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곡정보문화도서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1978년 봄, 주인공 현수(권상우 분)는 말죽거리 근처 고등학교로 전학 온다. 현수 어머니가 집값 상승을 기대하고 서둘러 강남으로 이사 오면서 현수도 전학을 오게 된 것.
제목뿐 아니라 영화의 주무대로 등장하는 ‘말죽거리’는 어디일까? 서울시 서초구 양재역 사거리 일대가 바로 말죽거리다. 지금의 지하철 3호선 양재역 주변은 조선시대에도 ‘역’이 있었다. 역참驛站 제도의 ‘역’ 말이다. 조선시대 양재역良才驛은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역으로, 한양에서 경기 이남으로 가는 이들이 말을 갈아탈 수 있었다. 양재역은 종6품 찰방察訪이 머물며 경기도 전체 역을 관리하는 역할을 할 정도로 큰 역이었다.
말죽거리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 여행자가 이곳에서 말에게 죽을 끓여 먹였다고 하여 ‘말죽거리’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이괄의 난’으로 인조仁祖가 공주로 피난 갈 때 여기서 말에 탄 채 죽을 먹어서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다.
아무리 급하기로 왕이 말에 탄 채 죽을 먹었을까 싶은데, 그 사람이 ‘인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조가 누군가. ‘프로 도망러’ 아닌가. 인조는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1637) 때 세 번이나 한양도성을 등지고 피신했다.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많이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기록을 보유한 왕이다. 도망 자체를 탓하는게 아니다. 청과 전쟁 과정에서 인조의 정책과 처신은 비판할 대목이 많다.
말죽거리 지명 유래에는 제주도 말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말을 손질하고 죽을 쑤어 먹였다는 설, 병자호란 때 청나라 용골대龍骨大가 이곳을 병참으로 삼아 말죽을 쑤어 먹였다는 설도 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말’과 ‘죽’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사람을 위해서든 말을 위해서든 ‘죽을 쑤던’ 말죽거리 일대가 강남 땅값의 신화로 등장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1947년 4월 1일 서울시는 팔각형으로 된 새 휘장을 발표한다. 새 휘장의 ‘팔각’은 서울 주위 여덟 개 산, 즉 남산, 와우산,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무학봉, 응봉을 의미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서울의 범위가 강북 일부에 국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까지 지금의 강남 일대는 행정구역상 경기도였다. 대부분은 논과 밭, 과수원이었다. 1963년 시점에 지금의 강남구과 서초구 일대 땅에 살던 사람은 2만7천 명도 되지 않았다.
서울시는 1963년 1월 1일 자로 경기도 일대를 편입하며 크게 확장했다. 이때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했던 지금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가 모두 ‘서울’이 되었다. 1963년 당시 서울은 인구 300만 명(325만 명)을 넘어선 터라 1985년 500만 명을 수용한다는 목표로 서울시를 대대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서울시의 인구 500만 명 수용 목표는 당초 계획보다 15년이나 이른 1970년 7월에 넘어섰고,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1천만 명을 넘어섰다. 빨라도 너무 빠른 목표 달성이었다. 1960년대 전국 인구 성장률은 연평균 2.3%인데 서울은 연평균 8.2%였다. 강명구의 표현처럼 ‘농촌 탈출’rural exodus을 통한 ‘압축적 도시화'condensed urbanization 현상이 서울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1966년 1월 19일 제3한강교(가수 혜은이가 1979년 불러서 크게 유행한 그 ‘제3한강교’다) 공사가 시작되는데, 지금의 한남대교다. 제3한강교 건설은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이자 강남 땅값 상승의 신호탄으로 자리매김 하지만, 당초 이 다리를 놓은 건 군사 전략상 이유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수많은 서울시민이 피난하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 놓인 것은 한강 다리 폭파로 피난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 한강에는 한강철교(1900년 7월 완공), 제1한강교(지금의 한강대교, 1917년 10월 완공), 광진교(1936년 10월 완공),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 1965년 1월 완공) 4개 다리만 있을 뿐이어서, 서울시민의 신속한 피난을 위한 추가 다리 건설이 필요했다.
