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뱅뮤지엄 2
미 문화원을 나서자마자 학생들은 전원 검거되었다. 점거 농성에 참여한 73명 중 함운경을 비롯한 25명이 구속되고 19명이 기소됐다. 당시 조직 사건이 아닌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구속자를 낸 사건이었다. 최대 구속자 기록은 불과 1년 후 애학투련 사건으로 알려진 ‘건대 항쟁’으로 1,288명이 구속되면서 깨지지만 말이다.
1985년 미 문화원 농성 시점만 해도 학생운동의 의식 수준은 미국에 광주민주항쟁 당시 20사단 이동 승인을 ‘물어’ 보는 수준이었다. 그런 학생운동 진영에 1986년 이후 반미의 기치를 전면적으로 내건 NL 진영이 등장한다. 1970년대까지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에 반미의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의 점거 시위는 미 문화원이라는 장소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사회적 파장뿐 아니라 국내외 관심 역시 컸다. 박철언이 남긴 증언처럼 이 사건에 대한 전두환 정권 기류는 ‘초강경’ 대응이었다. 정권은 언론을 통해 학생들을 ‘용공’으로 몰아가려 했다. 하지만 정권 의도와 상관없이 신군부의 광주 학살과 5∙18 과정에서 군 병력 이동에 대한 미국의 묵인 및 책임에 대해 시민들이 관심 갖는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최대 약점이자 금기禁忌였던 ‘광주 학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해 시작한 학생들의 시위 목적은 제대로 ‘달성’된 셈이다.
이 해 5월 황석영 이름으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출판되었다. 2∙12 총선을 통해 약진한 신민당은 5월 30일 광주사태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6월 7일 윤성민 국방부장관이 국방위원회에 「광주사태 보고서」를 제출했다. 7월부터는 월간지가 ‘광주’를 다루기 시작했다. 5년이나 쉬쉬 묻혀 있던 광주민주항쟁이 공론의 장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점거 농성’이 주요 투쟁 방법이 되기도 했다. 1985년 11월 4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와 미 상공회의소, 11월 15일 노동부장관 비서실, 11월 18일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12월 2일 광주 미 문화원에서 점거 농성이 이어졌다.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돌입했다. 7월 18일까지 63명을 체포해서 56명을 구속했다. 10월 말에는 조직 사건을 터뜨렸다. 10월 29일 각종 시위와 노사분규 배후에 좌경용공 학생의 지하단체인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가 있다고 밝히고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김근태의 구속을 발표했다. 이것이 28명이 구속되고 17명이 수배된 ‘깃발-민추위’ 사건이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김근태는 22일 동안 잔혹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참혹한 고통을 겪었음에도 그는 자신이 겪은 고문을 법정과 수감 생활을 통해 ‘폭로’했다. 김근태는 기억하기도 끔찍한 고문을 꼼꼼히 정리해 『남영동』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그에 의해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실체가 알려졌다.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는 김근태가 겪은 고문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근태는 재야와 국회의원 활발히 활동하다가 2011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주동자로 함께 구속된 문용식은 나우콤과 아프리카TV를 일군 후 정당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깃발-민추위’를 주도한 사람 중에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은 인물이 있다. 그는 피신하는 동안 후배 집에 잠깐 들른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그 후배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후배는 1985년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때 농성 학생을 지원하는 가두시위에 참여했다가 구류를 살기도 했다. 그 후배 이름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84학번 ‘박종철’이다.
부산 미 문화원과 서울 미 문화원은 광주민주항쟁을 알리기 위한 학생들의 ‘거사’ 장소로 활용되고, 도서관이 방화 및 농성 장소가 되었다는 점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두 건물 모두 일제 강점기에 지어져 꽤 오랜 역사를 가진 건물이라는 점이다.
부산 미 문화원은 192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건립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 제24사단의 숙소로 쓰였다. 1949년부터 미 문화원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국 대사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시절에는 2층 건물로 지었는데, 미 문화원 시절 3층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1999년 4월 30일 대한민국에 반환되어 2003년 7월 3일부터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서울 미 문화원 건물은 일제 강점기 미쓰이三井 물산 경성지점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철근 콘크리트 골조에 외벽은 화강석으로 마감했다. 7층 규모로 지을 예정이었는데 4층 건물로 완성했다. 1952년 7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18년 넘게 ‘미국 대사관’으로 쓰였다.
