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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서관여행자 Nov 17. 2019

대학 도서관 현판 아래 숨겨진 또 하나의 이름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 출생. 양녕대군 16대손. 11차례 과거 응시와 낙방. 1894년 배재학당 입학. 협성회와 만민공동회, 독립협회에서 활동.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창간에 참여해서 활동.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6년 수감. 미국에서 외교 활동과 유학 생활.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학위,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 취득. 


하와이 이주 후 한인사회와 갈등. 상해에서 독립운동. ‘위임통치’ 청원으로 임시정부 인사와 갈등 일으키다가 불신임받고 탄핵. 해방 이후 맥아더의 주선으로 미군 장교 복장으로 귀국. 좌우합작 반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 


초대 대통령 이승만,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 ⓒ 국가기록원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 갑에 단독 출마해서 무투표 당선. 소집된 국회의원 중 최고령으로 국회의장 선출. 제헌헌법의 내각책임제 초안을 대통령중심제로 수정. 국회의원만의 간접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당선. 43 관련 제주도민 강력 처벌 지시 및 계엄령 선포. 「국가보안법」 제정. 반민특위 해체와 친일파 등용. 학교를 병영화하기 위한 학도호국단 창설. 


북진통일 주장. 한국전쟁 발발 후 한강철교 폭파. 대전과 목포를 거쳐 부산으로 피신. 1951년 자유당 조직. 1952년 부산에서 계엄령과 발췌개헌안 통과로 직선제 통해 대통령 재선.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 휴전 반대와 북진을 고집하자 미국은 이승만 제거 계획Plan Ever-ready을 구상. 


1954년 사사오입 꼼수로 개헌. 1954년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3차 세계대전 촉구하는 연설. 1956년 대통령 3선 당선. 정적 김구와 조봉암 제거.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 발발. 1960년 4월 26일 하야 발표. 5월 29일 하와이행.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90세로 사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약력이다. 최근 도올 김용옥이 한 방송을 통해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말 해 논란이 일기도 했던 이승만, 그는 ‘민족의 태양’인가 ‘거룩한 사기꾼’인가.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사람부터 ‘검은 머리 미국인’으로 비판하는 사람까지,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승만 우상화의 흔적


이승만 생일을 맞아 펼쳐진 매스게임 ⓒ 국가기록원


한때 이승만은 살아있는 우상이었다. 이승만 우상화는 1949년부터 시작된다. 이승만 생일날은 국경일처럼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북한처럼 이승만 초상화가 학교 교실에 내걸릴 뿐 아니라 1953년부터는 지폐에도 그의 초상을 인쇄했다. 


이승만 사진이 얼마나 많이 내걸렸던지, 4∙19 혁명 직후 시인 김수영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시에서 이승만 사진이 내걸려 있는 장소로 동회(동사무소), 시청, 회사, 단체와 협회, 술집, 음식점, 양화점, 책방, 학교, 유치원을 일일이 나열할 정도였다. 김수영의 시처럼 ‘밑씻개’로 써도 충분할 정도로 우남의 사진은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1955년 3월 26일 이승만 80세 탄생을 기념하는 경축식이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자리)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경축식에서 노래 부른 합창단 규모만 1천 명에 달했다. 이 날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이승만 탄생 80주년인 1955년은 ‘쌍팔년도’라고 불린다. 무질서와 무법천지였던 이 해가 단기 4388년이었기 때문이다(1948년 정부 수립 후 우리는 단기 연호를 쓰다가 5.16 군사 쿠데타 이후인 1962년부터 서기를 쓰기 시작한다). 


문화계의 찬양도 이어졌다. 「성북동 비둘기」를 쓴 시인 김광섭은 「우남 선생의 탄신을 맞이하여」라는 헌시에서 그를 “세기의 태양”으로 극찬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찬양하는 「우리 대통령」이라는 찬가도 만들어져 불렸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작사하고 「동심초」, 「산유화」를 만든 김성태가 작곡한 노래다. ‘이승만 찬양가’를 만든 박목월과 김성태는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대통령 찬가」를 새로 짓기도 했다.


