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
건축가 김중업金重業은 1922년 3월 9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 경림소학교를 거쳐 1939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41년 12월 일본 요코하마橫濱고등공업학교(현 요코하마국립대학)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1942년 1월부터 3년 동안 일본에서 가장 큰 마쓰다松田-히라다平田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1942년에는 김병례와 결혼했다.
해방 직전인 1944년 김중업은 귀국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중업은 해방 직후 ‘공산청년동맹’과 ‘북조선건축연맹’ 창설에 관여했다. 북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그는 김일성에 대해 반감을 느낀 후 월남,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조교수로 일했다.
한국전쟁 때 부산에 머물던 김중업은 1952년 9월 유네스코 주최로 열린 베니스 세계예술가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of Artists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 베니스에서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세계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만났다.
베니스 대회가 끝난 후 김중업은 파리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 아뜰리에로 ‘막무가내’ 찾아갔고, 테스트를 거쳐 1952년 10월 25일부터 1955년 12월 25일까지 그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 시절을 거치면서 김중업은 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성장했다.
1956년 2월 말 귀국한 그는 3월 5일부터 종로구 관훈동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면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가 된 것도 이 해다. 1959년 등장한 김수근과 함께 김중업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활동했다.
김중업은 『명보극장』(1956), 『부산대학교 본관 및 정문』(1958), 『서강대학교 본관』(1958), 『유유산업 공장』(1959) 같은 초기 작품을 필두로, 1962년에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선보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은 김수근의 『공간 사옥』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정인하 교수는 김중업의 『주한프랑스대사관』을 ‘한국 건축사의 고전’으로 꼽았다. ‘동시대 서구 건축을 수용하면서 한국적 정서를 가장 뛰어나게 표출하고, 한국 전통 건축의 지붕을 현대적 이미지로 승화시키면서, 독특한 시적 울림을 주는 건축물’이라는 점이 그 이유다.
이후 김중업은 『유엔묘지 채플』(1963), 『제주대학교 본관』(1964), 『서산부인과 병원』(1965), 『부산 UN묘지 정문』(1966), 『국제화재해상보험회사 사옥』(1968), 『삼일로빌딩』(1969, 현 삼일빌딩)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70년 완공된 31층짜리 『삼일로빌딩』은 롯데호텔이 완공된 1979년 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삼일로빌딩』은 3∙1 만세운동을 기리는 뜻을 담아 1970년 3월 1일 문을 연다).
건축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그는 와우아파트 붕괴, 청계천 주민 성남 강제 이주(광주대단지 사건) 같은 박정희 정권의 무분별한 개발정책을 비판했다. 정부 비판으로 김중업은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1971년 11월 가족을 두고 해외로 추방 당했다. 이전에도 그는 5∙16 쿠데타 과정에서 육사 생도의 관제 데모와 정부가 추진한 애국선열상 건립 계획, 대통령 측근의 동빙고동 호화주택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5∙16 쿠데타 직후 육사 생도가 군사혁명 지지 시위를 하자 김중업은 “지금이 어느 땐데 관제 데모냐”라고 말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와우아파트는 붕괴 사고 전부터 언론을 통해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박정희 측근이 동빙고동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호화주택을 짓자, ‘로마 말기 현상’에 비유하며 언론에 글을 썼다.
이 과정에서 김중업은 중앙정보부와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김중업이 얼마나 소신 있는 건축가이자 지식인인지 알 수 있는 일화다. 『삼일로빌딩』 설계비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보복성 세무 조사를 받자 김중업은 성북동 집까지 처분해야 했다. 7년에 걸친 해외 망명 기간 동안 김중업은 건축가로서 국내에서 쌓은 기반을 잃었다.
서슬 퍼런 군사 정권 하에서 그는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사회참여형 건축가’였다. 김수근을 포함한 동시대 다른 건축가와 김중업의 도드라진 차이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김중업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78년 11월 귀국해서 1988년 5월 11일 6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교육개발원 신관』(1979), 『육군박물관』(1982), 『진주 문화회관』(1982), 『중소기업은행 본점』(1983), 『목포 문화방송국』(1984), 『올림픽공원 조형물』(1985), 『광주 문화방송국』(1986) 같은 작품을 남겼다.
김중업 초기 작품 중에 『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이 있다.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라고는 하나 ‘도서관’을 소개하는 글에서 뜬금없이 대학교 언어교육원을 소개하나 싶겠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챘겠지만 이 건물은 원래 도서관으로 지어 30년 가까이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쓰였다. 『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은 김중업이라는 거장이 설계한 도서관 중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이다.
김중업은 『제주대학교 본관』 2층을 도서관 공간으로, 제주대학교 서귀포 캠퍼스 『이농학부 도서관』을 설계한 바 있지만 안타깝게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김중업 작품 목록에 『이화여대 도서관』(1956), 『경주시립도서관』(1959), 『대구대학 도서관』(1961)이 있지만 세 도서관은 실제 지어지지 않고 계획안에 그쳤다.
