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뱅뮤지엄 1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 문화원이 화염에 휩싸였다. 부산 고려신학대(고신대) 학생 김은숙과 이미옥, 부산대학교 최인순, 부산여자대학 김지희는 부산 미 문화원에 들어가 불을 질렀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을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멘트처럼 “누구보다 폭력을 미워해야 할 신학대 학생과 장래가 보장된 의대생과 약대생, 연약한 여대생”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부산 미 문화원에 불을 지른 후 학생들은 근처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 유인물을 뿌렸다. 전두환 정권의 광주 시민 학살을 알리고, 미국의 책임을 묻는 내용이었다. 휘발유 30리터가 갖는 ‘인화력’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이들의 방화로 부산 미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장덕술이 질식해 숨지고 세 명이 다쳤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부미방)를 주도한 고신대 학생 문부식은 신학적 고민으로부터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키워 왔다. 또 다른 주역인 김은숙은 부마민주항쟁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며 박정희의 몰락과 신군부의 등장을 지켜봤다.
문부식은 1981년 9월 김현장과 만남을 통해 광주에서 일어난 참상을 알게 되었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자행한 만행을 알리기 위해 문부식은 고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982년 2월 말 김은숙에게 시민의 이목을 집중시킬 ‘방화’ 형태의 시위를 제안했다. 방화와 유인물 배포 방식의 시위를 구상한 두 사람은 고신대 의대 이미옥, 부산대 약대 최인순과 유승렬, 부산여대 김지희와 함께 시위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 문부식의 지휘 아래 김은숙과 이미옥은 부산 미 문화원 1층 복도에 휘발유를 뿌렸다. 그 휘발유에 문화원 안에 미리 들어가 있던 최인순과 김지희가 불을 붙였다. 방화와 함께 부산 미 문화원은 화염에 휩싸였다. 같은 시간 유승렬은 유나백화점 4층에서, 박원식과 최충언은 국도극장 3층에서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 수백 장 뿌렸다.
사전에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역할 분담이었지만 방화를 직접 실행한 김은숙, 이미옥, 최인숙, 김지희는 모두 여성이다. 당시 3층 규모였던 부산 미 문화원 1층은 문화원의 도서관과 간행물 열람실, 사무실이었다. 미 문화원 2층은 미 대사관 부산 사무소, 3층은 대사관 직원 숙소였다. 이때의 방화로 도서관을 포함한 1층 공간 대부분과 장서 6천 권이 불탔다.
시위 직후 사건이 크게 확대되자 문부식과 김은숙은 3월 21일 지학순 주교가 있는 원주로 피신했다. 원주에 도착한 이들은 천주교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에게 연락했다. 3월 30일 최인순, 이미옥, 최충언을 비롯한 다섯 명의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문부식과 김은숙은 자수를 결심했다. 4월 1일 오후 1시 문부식과 김은숙은 안기부 요원에 신병이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사건의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월 2일 김현장이 검거되었다. 4월 7일에는 원주교구에서 이들을 보호했던 최기식 신부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범인 은닉 혐의로 구속되었다.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천주교 신부까지 구속되고 신군부가 천주교회를 ‘반정부 활동의 온상’으로 공격하자, 종교계를 비롯한 시민사회는 거세게 반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한국교회사회선교사협의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성명서 발표가 이어졌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에 가담한 이들은 알몸으로 고문 수사를 받으며 용공으로 내몰렸다. 재판을 통해 문부식과 김현장은 1심에서 사형을, 김은숙과 이미옥은 무기징역을, 나머지 학생과 최기식 신부는 징역 3-15년을 언도받았다. 확정 및 감형을 통해 1심보다 형량은 낮아졌지만 1심 형량으로 볼 때 당시 신군부가 이 사건을 얼마나 확대해서 대응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이들의 주장과 시위는 ‘충격’이었지만 광주 학살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부미방’은 반미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부미방 주역이 검거된 후 대구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서던 이들의 변호인은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이돈명, 황인철, 홍성우, 김광일, 이홍록과 함께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을 변호한 14인의 변호인 중 한 사람이 노무현이다. 당시 노무현은 35세 청년 변호인이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부산 미 문화원에 앞서 1980년 12월 9일 밤 광주 미 문화원도 불에 탔다. 광주 학살 당시 군부대 이동에 동의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정순철, 임종수, 황일봉, 김동혁, 박시영, 김봉진, 정종렬 7명은 문화원 지붕에 구멍을 뚫고 불을 질렀다. 이 사건으로 사무실에 있던 타자기와 공간 일부가 불타고 20분 만에 진화되었다. 정부 당국은 이 사건을 ‘전기 누전’으로 발표했다.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 정권은 ‘학원 자율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로 해직교수와 시국 사건으로 제적된 학생이 대학으로 돌아왔다. 캠퍼스에 머물던 경찰 병력은 철수했다. 1984년부터는 각 대학에서 학생회가 부활했다. 1985년 4월에는 전국 62개 대학 학생회가 참여하는 ‘전국학생총연합’(의장 김민석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출범하기도 했다.
