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운정과 삼청공원숲속도서관 2
윤익선의 취운정 경성도서관은 여러 사람과 단체의 후원을 받아 개관했다. 이중에 눈에 띄는 후원자가 있다. 바로 ‘천도교’다.
기록에 의하면 경성도서관은 윤양구가 2천 원, 윤익선과 천도교 중앙총부, 김장환이 각각 1천 원, 그밖에 여러 독지가의 기부를 받아 문을 열었다. 취운정 경성도서관의 고액 기부자 중 윤익선과 천도교 중앙총부의 기부금을 합하면, 경성도서관 초기 자금의 40%를 천도교에서 지원한 셈이다.
천도교는 왜 취운정 경성도서관을 지원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도서관에 뜻을 둔 윤익선이 몇몇 후원자와 함께 경성도서관을 개관했다는 식으로 생각해왔다. 이 부분을 달리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익선은 ‘천도교도’였고 천도교 안에서 위상도 높았다.
일제 강점기 천도교의 교세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했고, 천도교는 3∙1만세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한 집단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도가 15명이고,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중 가장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 천도교 교주 손병희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3∙1만세운동 과정에서 일제에 붙잡혀 검사에게 송치된 19,525명 중 천도교도는 2,283명으로 11.7%를 차지했다.
천도교는 1910년 이용익이 세운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인수하고, 1911년 윤익선을 교장으로 임명했다. 윤익선은 1919년 천도교를 중심으로 발표된 「조선민국임시정부 조직 포고문」에 법무경法務卿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3∙1만세운동 당시 윤익선을 발행인으로 배포한 ⟪조선독립신문⟫도 천도교가 주도적으로 발행한 ‘지하신문’이다. 이로 인해 윤익선은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출소했다.
1920년 9월에 출소한 윤익선은 11월 취운정 경성도서관을 개관하고, 천도교 연합회파의 멤버로 활동했다. 3∙1만세운동 후 천도교는 교권과 운동 노선 차이에 따라 신파, 구파, 연합회파, 육임파로 나뉘는데, 윤익선은 연합회파의 주요 멤버였다. 윤익선이 교장을 맡은 동흥중학교도 천도교가 북간도 포교 활동을 위해 세운 학교다.
천도교는 ⟪개벽⟫과 ⟪별건곤⟫, ⟪어린이⟫, ⟪신여성⟫, ⟪학생⟫, ⟪조선농민⟫ 같은 잡지를 발행하고,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비롯한 출판사와 인쇄소를 여럿 운영했다. 천도교는 문화 운동뿐 아니라 소파 방정환과 소춘 김기전을 중심으로 어린이 운동과 여성 인권 운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윤익선과 천도교의 활동을 감안하면, 그가 나서서 개관한 취운정 경성도서관도 천도교의 ‘문화 운동’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취운정 경성도서관은 윤익선이 간도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으로 통합된다. 흡수되긴 하지만 윤익선의 취운정 경성도서관이 ‘조선인이 개관한 최초의 도서관’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
근대 도서관을 처음 소개한 책을 쓴 장소에서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도서관이 문을 연 것이다. 이렇게 보면 취운정은 한국 도서관 역사에서 유서 깊은 곳이다.
안타까운 건 도서관 선구자 윤익선이 이후 ‘대동일진회’를 비롯한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가 창씨개명한 이름은 히라누마 에이치平沼榮一. 윤익선은 ‘독립유공자’로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가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2010년 서훈이 취소된 후 이장했다. 도올 김용옥은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는데, 윤익선이야말로 국립묘지에서 ‘파내어진 사례’다.
기록(『조선총독부 직원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인 ‘최초의 사서’는 이긍종이다. 미야무라 훈宮村薰으로 창씨개명한 이긍종과 조선인 최초 도서관장인 윤익선과 이범승이 ‘친일파’로 활동했다는 것은 따로 다룬 바 있다.
이범승이 운영한 경성도서관에 1만 원이라는 거금을 쾌척, 2층 규모의 석조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한 최초의 도서관 거액 후원자, 민영휘도 대표적인 탐관오리이자 친일파다. 이 땅에서 ‘도서관’ 명칭을 처음 사용한 ‘대한도서관’ 설립은 이완용, 민영기, 이재극이 주도했다. 심지어 이들은 ‘친일파’를 넘어 ‘매국노’ 아닌가.