우남정, 우남로, 우남공원 


‘우남정’을 시찰하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 국가기록원


1955년 6월에는 경기도 남한산성 수어장대 근처 공터에 이승만 80세 생신을 기념하는 송수탑頌壽塔이 세워졌다. 1956년 3월 3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과 같은 해 8월 15일 남산 조선신궁 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다. 81척(동상만 7미터, 기단까지 25미터) 높이 남산 동상은 당시 돈으로 2억 600만 환(쌀 2만 600여 섬 가격)이 들었다. 80세 생신 축원 의미로 80척을, 여기에 진일보한다는 뜻으로 1척을 더해 81척 동상을 세웠다나. 이 거대한 동상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8월 19일 중장비의 힘을 빌려 철거됐다.  


1959년 9월 15일 서울 뚝섬에 우남 송덕관이 들어서고 이승만 부조와 반신상을 설치했다. 1959년 11월 18일 남산 정상에 이승만 아호를 딴 ‘우남정’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 우상화의 일환으로 경기도 광주와 남한산성을 잇는 도로를 ‘우남로’로, 서울 남산공원과 부산 용두산공원을 ‘우남공원’으로 명명했다.


1961년 개관한 서울시민회관은 3천 석이 넘는 대강당과 350석 소강당을 갖춰, 당시 국내 최대 규모 공연장이었다. 서울시민회관은 1956년 6월 20일 공사를 시작했다. 원래 이름은 ‘우남회관’이었다. 4∙19 혁명을 거치면서 우남회관은 ‘서울시민회관’으로 이름이 바뀐다. 


서울시민회관은 1972년 12월 3일 MBC 10대 가수 청백전 행사 끝 무렵 일어난 대화재로 불타고 만다. 5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이 화재는 대연각 화재(1971년 12월 25일),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1972년 8월 5일)와 함께 1970년대 ‘서울의 3대 화재’로 꼽힌다. 불타버린 서울시민회관 자리에 새롭게 건립한 공연 시설이 ‘세종문화회관’이다. 


‘우남시’가 될 뻔한 서울시


남산 한국자유총연맹 광장에 있는 이승만 동상 ⓒ 백창민


1955년 9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외국인이 서울을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서울’을 대신할 이름을 찾자고 제안했다. 대통령 담화가 발표되자 서울시는 수도의 새 이름을 찾는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서울시가 구성한 ‘수도명칭조사연구위원회’는 국민을 대상으로 우남, 한양, 한경, 한성 등 4개 명칭을 후보로 여론조사를 진행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우남이 1등을 차지했다는 결과를 발표하는데, ‘우남’은 이승만의 호다. 그가 유학을 갔던 미국 수도 워싱턴 D.C.가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것을 염두에 두고 추진한 일은 아닐까. 


우상화를 위해서인지 아부를 위함인지 이승만 측근들은 서울시 이름을 ‘우남시’로 바꾸고자 했다. 다행히(?) 이듬해 서울시의회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이기면서 우남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영미의 지적처럼 북한 김일성 우상화 못지않은 우상화가 남녘 땅에도 펼쳐졌다. 남과 북의 우상화 경쟁은 한반도에 ‘두 개의 태양’이 있다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도서관에 남은 우남의 흔적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 백창민


이승만 이력 중 이채로운 것 중 하나가 ‘감옥 도서관’ 운영이다. 그는 고종 폐위 음모 사건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도서관을 운영했다. 


1902년 12월 25일 벙커 목사가 이승만이 수감된 감옥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종교서적 150여 권을 가지고 왔다. 이를 계기로 감옥 안에 ‘서적실’이 생겼다. 이승만은 여기저기 부탁해서 책을 수집하고, 이렇게 수집된 장서로 감옥에서 도서관을 운영한 모양이다.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탈고한 것도 이때다. 어쩌면 그가 운영한 도서관이 기록으로 남은 우리 ‘교도소 도서관’의 첫 사례가 아닐지. 


도서관에도 이승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대전 우남도서관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이다. 유병우에 따르면 1957년 대전 대흥동 우리들공원에 문을 연 우남도서관은 이승만 탄생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도서관이다. 개관한 지 3년째인 1960년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승만을 기념했던 도서관은 학생들이 던진 돌멩이에 유리창이 모조리 깨진 채 방치되었다고 한다. 