『김중업 건축론』을 펴낸 정인하 교수는 김중업의 작품 세계를 그의 대표작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전후로 구분한다. 그리고 김중업이 프랑스에서 귀국한 직후인 1956년부터 1961년까지를 르 코르뷔지에 건축을 모방하고 변용하는 시기로 파악했다. 건축가 김중업은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을 ‘모방과 변용’의 시기인 1956년 설계했다.
지상 4층,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이 건물은 1957년 공사를 시작, 1958년에 준공했다. 1976년에는 열람실을 증축했다. Y자 모양 평면을 지닌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외관도 독특하지만 내부는 더욱 특이한 구조다. 내부에 가파르지 않은 경사로가 있어서 장애를 가진 사람도 쉽게 건물을 이용할 수 있다. 건물 중앙엔 원형 계단이 자리해서 층간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건물 평면뿐 아니라 건물 외부와 내부 기둥도 Y자 기둥을 사용해서 통일성을 추구하되 단조롭지 않은 느낌을 준다. Y자 형태 건물 외관은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이 지어진 부지는 건국대학교 서울 캠퍼스 중심부에 해당하는 언덕이다. 이 언덕은 세 갈래 방향으로 능선이 흘러내리는데, 김중업은 능선에 따라 Y자 형태 도서관을 앉혀 캠퍼스의 랜드마크로 삼으려 했다.
Y자 형태 건물 중심부엔 원형 지붕을 얹었다. 김중업은 원래 이 원형 지붕 아래에 천장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 서고를 설치하고, 서고를 중심으로 세 방향으로 열람실을 배치하려 했다.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은 김중업의 설계도면과 상당히 다르게 시공되는데, 건축주인 학교와 이견 그리고 1950년대 시공 수준이 따라가지 못해 시공 과정에서 바뀐 부분이 있는 걸로 보인다.
김중업이 설계한 이 건물은 1961년부터 1989년 5월 상허기념도서관 개관 때까지 28년 동안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쓰였다. 도서관으로 사용하던 시절 모습이 궁금할 정도로 멋진 건물이다.
김중업이라는 거장의 작품으로 기억될 이 건물이 뜻하지 않게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바로 ‘건대사태’, ‘애학투련’ 사건으로 알려진 ‘10∙28 건대항쟁’ 때문이다.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 정권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를 통해 100명 가까운 해직 교수와 1,300여 명의 제적 학생이 학교로 돌아왔다. 캠퍼스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도 철수했다. 학원자율화 조치 발표 후 1984년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1985년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이 탄생하는 등 학생운동은 활기를 찾았다. 활기를 찾긴 했지만 이 시기 학생운동은 몇몇 대학이 주도하고 비밀 지하조직 형태로 운영되는 한계를 지녔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27개 대학 2천여 명 학생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을 출범시켰다. 애학투련은 노선과 조직이 흩어져 있는 학생운동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만들었다.
애학투련 출범 장소로 건국대학교를 결정한 이유는 뭘까? 애초 집회를 하려 한 연세대를 경찰이 사전에 막았고, 건국대 캠퍼스가 평지면서 출입구가 많아 외부 학생이 쉽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전두환 정권은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직선제를 지지하는 민심이 크게 일자, 반대 세력을 뿌리 뽑고 정권을 연장하려 했다. 박철언이 증언한 것처럼 전두환은 국회 해산과 비상계엄령을 포함한 ‘친위 쿠데타’를 구상했다.
1986년 5∙3 인천사태 때부터 공안정국으로 전환한 전두환 정권은 건국대 집회를 학생운동 일망타진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일본 학생운동의 전환점이 된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건처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당국은 대학생 집회를 사전에 봉쇄하곤 했는데, 행사 당일 건국대에는 전투경찰을 대규모로 배치했을 뿐 검문검색을 하지 않았다.
10월 28일 오후 애학투련 결성식이 끝나자마자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강제 몰이를 시작했다. 진압을 피해 학생들은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현 언어교육원), 대학본관(현 행정관), 사회과학관(현 경영관), 학생회관, 교양학관(현 법학관) 5개 건물로 흩어졌다. 건국대의 경찰 철수 요청과 시위 학생 측의 자진 해산 요구를 경찰은 거부했다. 경찰의 ‘계획된’ 진압으로 ‘계획에 없던’ 3박 4일간의 점거 농성이 시작되었다. 농성 학생의 30%인 465명은 여학생이었다.
여러 건물에 시위대를 강제 몰이한 경찰은 전기와 물을 끊고, 언론을 통해 ‘공산혁명분자의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라며 시위 학생을 용공세력으로 몰아갔다. 첫눈까지 내린 때 이른 추위 속에 ‘사흘 밤 나흘 낮’에 걸쳐 점거 농성은 이어졌지만, 10월 31일 아침 경찰은 강제 진압을 시작했다.
