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도서관 1
우리 역사에서 근대 공공도서관은 언제 등장했을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도서관’은 부산시립시민도서관이다.
일본 홍도회弘道會 부산 지부가 1901년 10월 설립한 ‘부산독서구락부’는 1903년 ‘부산도서관’을 거쳐 지금의 ‘부산시립시민도서관’으로 이어졌다. 부산시립시민도서관 전신인 부산도서관은 당시 부산에 살던 일본인이 세운 도서관으로, 조선인이 문을 연 도서관은 아니다. 그러면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공공도서관은 어디일까?
1906년 3월 평양에 문을 연 ‘대동서관’大同書館은 태문옥, 곽용순, 김흥윤 같은 지역 유지가 세운 공공도서관이다. 1만여 권의 장서를 갖추고 일반인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주당 대출 권수가 1천 권이나 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사립 공공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대동서관은 안타깝게도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폐쇄되고 만다.
일제 강점 직전 평양에서 문을 연 도서관이라 그런지,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대백과사전』은 대동서관을 ‘근대적 성격의 공공도서관’으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조선인이 직접 세운 도서관 중 가장 오래된 공공도서관은 어디일까? 김인정 여사가 1931년 12월 평양에 세운 ‘인정도서관’을 비롯,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세운 사립 공공도서관이 여럿 있지만 대부분 문을 닫았다. 현존하는 공공도서관 중 가장 오래된 곳은 1920년 11월 5일 윤익선이 세운 ‘경성도서관’京城圖書館이다.
1872년 2월 13일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윤익선은 1907년 4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1년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이 된 윤익선은 3∙1 운동 때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사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윤익선은 ⟪조선독립신문⟫ 발간 혐의로 1920년 2월 체포되어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감형으로 1920년 9월 23일 출옥한 그는 풀려난 지 43일 만에 경성도서관을 세웠다.
윤익선의 경성도서관이 문을 연 곳은 가회동 1번지 취운정翠雲亭으로 지금의 감사원 근처다.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 민태호가 소유한 땅으로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쓴 곳이다. 유길준은 1895년 출간한 『서유견문』에서 근대 도서관을 ‘서적고’書籍庫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했다.
윤익선은 조선귀족회 회장 김윤식으로부터 취운정에 있는 건물을 무상 대여받아 도서관을 개관했다. 경성도서관 운영을 위해 윤익선, 김장환, 윤양구 세 명은 전 재산을 기부했고, 도서관 후원을 위해 주식회사 ‘광문사’를 설립했다. ‘관우회’館友會라는 이름으로 도서관 후원 조직을 만들어 찬조금을 받기도 했다. 도서관 운영을 위한 회사 설립부터 도서관 후원 조직 구성까지, 경성도서관의 시작은 범상치 않았다.
1920년 11월 개관 시점에 1만 5천 권이던 경성도서관 장서는 1921년 2월 크게 늘어났다. 열람시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고, 개관 초에는 무료로 도서관을 개방했다. 부인 도서실을 마련해서 여성 독서 공간을 따로 배려했다. 윤익선이 세운 경성도서관의 역사는 일제가 1922년 건립한 ‘경성부립도서관’보다 2년이 앞선다.
1921년 9월 10일 이범승은 탑골공원 옆에 윤익선이 세운 도서관과 똑같은 이름으로 ‘경성도서관’을 개관했다. 이범승은 조선총독부로부터 탑골공원 서쪽에 있던 부지 531평과 단층 한옥 건물을 무상으로 빌려 도서관을 열었다. 지금의 탑골공원 서문 주변이 경성도서관이 있던 자리다. 이범승이 도서관 건물로 대여한 한옥은 독일인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가 대한제국 군악대에게 서양음악을 전수했던 건물이다.
에케르트는 1901년 2월 27일 대한제국 군악대 교수가 되었고, 오케스트라용 악기를 들여와 군악대를 편성하고 연주법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군악대는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 탑골공원에서 무료 연주회를 열었다.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1년 9월 7일 고종황제 생신 때 처음 연주되었다. 에케르트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될 때 ‘해고’되지만 조선을 사랑해서 고국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역사학자 전우용의 표현처럼 ‘한국 서양음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에케르트는 1916년까지 경성에 살다가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묻혔다.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이 자리 잡은 탑골공원은 원래 원각사가 있던 곳이다. 탑골공원이 ‘파고다공원’으로 불린 이유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공원으로 만든 건 대한제국 때다. 1902년 고종은 황실 야외 음악 연주회장으로 쓰기 위해 공원에 ‘팔각정’을 지었다. 제후국이던 조선은 팔각형을 쓰지 못하다가 대한제국 선포 후 환구단과 탑골공원에 팔각정을 하나씩 지었다. 탑골공원 팔각정은 ‘백성이 하늘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탑골공원은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1919년 3월 1일 민중의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우리 근대사에서 의미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 해왔다. 3∙1 만세운동 직후 일제는 탑골공원을 1년 이상 폐쇄했는데,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은 탑골공원이 다시 개방된 시기에 문을 열었다. 서양음악이 전수되고 민중의 함성이 울려 퍼진 유서 깊은 곳에 근대 공공도서관이 문을 연 것이다.