1960년대 후반은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심했던 시기다. 1964년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후 남북한 무력 충돌은 1967년 784건, 1968년 985건으로 급증했다. 남파 간첩 수도 1966년 50명에서 1967년 543명, 1968년 1,247명으로 크게 늘었다.
굵직한 사건도 연이어 터졌다. 1967년 1월 19일 해군 경비정 당포호가 북한의 포사격을 받고 침몰했다. 1968년 들어서는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의 청와대 공격, 1월 23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1월 2일 울진 삼척 지역 북한 게릴라 침투 사건이 터졌다. 1969년 4월 15일에는 미국의 EC-121형 정찰기가 격추되기도 했다.
이 시기 북한은 왜 전쟁에 준하는 도발을 감행했을까. 박태균 교수는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억제하기 위해 북한이 공세를 강화했다고 해석한다. 한반도에서 안보 위기를 일으켜 남한 병력의 베트남 증파를 막아 북베트남을 도우려 했다는 것이다. 북한과 북베트남, 김일성과 호치민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면 이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안보 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국민동원체제를 통해 ‘병영국가’를 완성했다. 징병제 강화, 향토예비군 창설, 주민등록제도 시행이 모두 1968년을 전후로 이뤄졌다. 광화문 사거리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 것도 이때다. 1975년에는 캄보디아(4월 17일), 베트남(4월 30일), 라오스(5월 8일) 세 나라가 도미노처럼 공산화되면서 안보 위기 의식이 크게 일었다. 강남 개발 이면에는 국제 정세 변화와 남북 군사적 긴장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67년 5월 3일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박정희는 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언급했다. 재선 되자마자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밀어붙였다. 고속도로 건설 결정과 동시에 설계와 공사를 ‘병행’했다고 하니, 무모한 ‘속도전’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968년 12월 서울-수원 구간을 개통하고, 1970년 7월 7일에는 경부고속도로 428km 전 구간을 개통했다. ‘선 개통 후 보완’하자는 구상이었다지만, 가로등도 중앙분리대도 전화도 없는 고속도로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강남 대개발’로 이어졌다. 제3한강교가 경부고속도로 시발점이 되면서 고속도로 부지를 확보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구획정리사업을 하면서 강남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1970년 11월 5일 양택식 서울시장은 특별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남 일대 837만 평 땅을 개발해서 한강 이남으로 인구를 분산하고, 새로운 제2서울을 건설한다는 ‘남서울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강남 개발과 함께 강남과 강북을 잇는 다리도 연이어 건설했다. 1971년 11월 영동대교를, 1972년 7월에는 잠실대교를 개통했다. 영동지구에 이어 잠실지구까지 포함, 1,300만 평에 달하는 강남 일대 개발은 이렇게 추진됐다.
경부고속도로 용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해 추진한 영동1지구와 달리 영동2지구는 다른 목적으로 개발했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 분야 핵심 요직에 있던 손정목은 영동2지구가 박정희 정권의 정치 자금 마련을 위해 정략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실제로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윤진우는 25만 평 가까운 땅을 싸게 사들였다가 비싸게 되팔아 20억 원의 정치 자금을 마련했다. 당시 20억 원은 2003년 기준으로 5천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렇게 마련한 정치 자금은 박정희가 김대중과 맞붙은 1971년 4월 27일 대통령 선거와 5월 25일 국회의원 선거 비용으로 쓰였다. 투기 조장을 막아야 할 정부가 정권 차원의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증언이다. 대한민국이 ‘부동산 투기 공화국’이었음을 증거하는 사례다.
한강 남쪽에 개발되기 시작한 ‘제2서울’은 처음엔 ‘강남’江南이라는 명칭보다 영등포의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구의 중간이라는 의미로 ‘영동’永東이라 불렸다. 1962년까지 서울에서 한강 남쪽에 있는 지역은 영등포가 유일했다. 지금의 강남 지역을 영등포를 기준으로 ‘영동’이라 부른 건 이 때문이다.
