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운정과 삼청공원숲속도서관 1
‘도서관’圖書館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였을까? 동양에서는 1877년 도쿄대학 법리문학부에서 도서관 명칭을 사용하고, 1880년 7월 ‘도쿄부 서적관’을 ‘국립 도쿄도서관’으로 개칭하면서 ‘도서관’이 쓰이기 시작했다. 동양에서 일본이 가장 빨리 근대화를 이루면서 근대 문물에 대한 ‘작명권’을 일본이 행사했다는 것은 언급한 바 있다.
박상균 교수는 ‘도쿄대학 법리문학부 도서관’을 동양에서 ‘도서관’ 명칭을 사용한 첫 사례로 추정하고 있다. 1877년 이전만 해도 일본은 문고, 서적관, 서적실, 집서원, 종람장, 종람소 같은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했다.
일본에서 ‘도서관’으로 명칭이 통일되기 시작한 건 1897년 「제국도서관 관제」와 1899년 11월 11일 「도서관령」을 공포하면서부터다. 일본이 도서관을 법률에 명시한 건 1879년 「교육령」이 처음인데, 이때는 ‘도서관’이 아닌 ‘서적관’書籍館으로 표기했다.
책을 중심에 놓고 보면 ‘서적관’이라는 말이 ‘라이브러리’library 번역어로 어울려 보이는데, 그림[圖]과 책[書]을 아우르는 ‘도서관’으로 명칭이 통일된 이유는 뭘까? 당시 일본에서는 ‘도서관’보다 ‘서적관’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쓰였다.
일본에서 ‘문고’ 또는 ‘서적관’으로 번역하던 ‘라이브러리’library를 ‘도서관’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한 계기가 있을 텐데, 일본 도서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을 뿐 명확한 정설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 ‘일본 도서관사 최대의 의문’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일본국어대사전』 제2판은 1877년 이후 ‘서적관’이 쓰이다가 1887년 이후부터는 ‘도서관’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책’ 뿐 아니라 미술 작품과 지도 같은 ‘그림’을 소장하기 때문에 ‘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을 거라는 추정이 있다.
‘하도낙서’河圖洛書로부터 도서관이 나왔을 거라고 유추하는 주장도 있다. ‘도서’圖書라는 말은 ‘하도낙서’로부터 유래했는데, ‘하도’河圖는 복희伏羲가 황하에서 얻은 그림이다. 복희는 하도로부터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낙서’洛書는 하우夏禹가 낙수에서 얻은 글로, 이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법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하도낙서’, 즉 ‘도서’는 자연의 법칙과 세계의 질서가 담겨 있는 텍스트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적관, 문헌관, 문고를 제치고 ‘도서관’이 라이브러리의 번역어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도서’라는 말은 중국에서 유래해 한국과 일본에서 쓰였지만, ‘도서관’은 일본에서 쓰이면서 역으로 중국과 한국으로 퍼진 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도서관’이라는 표현이 쓰이면서 ‘도서’라는 말도 널리 쓰이게 됐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책의 의미로 쓰는 ‘도서’, 출판사 이름 앞에 붙이는 ‘도서출판’도 도서관 도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셈이다.
메이지대학의 미우라 타로三浦太郞 교수는 ‘서적관’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1860년 막부의 미국 사절단으로 애스터 도서관을 방문한 모리타 오카타로森田岡太郎라고 밝혔다. 일본에서 라이브러리를 ‘문고’로 처음 번역한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 ‘서적관’으로 옮긴 사람은 모리타 오카타로인 셈인데, 정작 최종 명칭인 ‘도서관’의 명명자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말 그대로 ‘도서관’의 수수께끼 아닐까.
일본 문부성은 1880년 7월 ‘도쿄부 서적관’ 명칭을 ‘국립 도쿄도서관’으로 바꿨는데, 이때 ‘서적관’보다 ‘도서관’이라는 명칭이 더 적합하다는 논의가 문부성 안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서관’ 명칭 사용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일까?
일본 최초의 도서관 유학생이자 제국도서관 초대 관장, 일본문고협회(일본도서관협회의 전신) 초대 회장을 역임한 다나카 이나기田中稻城가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1886년부터 문부성에서 일하기 시작한 다나카는 1888년 해외로 도서관 유학을 떠나 1890년 3월 귀국했다. 1880년 도쿄부 서적관을 국립 도쿄도서관으로 바꿀 때 다나카는 문부성에서 일하지 않았다. 1890년 이후 문부성 도서관 정책에 다나카가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그 이전은 그의 영향이라고 보기 어렵다.
1892년 일본 문부성 연보는 통계표에서 서적관을 도서관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후 문부성에서 주도한 「제국도서관 관제」(1897년)와 「도서관령」 공포(1899년) 과정에서 ‘도서관’이라는 용어가 지속적으로 쓰였다.