우남도서관이던 이곳은 1961년부터 KBS 대전방송국으로 쓰이다가 1978년에는 대전 중구청 별관으로 쓰였다. 1982년부터 연정국악원으로 쓰이다가 2004년 개인에게 넘어간 후 헐렸다. 


우남기념도서관의 탄생 


승당 임영신 동상 ⓒ 백창민


중앙대학교는 1959년 10월 23일 당시 국내 최대 규모로 개관한 도서관 이름을 ‘우남기념도서관’으로 명명했다. 중앙대학교 도서관이 우남기념도서관으로 이름 지어진 사정은 이렇다. 


중앙대학교는 1916년 설립된 중앙유치원(중앙대학교는 운영 기틀이 마련된 1918년을 학교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으로부터 출발했다. 중앙유치원은 1928년 중앙보육학교로 승격하고 1935년 4월 임영신이 학교를 인수했다. 정동에 있던 중앙보육학교는 1936년 명수대明水臺라고 불린 지금의 흑석동에 학교 부지 1만 1천 평을 구입, 건물을 지어 1938년 이전했다. 


중앙보육학교는 1941년 경성중앙유치원, 1945년 중앙여자전문학교, 1947년 4년제 중앙여자대학을 거쳐, 1948년 남녀 공학으로 전환했다. 이때 학교 이름을 중앙대학으로 바꿨다. 중앙대학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3년 2월 28일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중앙대학교는 1959년 10월 23일 학교 설립자이자 당시 중앙대 총장인 임영신 박사 회갑을 기념하여 지하 1층, 지상 8층, 연건평 4,700평 규모 도서관을 개관했다. 1958년 10월 25일 착공, 1년 만에 개관한 이 도서관은 건축가 차경순이 설계했다. 공사비는 3억 환이 들었다. 임영신 총장 회갑 기념으로 지은 도서관이지만, 임영신 총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심을 길이 현창 하고자 ‘우남기념도서관’이라는 현판을 달아 개관했다.


임영신은 이승만 비서 출신으로 이승만 내각 첫 여성 장관을 역임했다. 그녀는 미국 유학 시절 이승만 박사를 만나 그에게 청혼을 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임영신 박사의 호 승당承堂 또한 이승만 박사의 이름에서 승承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고. 


이승만 초대 내각 중 임영신의 상공부 장관 임명은 자질 부족을 이유로 비판이 많았다. 미 국무성은 그녀가 장관으로 재직하는 한 산업 복구 자금을 제공하지 않을 거라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임영신은 장관 재직 시절 공금 유용 및 횡령, 밀수업체와 적산 중개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1949년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치적 동반자로 오랫동안 함께 한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중앙대학교 도서관이 왜 ‘우남기념도서관’으로 명명되었는지 알 수 있다. 더욱이 도서관을 짓던 1959년은 임영신이 부통령 출마를 준비하던 해다. 다음 해 2월 임영신은 부통령 출마 선언문에서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세기의 영걸이신 이승만 박사를 광복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모시어 오늘 4대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리신 특별하신 은혜요, 은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임영신은 도서관 이름까지 이승만에게 헌정하는 성의를 보이며 부통령 당선을 염원한 모양이다.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1960년 3∙15 부통령 선거에서 임영신은 겨우 9만여 표를 얻는데 그쳤다. 315 선거 후 임영신은 부통령 선거에서 ‘자신이 얻은 표가 너무 적다’라며 315가 ‘부정선거’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의에 죽고 참에 산 이는 누구인가


‘의혈중앙’의 상징, 의혈탑 ⓒ 백창민


우남기념도서관이 문을 연지 불과 반년 만에 4∙19 혁명이 터지고 중앙대생이 6명이나 희생되자, 학생들은 우남기념도서관 현판을 ‘철거’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대학 측과 심한 실랑이가 일자, 타협책으로 ‘우남기념도서관’ 현판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중앙도서관’이라는 새로운 현판을 덧대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도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 현판 아래 우남기념도서관 현판이 남아 있는 사연이다. 당시 우남기념도서관 현판 철거를 주도한 총학생회장 박명수는 훗날 중앙대학교 11대 총장이 된다. 