강남 땅값 폭등은 왜 ‘말죽거리 신화’라고 불릴까? 지금의 3호선 양재역 주변 말죽거리에 복덕방이 밀집해 있었는데, 이곳을 통해 부동산 투기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1969년 12월 25일 제3한강교 완공과 함께 강남땅에 대한 투기가 본격화된다. ‘복부인’福婦人이라는 말이 탄생한 것도 이때다. 강남 땅값의 고공행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왔다.
값비싼 땅값 때문일까. 강남구 공공도서관은 1984년 개관한 개포도서관을 제외하면 독립 건물로 지은 사례가 드물다. 1982년 개관한 강남도서관은 강남교육청 일부를 도서관으로 ‘개조’한 사례라 독립 건축물로 지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나마 개포도서관도 개포지구 258만 평을 개발한 대한주택공사가 도서관을 지어 기부 채납한 경우다.
제3한강교가 착공된 1966년 1월 19일을 영동지구 개발 시점으로 볼 때 이때부터 1981년 9월 30일 국립중앙도서관 역삼분관이 문을 열 때까지 강남엔 단 하나의 도서관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1981년 8월 ⟪매일경제⟫가 “신흥 주거 지역 영동 일대 문화시설이 없다”는 기사를 통해 1백여 개 유흥업소가 있는 강남에 도서관이 단 하나도 없음을 비판하는 기사를 냈을까.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강남구가 지은 공공도서관은 독립 건물이 아닌 파출소, 문화센터, 상가와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남구 대표 도서관이자 개관 당시 강남구 최대 규모를 자랑한 도곡정보문화도서관 역시 독립 건축물이 아니긴 마찬가지.
2013년 3월 말죽거리에 개관한 도곡정보문화도서관은 공공복합청사의 3층부터 6층까지 4개 층을 사용한다. 3층엔 어린이자료실과 유아자료실, 디지털자료실이 있다. 4층엔 종합자료실과 정기간행물실, 독서문화공간인 책사랑방이 있다. 5층과 6층엔 3개의 열람실이 자리하고 있다. 공공복합청사 1층엔 헬스장과 육아지원센터가 있다. 2층엔 주민센터와 북카페가 있다. 지하 1층엔 생활체육교실과 문화취미교실, 강당이, 지하 2층엔 식당과 매점이 있다. 행정과 문화, 체육, 보육시설이 한 곳에 있는 복합공간이다.
도서관이 반드시 독립 건물로 존재할 이유는 없지만 상당수 도서관이 복합청사에 있는 것도 이채로운 모습인 건 틀림없다.
강남 땅값이 급등한 이후에는 비싼 땅값 때문에 도서관 부지를 확보하기 어려웠다고 치자. 강남 일대가 허허벌판일 때는 왜 도서관 부지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을까? 왕복 10차선 도로와 고속버스터미널, 학교, 종합병원, 경찰서, 소방서, 공원 같은 온갖 편의시설이 들어선 강남 신도시에서 유독 도서관 부지를 찾기 어려운 건 왜일까?
강남 개발의 주체인 서울시가 도서관을 정책적으로 고려하지 않아서일까? 그건 아니다. 강남 개발 직전인 1966년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은 이른바 ‘8∙15 전시’라고 불린 ‘서울도시계획전시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8월 15일부터 한달 동안 시청 광장에 거대하게 설치한 전시장을 통해 서울시는 강북 지역에 9개 도서관을 3년 안에 건립한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일반 도서관 4개, 학생 도서관 3개, 어린이 도서관 2개 건립 계획을 번지 수까지 명시해서 구체적으로 전시했다.