‘도서관학’(지금의 문헌정보학)은 어떨까. 우리 대학에 도서관학과가 설치된 건 한국전쟁 이후다. 도서관학을 최초로 전공한 사람은 일제 강점기 해외 유학파 중에 찾아야 하는데, 이묘묵이 유력한 후보다.
이묘묵은 1926년 시라큐스대학에서 도서관학 석사 학위를 받은 걸로 알려져 있고, 연희전문에서 교수와 도서관장을 지냈다. 그는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후 사상전향성명서를 발표했다. 전향 이후 이묘묵은 대동민우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같은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이묘묵은 리큐 보모쿠李宮卯默로 창씨개명하고 ‘미영美英을 격멸하자’며 시국강연을 다녔다. 미국 유학을 통해 닦은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특별보좌관으로, 초대 주영대사로 승승장구한 이묘묵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묘묵은 해방 정국에서 미군정을 등에 업은 ‘통역 정치’의 폐혜를 얘기할 때 늘 거론되는 인물이다.
연희전문 교수를 거쳐, 연희대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 2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백낙준은 피바디대학 스위거Swiger 여사를 통해 1957년 연세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도서관학과’(지금의 문헌정보학과)를 설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백낙준은 도서관학으로 학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미국 유학 시절 도서관학을 이수하고 도서관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낙준의 창씨개명 이름은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 백낙준 역시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태평양전쟁을 “위대하고 숭고하고 찬란한 전쟁”으로 찬양한 백낙준은 ‘종교보국’을 내세우며 전투기를 헌납하는 등 기독교와 학계에서 친일에 앞장 선 인물이다. 백낙준은 『친일인명사전』에 함께 등재된 이병도와 1968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한 것이다. 공교롭게 이병도는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던 시기에 제9대 한국도서관협회장(1967년-69년)을 맡기도 했다.
백낙준은 지금도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고, 연세대학교 도서관(학술정보원) 앞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연세대학교는 그를 기리기 위해 한동안 도서관 이름을 백낙준의 아호를 따 ‘용재관’庸齋館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화여자대학교가 김활란을 기려 도서관 이름을 ‘헬렌관’으로 명명했던 것처럼.
최초의 조선인 사서 이긍종, 조선인 최초 도서관장인 윤익선과 이범승, 최초의 도서관 거액 후원자 민영휘, 도서관 명칭을 처음 사용한 대한도서관 설립자 이완용, 민영기, 이재극, 최초의 도서관학 전공자인 이묘묵, 도서관학과를 국내 대학에 최초로 설치하는데 기여한 백낙준까지, 도서관 선구자들이 하나같이 ‘친일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남긴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세상살이의 진실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우리는 늘 우울해진다”라고 말했다. 도서관 선구자의 ‘친일 행적’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우리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자세로 그들의 일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 취운정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이 ‘갑신정변’을 모의한 곳이기도 하다. 갑신정변의 주역은 이 일대에 모여 살았는데, 취운정에서 ‘거사’를 모의했던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취운정을 갑신정변 ‘거사 장소’로도 고려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 주역은 우정총국 연회에서 정적을 살해하는 방법, 청나라 자객을 가장해서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 취운정에 있는 홍영식의 백록동 정자에서 잔치를 열어 정적을 죽이는 방법을 구상했다. 상황이 바뀌면서 거사 장소가 우정총국으로 바뀌지만 취운정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장소로 역사에 기록될 뻔 했다.
취운정은 숲이 우거지고 맑은 샘이 솟는 정원이 있어서 문인과 지사가 자주 찾던 곳이다. 활을 쏠 수 있어서 의친왕 이강이 이곳을 찾아 활을 쐈다는 기사도 남아 있다. 1909년 2월 5일 나철은 취운정 아래 초가집에서 훗날 ‘대종교’라 불리는 단군교의 포명서를 공포했다. 천도교 역시 천일기념식처럼 수천 명이 모이는 행사를 할 때 취운정을 이용했다. 6∙10만세운동을 논의한 장소로도 알려진 취운정은 우리 역사에서 꽤 의미 있는 공간이다.