한편 “의義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校訓을 내건 임영신은 4∙19 혁명으로 수립된 장면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그녀는 「왜 나는 군사혁명을 지지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그녀는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에 이름을 올렸고, 1966년에는 정일권 총리와 김종필 의장에게 중앙대학교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2년 유신 선포 후 대통령을 뽑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겸 운영위원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최초의 여성 장관, 중앙대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 여성 정치인과 교육자로서그녀가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그녀가 이승만 대통령과 ‘의’를 지키며 살았음도 알겠다. 다만 그녀가 추구한 길이 민주공화국 시대 정치인 또는 지식인의 ‘참’된 삶이었을까. 


419 혁명 당시 교문 밖 진출을 만류하는 임영신을 뿌리치고 중앙대생은 한강을 건너 국회의사당과 경무대로 향했다. 419 혁명 과정에서 중앙대는 서울대 다음으로 많은 6명의 희생자를 냈다. 중앙대 도서관 앞 의혈탑6열사비는 ‘의에 죽고 참에 산’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증거물이다. ‘의혈중앙’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우남에게 헌정된 도서관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4.19 혁명 과정에서 그를 몰아내는 선봉에 섰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이승만 시대 도서관


학술정보원 출입구 위에 지금도 남아 있는 ‘중앙도서관’ 현판 ⓒ 백창민 


이승만 시대 문자 해득률은 급격히 높아지고, 학교와 학생은 크게 늘었다. 1945년 22%에 불과했던 문자 해득률은 1959년 78%로 3.5배 가까이 상승했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초등학생 수는 2.6배, 중학생 수는 11배, 고등학생 수는 3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대학은 19개 대학 7,819명에서 63개 대학 9만 7,819명으로 12배 이상 늘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안 되던 시절 이승만 정부는 1948년부터 1960년 사이 총예산 중 연평균 10% 정도를 교육 분야에 썼다. 학교와 학생 수가 크게 늘었지만 교사와 교육 자재, 교실은 부족해서 교육 여건은 좋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작했다. 의무교육으로 성장한 세대가 1960년대와 1970년 ‘한강의 기적’을 이끈 세대가 된다. 1950년대를 거치며 대량으로 탄생한 한글 세대는 거대한 인적 자본을 형성해서 1960년대 이후 노동집약 산업과 중화학공업 노동력의 핵심이 되었다. 


정부 지원과 국민의 뜨거운 교육열이 결합한 결과지만, 이런 업적 때문에 이승만을 ‘교육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박명림 교수는 “이승만의 실정失政과 업적이 4∙19를 불렀다”라고 평가했다. 이승만 시대 교육 투자를 통해 성장한 민주주의 의식이 역설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학교의 양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공공도서관은 눈에 띄게 성장하지 않았다.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전국적으로 24개의 도서관이 늘어나 한 해 평균 2.18개의 도서관이 늘어났을 뿐이다. 


대학 도서관의 사정은 어땠을까. 해방 이후 전문학교의 대학 승격이 추진되고 사립대학 신설이 크게 늘었다. 대다수 사립대학은 등록금에 의존해 재정난을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학생 정원을 늘리고 등록금을 인상했다. 상당수가 농업에 종사하던 이 시절, 소와 밭을 팔아 자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한다는 뜻으로 ‘우골탑’이라는 표현이 회자됐다. 


사립대학이 난립하고 대학의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정부는 1955년 「대학설치기준령」을 공포했다. 건물, 땅, 체육장, 교직원, 도서 5가지 항목이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대학을 통폐합하거나 학생 정원을 감축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립대학의 집단 반발로 「대학설치기준령」은 무력화되지만 이 때문인지 1950년대 후반 중앙대를 비롯한 여러 사립대학이 잇달아 ‘도서관을 짓기 시작한다.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오천석은 「대학교육의 위기」라는 글에서 도서와 실험실 설비 면에서 중고등학교만도 못한 대학이 흔하고 대학의 심장부인 도서관을 제대로 갖춘 대학이 드물다고 지적했다한국전쟁 시기가 끼어 있지만 이승만 집권 시기는 ‘도서관의 암흑기’라 평할 만하다. 