1950년 4월 기준으로 한국에 있던 미국 대사관은 대사와 참사관 각 1명, 3등 서기관급 이상 13명, 실무직원 97명 등 총110명이 근무했다. 대사관 운영도 미 국무장관의 지휘를 직접 받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서울 미 문화원 건물에 있던 미 대사관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국 대사관’이었다. 냉전 체제에서 미국이 ‘반공 보루’로 대한민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미국이 우리나라에 둔 ‘공사관’의 역사를 살펴보자.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에 따르면 개항 이후 조선은 1876년 일본을 시작으로 11개 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미국과는 1882년 5월 22일 제물포 임시 막사에서 두 번째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83년 초대 미국 공사로 조선에 부임한 사람은 푸트Lucius Harwood Foote다. 푸트와 미국 공관원 일행은 독일인 묄렌도르프 집에 잠시 머물다가 정동 민씨 일가의 집을 사들였다. 이것이 정동 미국 공사관의 시작이며, 미국 공사관을 필두로 정동이 ‘외국 공사관 거리’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은 공사관 위치를 옮기지 않고, 처음 자리 잡은 정동에 계속 머물렀다. 선교사로 와서 제중원을 설립하며 우리에게 꽤 알려진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1901년 6월 21일부터 1905년 3월 21일까지 제6대 주한미국공사로 일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대한제국 내 외국공사관을 폐쇄했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도 1905년 11월 28일 대한제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미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정동 미국 대사관저가 크게 확장한 건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치면서부터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미국은 「한미행정이양협정」을 통해 정동 공사관 주변 땅을 점유했다. 미군정 시절 미국은 대사관을 따로 두지 않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규모 ‘주한미국사절단’U.S. diplomatic mission을 파견했다. 미국은 주한미국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대표부’를 함께 설치했다. 그 대표로는 특명전권대사 급인 무초John Joseph Muccio를 파견했다.
1949년 1월 1일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를 법률상 승인했다. 같은 해 4월 20일 미국 대표부는 미국 대사관으로 승격했다. 초대 주한미국대사로는 무초가 승진했다. 미국 대사관이 처음 자리한 곳은 반도호텔(을지로 1가 181번지)이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피난 갔던 미국 대사관은 1952년 7월 서울로 돌아왔다. 미 대사관이 자리 잡은 곳은 을지로 1가 63번지 미쓰이 빌딩이었다. 정동의 미국 공사관은 이때부터 ‘대사관저’로 쓰이기 시작했다.
미쓰이 빌딩에 20년 가까이 머문 미국 대사관은 1970년 12월 세종로 82번지 미국 국제개발처USAID 건물로 이전해서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미국 대사관 건물은 주한미국원조사절단USOM 건물로 1961년 10월 1일 완공했다. 옛 문화체육관광부 건물(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함께 지은 ‘쌍둥이 빌딩’이다.
정동 대사관저는 건축가 조자용의 설계로 기와집 형태로 신축하면서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로 불리기 시작한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필립 하비브Philip Habib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비브 하우스는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만난 후 내외신 기자회견을 한 곳이기도 하다.
미국 대사관으로 쓰였던 미쓰이 빌딩은 미국 공보원, 즉 미국 문화원 건물로 쓰이다가 서울시로 넘겨져 서울특별시청 을지로청사로 쓰였다. 서울시청 을지로청사로 쓰이던 시절 서울시 대표도서관 건립추진반이 이곳을 사무실로 이용했다. 이곳에서 지금의 서울도서관 개관을 준비했다. 2014년부터는 그레뱅 뮤지엄Grevin Museum으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 공보원 도서관’과 ‘미8군 도서관’은 미국이 한국에서 운영한 대표적인 도서관이다. 미8군 도서관은 주한미군과 군속을 위한 시설이며, 미국 공보원 도서관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도서관이다. 미국은 왜 한국인을 대상으로 ‘도서관’을 운영했을까?
박수현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에게 미국 문화원으로 알려진 ‘미국 공보원’의 역사는 길다. 1945년 9월 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미군정 시행 과정에서 ‘공보기구’를 설치했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정보과를 접수해서 1945년 11월 공보과, 1946년 2월 공보국, 1946년 3월 공보부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로 개편했다.
공보기구는 미군의 점령정책과 미국의 대한정책을 조선인들에게 설득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여기서 ‘공보’란 Information, Public Information, Public Relation 같은 여러 용어가 쓰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선전’propaganda의 개념이다.
한편 1947년 5월 30일 주한미군사령부USAFIK는 ‘공보원’OCI : Office of Civil Information을 창설했다. 주한미군사령부의 공보원 창설로 미국은 한국 내 공보기구를 한국인으로 구성된 미군정청 공보부와 미국인으로 구성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으로 이원화시켰다. 책임자인 제임스 스튜어트James L. Stewart는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의 성격을 ‘공격적이고 독립적인 선전과 역선전을 담당하는 기구’로 규정했다.
공보원은 미국 점령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한국인에게 미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각종 출판, 강연, 영화, 전시, 학교교육을 통해 선전 활동을 실행했다. ⟪세계신보⟫라는 무료 신문을 대량으로 제작해서 배포하고 남한 각 지역에 대한 정보 수집과 조사도 진행했다.