『서유견문』을 통해 근대 도서관을 처음 소개한 유길준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유길준이 1889년 집필을 끝낸 『서유견문』은 1895년에야 출간되었다.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일본 출판사 코준샤交詢社를 통해 발간했다.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갑오개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유길준은 1896년 아관파천 때 일본으로 망명했다. 유길준은 일본에 11년 동안 머물다가 1907년 귀국했다. 일본 망명 기간 동안 그는 일본사관학교 출신 사관들과 함께 고종과 황태자를 폐위하는 쿠데타를 계획하기도 했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유길준에게 남작 작위와 합방 은사금(매국 공채) 2만 5천 원을 수여했다. 유길준은 작위는 받지 않고 은사금만 받았다. 작위까지 받았다면 유길준은 훗날 친일파로 지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유길준이 친일과 반일의 경계에 선 인물이라는 평이 여기서 나온다. 말년에 그는 교육계몽 활동에 몰두했다. 모든 국민을 선비로 만들어[國民皆士]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생각으로 1910년 ‘흥사단’興士團을 발족했다.
유길준의 아들 중 첫째가 유만겸, 둘째가 유억겸이다. 유억겸은 미군정 하에서 문교부장을 맡아 일하다가 1947년 11월 8일 뇌출혈로 숨졌다. 유억겸과 그 후임인 오천석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교육 제도의 큰 틀이 놓였다. 연세대학교는 연희전문 교수와 제5대 교장으로 일한 그를 기려 1963년 8월 지은 교육관을 ‘유억겸기념관’으로 봉헌했다. 도쿄제국대학을 나온 유길준의 두 아들, 유만겸과 유억겸은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형제가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취운정에서 가까운 ‘삼청동’三淸洞은 조선시대부터 도성 안에서 경치 좋은 곳으로 손꼽혀 왔다. 성현은 『용재총화』傭齋叢話에서 한양도성 내 경치 좋은 다섯 곳(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 중 삼청을 으뜸으로 꼽았다. 정조 역시 「국도팔영」國道八詠에서 한양의 여덟 명소 중 하나로 ‘삼청녹음’三淸綠陰을 꼽았다.
삼청동 이름에 대해서는 도교의 삼청을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어 유래했다는 설, 사람[山淸], 물[水淸], 사람[人淸] 세 가지가 맑아 ‘삼청’三淸이라는 설이 있다. 조선 초기 이곳에는 도교 사원인 삼청궁이 있었다. 삼청궁은 원시천존, 태상도군, 태상노군을 ‘삼청’으로 모셨다. 임진왜란 이후 삼청궁은 사라지고 지명만 남았다.
경치 좋기로 손꼽힌 삼청동의 옛 풍경은 일제 시대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많이 사라졌다. 그나마 삼청동이 녹음을 유지한 건 이곳이 1934년부터 삼림공원으로 관리되었기 때문이다.
1940년 일제는 140개 도시계획 공원을 지정했다. 그 중 삼청공원은 ‘제1호 도시공원’으로 지정됐다. 도시공원 지정 후 경성부는 삼청공원으로 이어지는 순환도로와 산책로, 정자, 벤치, 풀장을 설치했다.
‘삼청’이라는 이름이 우리 현대사에 불쑥 등장한 계기는 ‘삼청교육대’ 때문이다. 삼청교육대는 전두환 신군부의 허화평, 허문도와 함께 ‘삼허’三許로 꼽힌 허삼수의 제안으로 출범했다. 삼청교육이라는 이름은 허삼수가 간사였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가 삼청동에 사무실을 두고 「삼청계획 5호」를 계획한 것에서 유래했다.
신군부는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6만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3천여 명이 구속되고 3만 9천여 명이 삼청교육대로 넘겨졌다.
