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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서관여행자 Nov 17. 2019

‘망국’의 현장이 된 대한제국 황실 도서관

덕수궁 중명전

‘정동’貞洞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한양도성 안에 왕비의 능을 마련한 건데,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이성계의 사랑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정릉은 신덕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 도성 밖(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지지만, 정릉이 있던 곳이어서 ‘정동’이라는 이름이 남았다. 


선조 때 사림은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갈등하며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었다. 강경파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온건파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서 각각 동인과 서인으로 불렸다. 동인을 대표하는 김효원의 집은 낙산 건천동에, 서인을 대표하는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정동에 있었다. 정동은 ‘당쟁’黨爭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열강의 각축장 정동 


 ‘아관파천’의 현장, 러시아 공사관 ⓒ 백창민


정동은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모여 있던 곳이다. 1883년 미국 공사관, 1884년 영국 공사관, 1885년 러시아 공사관에 이어, 1889년 프랑스 공사관, 1891년 독일 공사관이 자리를 잡았다. 1901년과 1902년에는 벨기에 공사관과 이탈리아 공사관이 정동과 가까운 서소문동에 자리 잡았다. 이 일대에 외국 공사관이 몰린 이유는 뭘까? 교통이 편리하고 도성 안이면서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라 공사관이 자리 할 공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중전 민씨가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 동안 피신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일국의 왕이 자신의 영토에 있는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친일 내각을 치고 친러 내각을 구성했다.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맞서려 했으나 러시아와 일본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맺으며 조선에서 이익을 챙기기 바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德壽宮)으로 환궁했다. 중전 민씨가 시해된 경복궁보다 외국 공사관으로 둘러싸인 경운궁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근대화 추진 장소로도 외국 공사관과 배재학당, 이화학당, 러시아정교회, 성공회 성당이 모여있는 정동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느낀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에 즉위했다. 황제 즉위와 함께 고종은 ‘광무개혁’光武改革을 단행했다. 근대적 토지조사사업과 상공업 진흥 정책 추진하고, 각종 학교와 공장을 설립했다. 철도와 전차, 전화 같은 신문물도 도입했다.


경운궁에 구성헌九成軒, 돈덕전惇德殿, 석조전石造殿, 정관헌靜觀軒, 중명전重眀殿 같은 서양식 건물을 세운 것도 이 때다. 경운궁에 있는 서양식 건물은 근대화를 이루려 한 고종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대한제국은 ‘제국’帝國도 ‘왕국’王國도 아닌 일본의 ‘속국’屬國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황실 도서관 수옥헌


대한제국 ‘황실 도서관’ 중명전 ⓒ 백창민


정동극장 옆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면 ‘중명전’重眀殿이라는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중명전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으로 1899년 6월 지은 ‘황실 도서관’이다. 1897년 9월 30일 미국의 알렌Horace Newton Allen 공사가 본국에 보낸 「주한미국공사관 주변과 도로의 약도」에는 이곳을 ‘King’s Library’로, 1901년 영국 공사관의 브라운 대령Colonel Browne이 그린 「서울 지도Western Quarter of Seoul에는 ‘Library Imperial’로 표시하고 있다. 


수옥헌의 설계자는 누구일까? 대한제국 내부 소속 기사인 미국인 다이J. H. Dye(이순우)라는 설과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Afanasii Ivanovich Scredin-Sabatin(김정동)이라는 2가지 설이 있다. 사바틴은 1891년 경복궁 건청궁에 서양식 서재 관문각觀文閣을 지은 사람이다. 지은 지 10년 만에 헐리지만 관문각은 궁궐에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중전 민씨 시해 사건 당시 경복궁 안 관문각에 머문 사바틴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직접 목격했다. 훗날 인천부립도서관 건물로 쓰인 제물포 세창양행 사택을 설계한 사람도 사바틴이다. ‘대한제국 건축가’로 조명받고 있는 사바틴은 ‘도서관 건축가’이기도 했다. 


고종은 경복궁 집옥재集玉齋에 4만여 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아관파천으로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집옥재 일부 장서도 수옥헌으로 가져왔을 것이다. 황실 도서관 수옥헌의 책은 집옥재 장서 일부와 경운궁 환궁 이후 모은 장서였을 것이다. 


지은 지 2년 만인 1901년 11월 16일 수옥헌은 화재로 소실됐다. 당시 수옥헌에는 ‘귀한 서책이 숱하게 있었다’고 하는데 가구와 함께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규장각을 다시 강화하고 경복궁 집옥재에 근대 문물에 대한 책을 열정적으로 수집한 고종의 행보로 볼 때 수옥헌에도 상당한 장서가 있었을 것이다. 


화재로 책과 건물이 불타버린 때문인지 수옥헌 장서는 규장각과 집옥재와 달리 목록이 따로 전하거나 알려진 내용이 없다. 화재 나기 전 1층 건물이던 수옥헌은 1902년 5월 이후 지하 1층, 지상 2층 벽돌조 건물로 새롭게 지어졌다.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체결한 을사늑약


을사늑약 체결 현장 ⓒ 백창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29일 일본 총리이자 외상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일본의 조선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해 8월 12일 일본과 영국은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와 영국의 인도, 버마(미얀마) 지배를 묵인하기로 했다. 9월 25일 일본은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보장받았다.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일본을 중재해서 평화를 이끈 공으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성사시킨 윌리엄 태프트는 루스벨트에 이어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아닌 ‘열강의 전리품’일뿐이었다. 