학생 시위 진압 과정에 최초로 ‘헬기’를 동원하고, 소방차 30대, 연인원 18,900명의 전투경찰을 진압에 투입했다(‘황소 30’이라는 작전명으로 건대 시위 진압을 지휘한 경찰 책임자는, 박종철 군 사망 발표 때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말을 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학생 53명이 부상과 화상을 입었고, 모든 시위 학생이 연행되었다. 학생 농성과 경찰 진압 과정에서 건국대는 23억 5천만 원의 손실을 입었다.
경찰은 연행 학생 1,525명 중 무려 1,288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구속했다. 한국 학생운동사상 최대 공안사건이며, 해방 이후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구속자를 낸 사건이다. 최다 인원 농성, 최악의 진압 방식, 최대 구속자를 낸 건대항쟁은 세계 학생운동사에서도 드문 사건이다. 사건 직후 정부와 언론은 ‘공산분자들이 뿌리 뽑혀 더 이상 캠퍼스에서의 소요는 없을 것’이라며 학생운동의 종말과 학원의 안정을 단언했다.
3박 4일간 농성이 있던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현 언어교육원)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중앙도서관으로 피신한 150여 명의 학생은 경찰 진입을 막기 위해 도서관에 있던 책상과 의자, 목록함을 바리케이드로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도서관의 소중한 자산인 목록 훼손을 피하기 위해 목록함 서랍을 따로 빼서 안전한 장소에 따로 보관했다. 당시 도서관에는 40만 권의 장서가 있었는데, 경찰과 대치 과정에서 농성 학생은 도서관 장서를 훼손하거나 불태우지 않았다. 건국대 도서관 장서가 ‘분서’焚書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다.
시위와 상관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건국대 학생 중 상당수가 도서관과 다른 학교 학생을 지키기 위해 함께 남았다. 도서관 농성 학생들은 돈을 모아 자판기에서 컵라면과 초코파이를 뽑고 옥상 물탱크에 있던 물로 굶주림과 목마름을 달래며 버텼다. 도서관 옥상에서 돌에 줄을 매달아 대학본관으로 던져 건물 사이를 연결, 도서관에 있던 먹을거리를 본관 시위대와 나누기도 했다. 농성하던 학생은 도서관에 이런 벽서를 남겼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은 10월 31일 아침 9시 경찰이 가장 먼저 진압을 시작한 곳이다. 당시 도서관에는 사회과학관과 대학본관 다음으로 농성 학생이 많았다. 경찰이 동원한 헬기 2대가 사과탄과 소이탄을 터뜨리고 고가 사다리차로 최루액을 뿌리면서 전투경찰의 진압이 이뤄졌다. 경찰의 진압으로 도서관에 있던 시위 학생은 전원 연행되었다.
농성과 진압 과정에서 도서관 유리창이 200장 넘게 깨지고 서가가 쓰러지면서 일부 장서가 훼손되기도 했다. 도서관의 핵심인 장서가 불타진 않았으나 건물 곳곳이 파손되는 걸 피할 순 없었다.
66시간 50분 동안 이어진 점거 농성과 헬기까지 동원된 진압으로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군사정부 시절 경찰이 도서관에 상주하거나 도서관에서 학생을 강제 연행한 일은 드물지 않았으나 ‘헬기’까지 동원,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진압이 도서관과 캠퍼스에서 펼쳐진 건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다사다난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지성의 전당이자 ‘대학의 심장’인 대학도서관이 경찰 진압에 의해 초토화된 사건은 10∙28 건대항쟁과 1989년 5월 3일에 일어난 부산 동의대 사건이 유이唯二할 것이다.
전두환 정권 의도대로 학생운동 세력은 ‘일망타진’되지만, 10∙28 건대항쟁은 의도치 않게 학생운동이 대중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대규모 검거로 지하 서클 위주로 활동하던 학생이 대거 구속되자, 학생운동은 학생회 중심의 대중노선으로 전환했다.
일망타진으로 인한 정권의 자신감이 지나쳤던 걸까. 10∙28 건대항쟁으로부터 75일 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고,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건대항쟁이 끝나고 7개월 후 우리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맞았다.
『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은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중업이 설계한, 흔치 않은 도서관이다. 인권은 물론 생명까지 앗아가는 군사정부 시절 그의 도서관도 큰 시련을 겪지만 반세기 넘게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사회적 발언을 이어간 현실 참여형 건축가의 작품이기 때문일까. 그가 설계한 ‘도서관’은 한국 현대사 뜨거운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주소 : 서울시 광진구 능동로 120 건국대학교 내
이용시간 : 평일 09:00 - 21:00
휴관일 : 매주 주말
이용자격 : 일반 시민에게 개방
홈페이지 : https://kfli.konkuk.ac.kr
전화 : 02-450-3075-6
운영기관 : 건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