미국 유학을 통해 도서관의 기능과 효과를 잘 알았을 이승만 박사’가 이렇다 할 도서관 정책을 펴지 않은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건이 어려워서 도서관을 지을 겨를이 없었을까.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도서관을 운영한 그가 무소불위의 권좌에 오른 후에는 왜 도서관을 제대로 짓거나 운영하지 않았을까. 비슷한 시기 북한에서 김일성이 도서관을 적극적으로 늘렸음을 고려할 때 두 지도자의 도서관 정책은 대조적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우남 이승만 ⓒ 국가기록원


서중석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닮은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첫째, 이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 둘째,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이라는 관제 정당을 창당해서 정권 유지에 활용했다. 셋째, 사사오입 개헌과 3선 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시도했다. 넷째, 극단적인 반공 정책을 폈고 이를 권력 유지에 활용했다. 


둘의 차이점도 있는데, 첫째, 이승만은 반일 정책을 추구했지만 박정희는 친일 정책을 추구했다. 둘째,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설치, 공작정치를 통해 통치했다. 셋째, 이승만은 부정을 저지르더라도 선거 제도를 유지했는데, 박정희는 유신 선포 후 직선제를 무력화시켰다. 넷째, 박정희는 이승만에 비해 언론과 군을 강력히 통제해서 철권통치를 했다.


유시민은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는 역사적 대의명분, 경제적 효율성, 민주적 정당성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는데, 이승만 정부는 세 가지 중 단 하나도 충족하지 못한 정부라고 평했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분단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그 기초가 놓였다.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절 단독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자유시장 경제와 반공 체제 같은 대한민국의 국가 기본질서가 수립되었다. 그래서 이 중요한 시기 집권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은 크게 남을 수밖에 없다. 


이승만, 그는 국부인가 국적인가


건축가 차경순이 설계하고 김인철 교수가 리모델링한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 ⓒ 백창민


자유당 집권 말기 심산 김창숙은 이승만을 ‘독부’獨夫라 평했다. ‘독부’란 민심을 잃고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외로운 남자라는 뜻이다. 한때 ‘국부’ 아니 ‘세기의 태양’으로까지 추앙받던 우남은 4∙19 혁명 과정에서 ‘국가의 적’이 되었다. 1960년 고국을 떠난 그는 1965년 죽을 때까지 이 땅에 돌아오지 못했다. ‘국부’가 ‘국적’國賊으로 쫓겨나 ‘독부’로 죽은 것이다. 


우남기념도서관 현판 위에 새로운 현판을 세운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은 2009년 김인철 교수에 의해 현대적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2014년 1월에는 ‘학술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59년 전 중앙대생들이 우남을 기린 도서관을 거부한 것처럼 그를 ‘기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 해야 할 이유는 있다. 


국가 수립 단계에서 ‘국부’ 역할을 했어야 할 그가 결국 ‘국적’으로 이 나라를 떠났다는 것, 그것은 이승만 개인의 비극을 넘어 대한민국의 비극이기도 했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 시 구절처럼, 우남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간 뒷모습이 아름다운 대통령이었다면 중앙대학교 도서관은 여전히 그를 기념하는 도서관일지 모른다. 


이승만 집권 시기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우상화의 흔적은 이제 찾기 어렵다. 도서관에 남아 있던 우남의 흔적도 모두 묻히고 사라졌다. 그 많던 우남의 흔적이 사라진 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주소 : 서울시 동작구 흑석로 84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이용시간 : 참고자료실 / 대출자료실 / 미디어실 (평일 09:00 - 21:00, 토요일 09:00 - 15:00), 열람실 / 노트북열람실 (05:00 - 23:00 또는 연중무휴), 시험과 방학기간은 이용시간 변경. 

휴관일 : 참고자료실 / 대출자료실 / 미디어실 : 법정공휴일, 개교기념일, 임시휴관일 (일반 열람실은 연중 무휴)

이용자격 : 중앙대학교 학생 및 교수 

홈페이지 : https://library.cau.ac.kr/

전화 : 02-820-6195

운영기관 :  중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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