문제는 시민 79만 7천 명이 관람한 서울도시계획전시회의 도서관 건립 계획이 실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울시가 내건 공공도서관 건립 계획 중 현실화된 것은 종로도서관과 동대문도서관 단 2개뿐이다. 게다가 종로도서관은 신축이 아니라 이전이었다. 도서관 건립이 정책적으로 고려되지 않은 게 아니라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 ‘계획’으로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강북은 부지 마련이 어려웠다고 치자. 드넓은 강남을 개발하면서 도서관 부지를 마련하지 않은 건 서울시 도시계획 및 정책 결정권자에게 도서관 건립 의지가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아니 세계 도시개발사에 길이 남을 ‘강남 대개발’에서조차 도서관은 도시기본시설이나 문화시설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도서관을 지을 돈이 부족했던 걸까? 대한민국이 고속도로를 착공하던 1967년 시점의 1인당 국민소득은 겨우 142달러였다. 428km에 달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429억 7천3백만 원이 들었다. 비슷한 시기인 1968년 8월 20일 연건평 1천 평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지어 개관한 종로도서관은 6천6백29만7천 원의 공사비가 들었다. 종로도서관 규모 공공도서관을 648개 지을 돈으로 우린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당시 고속도로 건설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국내외에서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린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경부고속도로를 짓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을 지을 돈이 없었다는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1980년 말에는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이 1,592달러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시점보다 11배 이상 늘었다. 이때도 강남에는 도서관이 단 하나도 없었다.
강남 일대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개발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무질서한 땅을 새롭게 정리해서 도로, 상하수도, 학교, 공원 같은 공공시설과 택지를 만드는 사업이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처음 시행한 이 제도는, 대규모 주거지와 도시 개발 자금 확보가 어려웠던 독일, 일본, 한국 같은 후발 산업국가에서 도시 개발 방법으로 활용해 왔다.
837만 평에 달하는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을 통해서도 도서관 부지는 마련되지 않았다. 반포∙청담∙이수∙압구정∙도곡지구 같은 영동 ‘아파트 지구’ 지정과 도로, 주차장, 녹지공간이라는 ‘3대 공간’ 확충 과정에서도 도서관은 고려되지 않았다.
땅과 돈이 부족했다는 핑계는 대지 말자. 우리는 도서관을 지을 땅과 돈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도서관을 지을 ‘생각’과 ‘의지’가 없었던 거다.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우리에게 ‘도서관’은 무엇이었을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곳?
양택식 시장이 ‘남서울 계획’을 발표하던 1970년 말 서울의 자동차 총 대수는 6만대, 이 중 승용차는 3만4천 대였다. 너비 70미터, 길이 3.6km의 영동대로, 너비 50미터, 길이 6.9km의 강남대로, 너비 50미터, 길이 3km의 도산대로가 이때 계획됐다. 자동차가 많지 않은 그 시절 강남에 10차선 도로를 깔 생각은 해도 도서관을 지을 생각은 아예 없었던 거다. 이런 맥락에서 말죽거리의 잔혹한 이야기는 집 없는 서민뿐 아니라 이 땅의 도서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서관 부지에 대한 인색함이 어디 강남뿐이랴. 드넓은 강남을 개발할 때도 고려되지 않은 도서관이 서울 강북이나 서울보다 인프라가 열악한 타 지역에서 고려되었을까. 먹고살기 바쁜 대한민국에서 도서관은 ‘사치’였을까.
1978년 봄, 강남으로 급히 이사한 현수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1963년을 기준으로 1979년 학동은 1,333배, 압구정동은 875배, 신사동은 1,000배 땅값이 올랐다. 1978년부터 1979년 한 해만 해도 25만원이던 땅값이 학동은 40만원, 압구정동은 35만원, 신사동은 40만원이 되었다. 1963년 평당 300-400원 하던 땅값이 지금은 10만 배 뛰어 평당 3천만원을 넘은 지 오래다. 강남에 뒤늦게 합류한 현수네도 단단히 재미를 봤을 것이다.
말죽거리 이야기는 강남 일부 주민에게는 꿈같은 ‘신화’지만 비강남 지역 대다수 사람과 도서관에는 ‘잔혹사’로 기억될 이야기다. 그런데 궁금하다. 말죽거리의 잔혹한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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