야권인 신민당은 1985년 2∙12 총선을 통해 1백 석이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신군부의 철권통치 속에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1985년 5월은 5∙18 광주민주항쟁이 5주년을 맞는 해였다. 주요 대학 학생운동 진영은 광주에 대한 이슈를 사회에 널리 확산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광주 학살’이 전두환 신군부의 최대 약점이라 생각한 학생들은 당시 금기시되었던 광주민주항쟁을 전면적으로 알려 정권에 타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그 일환으로 사회적 파장을 크게 일으킬 수 있는 ‘점거 시위’를 계획했다.
이 사건을 주도한 함운경과 홍성영의 회고에 따르면, 1985년 5월 16일 서울대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4개 대학 5월 투쟁위원장이 성균관대학교 학생회관에 모였다. 이 모임을 통해 점거 시위가 논의되었다. 학교 별로 15-20명씩 총 70-80명이 서울 미 문화원 2층을 점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보안 유지를 위해 학생들은 문서를 작성하지 않고 도청에 대비하기 위해 ‘필담’을 통해 계획을 논의했다. 거사 일은 그로부터 6일 후인 5월 22일로 잡혔다.
서울 미국 문화원이 처음부터 점거 농성 장소로 꼽힌 건 왜일까? 시위 지도부는 동맹인 미국의 문화원이 갖는 상징성과 파급 효과,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농성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이곳 말고 다른 시설이 후보로 제안되지 않아 대안이 없기도 했다. 원래 미 문화원 점거 시위는 서울대 공대 학생들이 한 달 이상 자체적으로 준비해왔다. 이 계획을 다른 학교 학생들이 수용하면서 연합 시위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문화원보다 상징성이 높은 ‘미국 대사관’을 목표로 하지 않은 건 왜일까? 서울 미 문화원에서 ‘거사’했던 학생들이 대사관에 접근하기 쉬웠다면 문화원보다 대사관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편이 훨씬 주목을 끌 수 있을 테니까. 실제로 미 문화원 점거 농성 계획 과정에서 미국 대사관이 장소로 논의되기도 했다. 미 대사관이 제외된 이유는 경비가 삼엄하고 진입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문화원에서 ‘도서관’이 아닌 다른 곳을 점거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일었던 모양이다. ‘왜 하필 도서관이냐, 그렇지 않아도 대사관보다 상징성이 떨어지는데 도서관보다 다른 공간을 점거해야 하는 것 아니냐’하는.
여러 논란 속에 결국 미 문화원의 ‘도서관’이 점거 장소로 낙점된 이유는 다음 세 가지라고 한다. 70명이 넘는 학생들이 농성을 벌일 넓은 공간이 도서관 밖에 없고, 미 문화원 도서관은 신분증만 제시하면 누구나 손쉽게 출입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도서관 역시 미 문화원 시설로 치외법권 지역이기 때문이다.
언뜻 ‘도서관’은 탈정치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으로 보이지만, 도서관이 갖는 개방성과 접근성이 도서관을 ‘가장 정치적인 공간’으로 만든 셈이다.