삼청교육대의 문제점은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권 장악을 위한 공포 분위기 조성과 정치 보복의 목적이 더 컸다는 데 있다. 경찰서 별로 강제 할당을 했기 때문에 무고한 시민, 민주화 운동가가 끌려간 경우가 많았다. 교육대에 입소한 사람들은 새벽부터 구보, 군사훈련을 받았고, 욕설, 구타,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삼청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 ‘삼청교육 순화교육 이수자’라는 문구가 주민등록등초본 상단에 찍혀 불이익을 받았다. 불이익뿐 아니라 이사할 때마다 동사무소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대에 대한 통계를 발표했다. 6만 755명이 검거되어 이중 4만 347명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교육 과정과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339명이고, 불구가 된 사람은 2천 7백 명이었다. 삼청동이 현대사에 악명을 떨친 삼청교육대와 의도치 않은 ‘인연’을 맺은 사연이다.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에 있던 취운정은 근대 도서관의 ‘발상지’라 할 수 있지만, 1920년대 이후 도서관의 명맥이 이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도서관과 인연이 없던 이 곳에 2013년 10월 5일 도서관이 탄생했다. 삼청공원 안에 ‘숲 속 도서관’이 문을 연 것이다.
원래 이 자리는 낡은 매점이 있던 곳이다. 종로구는 매점이 있던 자리를 북카페형 도서관으로 리모델링했다. 리모델링 작업은 ‘윤동주문학관’으로 유명해진 건축가 이소진이 담당했다. 이소진이 작업한 건축물 중 ‘책’에 관한 것만 추려보면, 서울 대청중학교 북카페(2010), 부산 신선초등학교 북카페(2011), 윤동주문학관(2011), 배봉산숲속도서관(2018)이 있다. 삼청공원 안 공중화장실(2014)도 이소진 작품이다.
이소진은 작은 규모의 공공건축 분야에서 주목할 성과를 쌓고 있는 건축가다. 공공건축에 주력하는 이유에 대해 그녀는 ‘주인이 없으면서 모두가 주인인 공간에서 집합적 희망을 찾아내는 과정이 즐겁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건축가가 꼽는 인상 깊은 도서관은 어디일까. 소설가 한은형과 인터뷰에서 이소진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로렌초도서관, 한스 샤룬이 설계한 베를린 국립도서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파리 국립도서관을 인상적인 도서관으로 꼽은 바 있다.
이소진은 그 자체로 완결적인 건축이 아니라 ‘사용자가 건축물을 이용함으로써 완성되는 건축’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건축관을 떠올리면서 삼청공원숲속도서관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건축가의 의도가 맞다면 삼청공원숲속도서관을 찾고 이용하는 당신이 있기에 도서관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삼청공원숲속도서관은 『아날로그의 반격』을 쓴 데이비드 색스David Sax가 2018년 12월 7일 자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 ‘혁신의 미래’로 소개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데이비드 색스는 첨단 기술로 가득한 서울이라는 현대 도시에서 숲과 책이 어우러진 힐링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 중심의 혁신 사례’라며 찬사를 보냈다.
삼청공원숲속도서관 1층 가운데에는 카페 공간이 있고 주변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발을 벗고 안쪽에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숲으로 창이 난 열람실이 있다. 북카페형 도서관인 데다가 규모가 크지 않아 소장하고 있는 책은 7,300여 권. 하지만 도서관에서 차를 마시며 함께 누리는 숲의 풍경과 내음은 어느 도서관에서도 맛보기 힘든 체험이다. 책을 펼쳐 들어도 창 밖의 숲과 나무로 시선이 간다.
책은 숲의 나무를 베어 만든다. 그런 이유로 도서관 이름에 ‘숲’이 들어간 도서관이 제법 있지만, 실제로 ‘숲 속’에 있는 도서관을 만나기는 어렵다. 나무로 가득 찬 숲에 도서관 같은 공공건축물을 짓는 자체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런 점에서 삼청공원숲속도서관은 이름에 걸맞은 ‘숲 속 도서관’이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숲과 나무와 책이 어우러진 ‘책의 집’이다.
삼청공원에서 가까운 취운정 일대는 근대 도서관을 처음 소개한 책이 쓰이고,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도서관이 문을 연 곳이다. 취운정에서 가까운 이 곳에 책과 숲이 공존하는 도서관이 탄생한 건 다행이다. 북촌의 명소가 된 삼청동에 들릴 때는 도심 숲 속에 자리한 ‘도서관’에 들려보시기를. 그리고 도서관을 위해 분투했던 ‘최초의 도서관인들’을 떠올려 보시기를.
주소 :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134-3(삼청공원 내)
이용시간 : 평일 10:00 - 18: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 연휴, 추석 연휴.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시 소재 직장인 또는 학생, 외국인등록증 및 거소증 소지자,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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