일본 문부성에서 ‘도서관’이라는 말을 쓰면서 이 명칭이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92년 출범한 ‘일본문고협회’는 1908년 ‘일본도서관협회’JLA로 명칭을 바꾸는데, 이 시점부터 ‘도서관’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지 않았나 싶다.
중국에서는 1897년 장원제가 베이징에 설립한 ‘통예학도서관’ 때부터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한국은 1906년 ⟪황성신문⟫에 보도된 ‘대한도서관’부터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서구의 ‘라이브러리’를 일본은 ‘도서관’으로 번역했고, 우리는 일본의 ‘도서관’을 우리만의 개념으로 번역하지 않고 수용했다. 일본이 번역한 도서관을 그대로 ‘이식’ 한 것이다. 일본이 고심해서 번역한 것을 같은 한자 문화권인 우리가 손쉽게 이식했으니 수월하고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식 과정에서 서구의 ‘라이브러리’는 무엇이고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라는 우리만의 고민과 사유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 과정의 생략이 이후 우리 도서관의 특질 중 하나를 형성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우리 도서관은 다른 나라의 다양한 사례를 추종하고 이식하기 바쁘다. 이 과정에서 우리 도서관은 근대 이전의 ‘전근대’前近代와 일본으로부터 이식한 ‘식민지 근대’, 그리고 해방 이후 서구에서 수입한 ‘서구식 근대’가 섞이고 뒤엉켜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왜 우리의 대안을 ‘우리 안’이 아닌 ‘우리 바깥’에서만 찾을까. 우리는 뒤쳐져 있고 바깥의 것은 우리보다 늘 나은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식민지적 관점’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제 ‘추종’이 아닌 ‘사유’ 아닐까.
우리나라에 근대 도서관 제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누구일까? 유길준이다. 유길준은 국한문 혼용으로 서양 문물을 정리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서적고’書籍庫라는 이름으로 근대 도서관을 처음 소개했다.
“도서관은 정부에서 설치한 곳도 있고, 정부와 국민이 힘을 합하여 세운 곳도 있다. 경서經書와 역사책과 각종 학문의 서적과 고금의 명화 및 소설로부터 각국의 신문 종류에 이르기까지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다. 외국에서 새로 출판된 책은 사들이고, 본국에서 나온 책은 출판한 자가 각지의 도서관에 한 질씩 보내므로, 책의 권수는 해마다 늘어난다. 이와 같이 책을 보관하는 까닭은 세상에 무식한 사람을 없애려는 데 주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서양 여러 나라에는 대도시마다 도서관 없는 곳이 없다. 어떤 사람이든지 책을 열람하려고 하면 도서관에 가서 마음대로 아무 책이나 펴볼 수 있지만, 다른 곳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독서하려는 학생이 책이 없어서 공부할 수 없을 때에는 세를 내고 빌려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책을 훼손시키면 책값을 물어내야 한다. 각국 도서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영국 런던에 있는 것,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있는 것, 프랑스 파리에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파리의 도서관이 가장 큰데, 소장한 책이 200만 권을 넘으므로 프랑스 사람들이 그 굉장한 규모를 항상 자랑한다.”
유길준은 ‘서적고’ 항목을 통해 도서관의 종류(국립 또는 사립), 도서관이 갖춘 자료의 종류(책과 예술작품, 신문), 출판업자로부터 책을 제출받는 납본제도, 지식을 공유하고 확산하려는 도서관의 존재 목적, 관내 열람과 관외 유료 대출, 훼손한 책에 대한 변상, 런던과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의 도서관을 두루 소개하고 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을 참조한 걸로 알려져 있다. ‘서적고’로 소개한 도서관 항목도 마찬가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사정』을 발간해서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이 1만 엔권에 그의 초상을 새긴 건 이 때문이다. 『서양사정』은 1866년 1권 발간을 시작으로 4년 동안 10권으로 완간됐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제1권에서 서구 근대 도서관을 ‘문고’文庫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처음 소개했다.
