회 4전씩, 10회권은 35전이었다. 신문 열람은 무료였다.
박완서의 작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에 보면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국어 첫 시간에 ‘도서관’에 대해 배운 그녀는 친구 복순이와 일요일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찾아 나섰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도서관은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였다. 그때 그 도서관을 우리는 공립도서관이라고도 했고 총독부도서관이라고도 했다. 해방되고 나서 국립도서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중략) 붉은 벽돌 건물엔 권위주의적인 정적이 감돌고 있었고 감히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책을 빌리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중략)
안에 충충하게 고여 있는 어둡고도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문 저문 조심스럽게 엿보고 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내 동무는 또박또박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 이용법을 직접 해보려고 왔노라고 말했다. 당장 몰아낼 듯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온 수위였지만 내 동무의 똑똑함에는 감동을 한 듯했다. “허, 고것들 참”하면서 이 도서관에는 아이들 열람실이 없으니 딴 도서관엘 가보라고 했다.”
박완서와 친구 복순이는 수위가 알려준 대로 총독부도서관에서 가까운 ‘경성부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으로 향했다. 박완서 눈에 비친 조선총독부도서관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어린 그녀의 눈에도 ‘국가주의’를 지향한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위압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