1947년 12월 23일 주한미군사령부의 공보원과 미군정청의 공보부 조직의 통합에 대한 보고서가 작성된 후 공보원은 조직을 확장한다. 1947년 9월 부산과 대구, 1948년 1월 인천, 2월 춘천과 청주, 3월 이후 전주, 개성, 전남 광주, 서울, 대전에 ‘지부’를 차례로 설립했다. 남한 각 도시에 설립된 미 공보원 지부는 ‘도서관’과 영화 상영, 강연, 영어와 성인교실을 위한 ‘강당’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미 공보원 지부는 1948년 5월 제헌의회 선거 과정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제헌의회 선거 후 공보원 지부는 남한 주요 도시에서 미국 문화를 전파하고, 미국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선전하는 장으로 이어졌다. 정부 수립 후 미 군정청의 공보부는 대한민국 정부 ‘공보처’가 되었다.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은 1949년 7월부터 주한미국대사관이 접수해서 ‘미국 공보원’USIS :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이 전환되었다. 우리에게 부산 미 문화원, 서울 미 문화원으로 알려진 곳은 미국 공보원 부산 지부와 서울 지부인 셈이다.
1953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독립적인, 대외 선전 전담 조직의 창설을 의회에 요청했고, 그렇게 탄생한 기구가 ‘미국 공보원’USIA : Unites States Information Agency이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대외 선전기구는 이렇게 탄생했다.
1960년대 이후 주한미국 공보원은 한국 엘리트를 대상으로 한 선전 활동에 집중했다. 대학 교수와 학생, 언론사 구성원, 시민사회와 문화 분야,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 분야 리더, 중고등학교 교사와 기업 경영자, 정부 공보 및 문화 부처 공무원이 그 대상이었다. 주한미국 공보원은 구체적인 대상을 리스트로 작성해 ‘관리’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강연, 세미나 같은 행사를 진행하고, 풀브라이트 프로그램Fulbright Program 같은 유학과 연수를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엘리트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레스터 어샤임Lester Asheim은 『발전도상국의 도서관직』에서 “미국 공보원 도서관의 목적은 도서관 사업을 추진하기 위함이 아니라 미국에 유리한 정보를 퍼뜨리기 위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보여주고 ‘미국의 목소리’Voice of America를 들려주는 ‘선전의 장’인 것이다.
미국은 도서관을 비롯한 미국 공보원을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 150개 나라에서 운영했다. 이를 위한 연간 예산이 20억 달러에 달했다. 1950년대 이후 미국 공보원 도서관은 미국의 입김이 미치는 나라에서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지탱하는 주요 채널의 하나로 기능했다. 특히 미국 공보원 도서관은 해당 국가 엘리트를 대상으로 미국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채널 중 하나였다.
서울 미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이 의식했는지 모르지만 미국이 선전을 위해 운영하는 도서관 공간을 역으로 학생들의 정치적 메시지를 ‘선전’하는 장으로 활용한 셈이다.
1999년 미국은 공보원 조직을 국무부 산하로 통폐합했다. 한국에 있던 미국 공보원도 더이상 미국 문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주한미국대사관은 2000년부터 서울 용산에 ‘아메리칸 센터’American Center를, 부산∙광주∙대구에 ‘아메리칸 코너’American Corner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 문화원 도서관의 후신인 셈이다.
실물과 똑같은 유명 인사의 밀랍인형으로 유명한 그레뱅 뮤지엄. 그레뱅 뮤지엄은 신문에 사진이 없던 19세기 후반, 신문에 등장하는 인물을 대중에게 입체적으로 소개하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알프레드 그레뱅Alfred Grevin이 주도해서 1882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관한 그레뱅 뮤지엄은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130여 년 동안 2천 개의 밀랍인형이 제작되고 6천만 명의 관람객이 그레뱅 뮤지엄을 찾았다.
그레뱅 뮤지엄에 전시되는 밀랍인형 제작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15명이 참여한다. 하나의 밀랍인형을 만드는데 6개월 이상의 제작 기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레뱅 뮤지엄이 지향하는 극사실주의를 통해 제작된 밀랍인형은 실물과 같은 디테일로 관람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한국 그레뱅 뮤지엄은 2014년 문을 열었다.
그레뱅 뮤지엄에 자리한 80여 개의 밀랍인형을 둘러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은 건물로만 남은 이 공간에 담긴 ‘역사’가 아닐까.
한때 이곳에 있던 미국 대사관과 문화원, 그 도서관의 흔적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1985년 당시 이곳을 점거했던 학생들은 광주 5∙18 때 미국의 책임에 대해 물으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반세기 이상 굳건했던 ‘한미동맹’, 우리의 ‘동맹’은 무엇을 위함인가? 동맹은 국익을 위한 ‘수단’이지 동맹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국익을 위한 동맹이 국익을 침해할 때 우리는 동맹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동맹 관계는 재고되어야 하고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국제 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명明을 향한 의리, ‘동맹’을 고집하다가 신흥 강국 청淸에 국토를 유린당했던 병자호란의 교훈을 우리는 어떻게 새겨야 할까. 30여 년 전 이곳을 점거하고 학생들이 외쳤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이고, ‘동맹’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주소 : 서울시 중구 을지로 23
이용시간 : 09:30 - 19:00(오픈 시간은 변동 가능하므로 방문 전 문의)
휴관일 : 없음
이용자격 : 이용자격 제한 없음, 유료 (60개월 이하 아동 무료)
홈페이지 : http://www.grevin-seoul.com/ko/
전화 : 02-777-4700
운영기관 : 그레뱅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