“서양 여러 나라의 수도에는 문고가 있으니 ‘도서관’이라 한다. 날마다 이용하는 서적, 그림 등에서부터 고서, 진귀한 책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서적을 모두 갖추어 사람들이 와서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이것을 읽는다. 단 매일 도서관 안에서 읽을 수 있을 뿐 집에는 가져갈 수 없다. 런던의 도서관에는 서적 80만 권이 있고 페테르스부르크의 도서관에는 90만 권, 파리의 도서관에는 150만 권이 있으니 프랑스 사람이 말하기를 파리 도서관의 책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칠십리는 된다고. 도서관에는 정부에 속하는 것과 일반에 속하는 것이 있다. 외국의 서적은 구입하고 자기 나라의 서적은 새로이 출판하는 자가 일부를 도서관에 납본하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사정』에서 소개한 ‘문고’와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쓴 ‘서적고’를 비교하면 내용이 꽤 비슷하다.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쓸 때 『서양사정』을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유길준은 1881년 6월 후쿠자와가 세운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해서 1년 남짓 공부하는데, 이때 『서양사정』을 비롯한 여러 개화 서적을 접했다. 1881년 말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일본을 처음 방문해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을 때 통역을 한 사람도 유길준이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일행이 처음 머문 곳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도쿄 자택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1870)과 『학문의 권유』(1876)는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는데, 위판본僞版本이 대량으로 찍혀 유통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후쿠자와는 위판본을 막기 위해 카피라이트copyright에 해당하는 ‘판권’版權이라는 단어를 처음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막부 말기 1860년대 일본의 양대 베스트셀러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과 헨리 휘튼Henry Wheaton의 『만국공법』萬國公法을 꼽았다. 『서양사정』은 그 정도로 일본에서 많이 읽혔다. 1873년 후쿠자와는 친구에게 ‘생계는 책 인세를 받아 걱정이 없다’는 편지를 보낸 적 있다. 그의 책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알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58년 10월 에도에 새롭게 개설된 ‘란가쿠주쿠’蘭学塾의 교사로 초빙됐다. 란가쿠주쿠가 게이오의숙의 모태가 되는데, 일본 사립대학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게이오대학은 이때를 개교 시점으로 삼고 있다. 후쿠자와는 1868년 시바芝의 신센자新錢座에 150평 건물을 새롭게 지어 ‘게이오의숙’으로 이름 지었다. ‘게이오’慶應는 당시 연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해외 순방을 통해 수집한 책 500권을 게이오의숙 도서관에 이관했다. 이 과정에서 도서관 장서가 부족하자 1874년부터 1876년까지 자신의 문하생 하야시 유데키早矢仕有的에게 양서 수입을 맡겼다.
하야시 유데키는 150년이 넘은 서점 ‘마루젠’丸善의 창립자다. 1869년 마루젠을 설립한 하야시는 세습이 일반적이던 당시 상관례를 따르지 않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모델을 도입했다. 마루젠이 일본 최초의 현대적 회사로 꼽히는 이유다. 하야시는 ‘하이라이스’를 만든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지인이 찾아오면 고기와 채소를 끓여 밥에 얹어 대접했다. ‘하야시 라이스’로부터 하이라이스가 탄생했다고 전한다.
유길준은 도서관뿐 아니라 서구 문물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서유견문』을 어디서 썼을까? 그가 『서유견문』을 집필한 곳은 ‘취운정’翠雲亭으로 알려져 있다.
유길준은 1885년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갑신정변 주역과 가깝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후 유길준은 우포장 한규설의 집에 1년 반 동안 연금되었다. 연금이라는 명목으로 유길준을 보호한 한규설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참정대신으로 유일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한 사람이다. 한규설의 집에 머물던 유길준은 민영익의 별원이 있던 취운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연금 생활은 1892년까지 7년간 이어졌다.
감사원 앞에 있는 취운정 표석을 보면 ‘정자’라는 설명이 남아 있어 취운정을 정자로 생각하기 쉽다. 유길준은 1887년 가을부터 1889년 봄까지 취운정에 머물며 『서유견문』을 집필했다. 정자의 규모가 크더라도 일 년 반이나 머물며 책을 쓰는 게 가능했을까?
하남시사편찬위원회 김세민 상임연구위원은 취운정이 일개 ‘정자’가 아닌 ‘지명’地名임을 밝힌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취운정은 백록동과 청린동을 포함한 이 일대의 지명이다.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취운정 정자 사진을 보면 규모가 크지 않다. 유길준은 이 정자에 머문 게 아니라 정자 아래 살림집으로 쓰던 기와집에 머물며 『서유견문』을 썼다.
취운정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청린동천’靑麟洞天 각자가 남아있는 가회동 북촌힐스(옛 경남빌라)부터 감사원, 중앙중고등학교 후문 일대가 취운정 영역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행정동으로는 가회동 북쪽과 삼청동 일부 지역이다.
1928년 8월 5일 자 ⟪동아일보⟫는 일본인에게 매각되는 조선귀족회 소유의 취운정 면적이 1만 3,879 평이라는 기사를 낸 바 있다. 1만 4천 평에 이르렀다는 취운정은 정독도서관보다 넓고 덕수궁보다는 적은 면적이다.
취운정은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집필한 장소일 뿐 아니라 1920년 윤익선이 ‘경성도서관’을 개관한 곳이기도 하다. 민태호 일가의 별원이었던 취운정은 백락동 마마로 불린 대원군 첩의 거처, 의친왕의 사저, 한성구락원, 조선총독부 점유를 거쳐 조선귀족회 소유가 되었다.
1920년 11월 5일 윤익선은 조선귀족회가 소유했던 취운정 일대 건물을 빌려 경성도서관을 개관했다. 취운정에 문을 연 경성도서관 개관식에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고, 문을 연 후에도 이용자로 북적였다는 기사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