서구 열강의 묵인을 얻은 일제는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사로 파견, 고종 황제와 내각 대신에게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이토가 여러 차례 알현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고종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조처하라’며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11월 17일 고종이 불참한 채 이토가 주재한 어전회의가 중명전에서 열렸다. 경운궁 주위에 일본군을 배치한 이토는 내각 대신 8명에게 개별적으로 조약 체결에 대한 찬반을 물어 5명으로부터 찬성을 확인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였다. 조약에 찬성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을사오적’이라 불리게 된다. 


을사오적으로 꼽히지 않았을 뿐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문안 수정 작업에 참여해서 결과적으로 찬성한 것이나 다름없고, 법부대신 이하영은 오래전부터 친일 행각을 했다. 궁내부대신 이재극도 고종과 이토 사이에서 조약 체결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참정대신 한규설을 제외하고 대한제국 대신이 모두 일제 지배를 적극 찬동하거나 받아들인 점이 충격적이다. 


전쟁이 아닌 조약 체결로 식민지 전락한 대한제국


을사늑약문 ⓒ 백창민


고종 역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고종 입장에서는 내각 대신에게 미룸으로써 우회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일 테지만 결과적으로 조약 체결의 길을 터준 셈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매국노를 대신으로 임명한 사람도 고종 자신 아닌가. 

날씨나 분위기가 스산하고 쓸쓸하다는 표현으로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을사년스럽다’는 말이 ‘을시년스럽다’를 거쳐 변한 말이다. 을사년乙巳年 망국의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널리 퍼졌을까. 


여기서 궁금한 건 한 나라가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고 조약 체결로 ‘속국’으로 전락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할 때도 망하지 않은, 518년이나 이어온 조선은 어떻게 조약 체결로 식민지로 ‘추락’했을까. 이를 지켜본 외국인도 이상하게 느낀 모양이다. 중명전 근처에서 을사늑약 체결을 지켜본 미국 공사관 부영사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Straight 부영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한 나라 운명이 내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50야드 안쪽에서 결정되고 1,200만 명의 독립 제국이 투쟁도 없이 착취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각료들은 서명을 끝마쳤다.”


대한제국, 망국의 현장


황실 도서관이자 역사의 현장인 ‘중명전’ ⓒ 백창민


수옥헌, 지금의 중명전을 다루는 이유는 이곳이 ‘황실 도서관’인 동시에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른 ‘역사의 현장’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오적에게 조약 찬성을 일일이 확인한 후 대한제국과 일본은 조약을 체결했다.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정부의 특명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가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그 장소 또한 수옥헌이다. 굴욕적인 조약 체결을 통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고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대한제국 황실 도서관 수옥헌은 어떻게 을사늑약 체결 장소가 된 걸까? 1904년 4월 14일 함녕전咸寧殿 온돌을 고치다가 경운궁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중화전中和殿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자 고종 황제는 수옥헌으로 처소를 옮기고 집무실로 사용했다. 황실 도서관 수옥헌이 우리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서게 된 사연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인 1906년부터 수옥헌은 ‘중명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헌軒에서 전殿으로 건물은 격상되었으나 국력과 국권은 회복 불능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 그리고 고종의 강제 퇴위 


헤이그 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 백창민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고종 황제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Hague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헐버트Homer B. Hulbert 네 명을 특사로 파견했다. 일제 침략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외교권을 되찾기 위한 ‘특사特使이자 일제 감시 속에 비밀리에 파견한 ‘밀사密使였다.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려 했으나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울분을 참지 못한 부사副使 이준은 7월 14일 숨지고 헤이그에 묻혔다. 1907년 7월 20일 일제는 평리원에서 궐석재판을 열어 헤이그 특사 중 정사正使인 이상설은 사형, 부사인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각각 종신형을 언도했다. 


이상설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1917년 3월 2일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48세로 사망했다. 을사늑약 때 고종에게 ‘죽음으로써 비준을 거부하라’고 상소했던 이상설은 죽음을 앞두고 이런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는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위종은 항일운동을 이어가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혁명군에 가담했다.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05년 워싱턴 특사에 이어 1907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된 헐버트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추방 당했다.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머나먼 이국에서 분투한 헤이그 특사는 헐버트를 제외하고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헤이그 특사는 일제 침략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헤이그 특사 파견 소식을 접한 일제는 1907년 7월 18일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7월 20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열린 양위식에는 황위를 물려주는 고종도, 물려받는 순종도 참석하지 않았다. 일제는 7월 24일 ‘정미7조약’이라 불리는 한일신협약을 체결, 통감이 한국 내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있도록 했다. 정미7조약을 통해 일제는 고문정치를 차관정치로 전환하고, 7월 3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8월 1일 군대 해산에 반발한 대한제국 군대와 일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대한제국 군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였다.