점거 장소가 정해진 후 시위 시간도 정했다. 미 문화원에 진입하는 시간은 낮 12시 5분으로 결정했다. 인적이 드문 미 문화원인지라 그나마 점심시간을 이용하는 게 주변 직장인에 섞여 움직일 수 있고, 이때가 가장 경계가 느슨한 시간이었다고.
문제는 80명 가까운 인원이 눈에 띄지 않고 어떻게 농성 장소에 집결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미 문화원 주변 다섯 개 지점(시청 앞 버스정류장, 대한체육회 건물 앞, 을지로입구역, 롯데백화점, 체이스맨하탄은행 지하 다방)에 학교 별로 흩어져 있다가 12시 5분에 맞춰 집결하기로 했다.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남녀 모두 ‘정장’에 구두 차림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평소 정장 착용을 거의 하지 않는 학생들인지라 이 과정에서 친구 또는 세탁소에서 양복을 빌려 입고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던 모양이다.
시위 지도부는 장소, 시간, 진입 방법, 복장까지 정한 후 거사 전날인 5월 21일 실제 시간에 맞춰 ‘리허설’까지 하며 시위를 최종 점검했다. 계획한 5월 22일이 아닌 5월 23일로 하루 늦춘 건, 시위를 앞두고 주변 경비 병력이 늘어나자 계획이 탄로 난 줄 알고 급히 취소했기 때문이다. 계획이 새지 않았음을 확인한 학생들은 다음날인 5월 23일 계획대로 시위를 결행했다.
1985년 5월 23일 낮 12시 5분 함운경을 비롯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강대 학생 73명은 서울 미국 문화원에 진입했다.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시위,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 미 문화원 ‘도서관’ 점거 농성 사건의 시작이다. 애초 79명으로 계획했던 학생이 73명으로 줄어든 이유는 여섯 명의 서울대생이 ‘길을 잃고’ 미 문화원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미 문화원 2층 도서관에 진입한 학생들은 이용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가 달라고 요청했다. 도서관에서 이용자를 내보낸 후 학생들은 내부 집기로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도로 쪽 창문에 플래카드를 내걸고 “광주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같은 요구를 하며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주한미국대사 면담과 내외신 기자회견을 요구했다. 미 대사관 측이 이를 거절하자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해명, 사과가 있기 전까지 농성을 계속하고, 경찰이 진압할 경우 음독 또는 투신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학생들이 청산가리를 가지고 있다고 협박하긴 했지만 음독할 수 있는 극약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당시 미 문화원 2층 도서관은 도로(을지로) 쪽 창문이 열리지 않는 통유리 구조였다고 한다. 전화가 끊긴 후 학생들은 글을 써서 필담으로 주장을 전하다가, 창문이 열리는 건물 뒤편 화장실 창문에 매달려 기자들에게 주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학생들 메시지 중 눈에 띄었던 부분은 “우리는 ‘반미’反美가 아니다”라는 문구였다. 광주 학살을 이슈화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반미가 부각되는 걸 피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당시 학생 운동권의 의식 수준이 반미 투쟁까지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농성 이틀째 아침에는 미 문화원 도서관장 래빈, 미국 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던롭과 공식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학생들은 광주민주항쟁 과정에서 20사단의 이동을 승인한 미국의 책임과 개입에 대해 캐물었다. 미국 측은 ‘승인’을 ‘인정’했지만 그 이후 사태는 미국이 책임질 부분이 아니라는 답변을 반복했다. 학생과 미국 측 대화는 3차, 4차에 걸쳐 계속 이어졌다. 미국 측은 광주라는 ‘한국 내부’ 문제를 들고 온 학생들을 모양새 좋게 내보내고자 했다. 학생들은 미국의 대화 분위기를 이용해 농성을 최대한 이어가며 파장을 키우려 했다.
점거 시위와 단식 농성이 사흘 째로 접어들자 학생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일부 학생은 탈진해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결국 학생들은 5월 26일 정오에 맞춰 72시간 점거 농성을 풀고 자진 해산하기로 했다. 26일 오전 11시 함운경과 이정훈이 「우리는 왜 미 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나」 성명서를 읽는 것으로 농성을 마쳤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앞세우며 미 문화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