왕과 대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킬 각오였다면


고종의 헤이그 특사 위임장 ⓒ 백창민


만국평화회의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진 못했지만 고종 황제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장소가 중명전이다. 1907년 4월 20일 이준이 고종의 위임장을 받은 곳이 바로 이곳 중명전인 것이다. 특사 파견 후 고종은 일제에 의해 황제에서 퇴위당하고 유폐되는데, 고종의 강제 퇴위를 촉발한 장소 또한 중명전인 셈이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망국의 현장’이자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망국을 막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 모두 ‘황실 도서관’ 중명전에서 벌어졌다.


헤이그 특사 파견 12년 후인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장례식인 3월 3일을 앞두고 3∙1 운동이 일어났다. 작가 송우혜는 고종이 살아있는 동안 나라를 위해 이룩한 것보다 ‘죽은 고종의 차가운 시신이 오히려 더욱 거대하고 장렬하고 가치있는 기여를 말없이 성취’해냈다고 평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상설은 황제가 인준을 해도 나라가 망하고 인준을 하지 않아도 망하니 인준을 거부하고 사직을 위하여 순사殉死할 것과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상설이 주장한 것처럼 고종이 죽음으로써 늑약 체결을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고종은 이상설의 상소처럼 처신하지 않았다. 하긴 왕과 대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킬 각오였다면, 나라가 그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망국 그 후, 중명전 이야기


서울시청 서수문별관에서 바라본 덕수궁 전경 ⓒ 백창민


경운궁에 세운 중명전이 덕수궁 담장 밖으로 밀려난 이유는 뭘까? 


대한제국 때 경운궁은 지금보다 3배 넓은 규모였으나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선황제先皇帝가 거처하는 궁으로 위상이 달라지고 이름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가 경운궁을 축소하면서 중명전은 경운궁 밖에 놓이게 됐다. 1912년부터는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 모임인 서울 구락부Seoul Club가 중명전을 임대해서 사용했다.


1925년 3월 12일 중명전에 화재가 발생해서 2층이 전소됐다. 책과 신문을 두던 2층 서적실에서 시작된  화재로 중명전은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이후 복구된 중명전은 구락부로 계속 사용, 해방 후 서울 클럽, 아메리칸 클럽으로 쓰였다.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일제는 선원전 구역 전각부터 해체, 매각해서 덕수궁 영역을 크게 축소했다.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덕수초등학교), 구세군사관학교 같은 학교 부지와 경성방송국, 경성부민관이 덕수궁 영역에 자리를 잡았다. 1933년부터는 덕수궁을 일반에게 공원으로 개방하고, 1938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을 이왕가 미술관으로 바꿨다. 1934년 12월에는 연못을 만들어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창경궁昌慶宮이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의 동물원, 식물원으로 전락한 것처럼 경운궁도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이 되었다. 해방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열리면서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지만 왕실이라는 주인을 잃은 덕수궁은 쇠락의 역사를 걸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중명전은 국유재산이 되었다. 1963년 영구 귀국한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 소유였다가 1977년 민간에 매각되어 개인 소유로 바뀌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중명전은 크게 훼손되었다. 2006년부터 문화재청이 관리하면서 중명전은 2007년 2월 덕수궁에 다시 편입됐다. 2009년 문화재청은 공사를 통해 중명전을 대한제국 당시 모습으로 복원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중명전은 철저히 ‘잊힌 도서관’이기도 하다. 우리 도서관 역사와 문헌정보학사를 보면 이완용, 민영기, 이재극 같은 친일파가 주축이 되어 추진한 ‘대한도서관’은 국립도서관 건립 시도로 거론하지만 중명전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중명전이 어떤 책이 얼마나 있었는지 판단할 근거가 부족해서일까. 우리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중명전을 도서관 역사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건 이상하다. 


광명’이 아닌 암흑’의 역사가 시작된 도서관


중명전 편액 ⓒ 백창민


중명전의 ‘중명’重眀은 일월日月이 함께 하늘에 있어서 광명이 겹친다는 의미다. 임금과 신하가 각자의 자리에서 직분을 다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건물 이름과 달리 고종은 일제의 강압을 회피하기 바빴고, 나라의 녹을 먹는 대신들은 을사늑약에 찬성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했던가. 을사늑약 체결로부터 92년이 지난 1997년,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위기를 맞았다. ‘경제 망국’으로까지 불린 위기가 나라를 덮쳤지만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 중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시민은 그들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다.


국권을 잃지 않았다면 중명전은 대한제국 또는 근대화된 나라의 ‘황실도서관’ 또는 ‘국립도서관’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광명光明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을 지닌 중명전. 이름과 달리 중명전의 광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중명전은 광명이 아닌 암흑’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우리 역사에서 망국의 현장으로 기록된 ‘도서관’은 중명전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또 그래야만 한다. 




주소 : 서울시 중구 정동길 41-11 덕수궁 중명전

이용시간 : 09:30 - 17:3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이용자격 : 이용 자격 제한 없음. 무료 

홈페이지 : http://www.deoksugung.go.kr

전화 :  02-771-9951

운영기관 : 문화재청 덕수궁 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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