한편 윤익선의 취운정 경성도서관이 운영난을 겪자 이범승은 취운정 경성도서관까지 넘겨 받았다. 이범승과 윤익선이 공동으로 운영하되, 탑골공원 도서관을 경성도서관 ‘본관’으로, 취운정 도서관을 ‘분관’으로 운영했다. 1924년 4월 12일 윤익선이 간도동흥중학교 교장이 되며 만주로 떠남에 따라 가회동 취운정 분관은 폐쇄되고, 이범승 혼자 경성도서관 운영을 맡았다. 이범승은 취운정 도서관 책을 탑골공원 도서관에 합쳐 운영했다.
1922년 경성도서관은 휘문의숙을 설립한 갑부 민영휘로부터 1만 원을 기부받아 1923년 130여 평의 2층 석조 건물을 완공했다. 이 건물이 도서관 전용 건물로 경성에 세워진 최초의 건물이다. 2층 건물을 신축한 후 이범승은 단층 한옥 건물을 책과 교구, 장난감을 구비한 ‘아동관’으로 꾸몄다. 방정환과 정홍교 같은 어린이 운동가를 초청해서 동화회를 열고, 영화와 음악 감상 행사도 개최했다. 조선여자청년회와 함께 여성을 위한 야학과 각종 강좌를 열기도 했다.
1926년 시점에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은 각종 사전류를 포함, 13,263권의 책과 열람실, 아동열람실, 서고, 출납실, 신문잡지실, 휴게실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의 도서관 구성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다. 당시 조선인을 위한 도서관 중 시설이나 장서, 운영 면에서 경성도서관에 비길 곳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금난을 심하게 겪던 경성도서관은 1924년 10월 무기한 휴관했다가 1925년 2월 일시적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경성부 보조금으로 유지하다가 1926년 2월 이범승은 경성도서관 건물과 장서를 경성부에 넘겼다. 재정적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도서관 운영권을 넘긴 것이다. 경성부는 그동안 쌓인 4만 원 상당의 빚을 청산하고 예산을 배정해서 운영하는 조건으로 경성도서관을 ‘인수’했다. 이때부터 경성도서관은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이 되었다.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이 문을 열었다가 운영권을 넘기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조선총독부는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인이 실력 배양을 목적으로 설립한 도서관을 폐쇄하거나 억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 조선총독부가 이범승에게 도서관 부지와 건물을 ‘무상으로’ 제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재정난에 처한 경성도서관의 운영권을 일제(경성부)가 다시 인수한 까닭은 무엇일까?
1919년 4월 29일 교토에 있던 이범승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 아베 노부유키 사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조선에 도서관 설립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대한제국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일본 천황가 마사코(이방자 여사)의 결혼식을 기념해서 도서관을 세워달라는 요청이었다. 매일신보사는 이범승의 편지를 1919년 5월 17일부터 23일에 걸쳐 신문에 게재하고, 2년 후 조선총독부는 이범승에게 도서관 부지와 건물을 ‘무상’ 제공했다. 언뜻 생각해봐도 ‘특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범승이 매일신보사에 편지를 보낸 시기도 미묘하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간 3∙1 운동은 일본군과 경찰이 증원되는 4월 중순부터 기세가 꺾이지만 5월과 6월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4월 11일에는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이범승은 3∙1 운동의 여진이 이어지고 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하던 때(1919년 4월 29일) 매일신보사에 편지를 보냈다. ⟪매일신보⟫에 실린 이범승의 편지 내용 중 일부다.
“이왕세자(고종황제의 황태자 이은) 전하의 어 경사(일본 천황가 마사코와 결혼)를 기념하기 위해 도서관을 설립하면 이 성전(성대한 의식)은 도서관에 의하여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금은 우선 황실의 하사와 총독부에서 보조를 받고 경성 시민의 기부에 의하여 이 어 성전을 영구히 기념하며 또 도서관의 효용을 양면으로 발휘하여 일선융합을 생각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대한제국 황실과 일본 천황가의 결혼을 통해 ‘일선융합’을 도모하고 이를 기념하는 도서관을 설립하자는 내용이다. 아무리 도서관 건립을 갈망한들 동포가 피 흘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와중에 ‘일선융합’을 주장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3∙1 운동에 앞서 일제의 심장부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준비한 일본 유학생들과 달리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한 이범승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고종의 장례식이 치러진 3월 3일로부터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고종의 아들 이은의 결혼식을 거론한 것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이범승의 ‘신념’이건 도서관 건립을 위한 ‘깊은 뜻’이건 두 황실의 정략결혼을 통해 ‘일선융합’을 꾀한 일제 입장에서는 반가운 주장이었을 것이다.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일본 천황가 마사코의 결혼식은 3∙1 운동 1년 후인 1920년 4월 28일 치러졌다. 조선 왕실 최초의 혼혈 결혼이었던 이 결혼식에 대해 당시 언론의 보도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일선 융화의 좋은 전례”라고 보도했지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황태자 이은의 약혼녀였다가 파혼당한 민갑완의 기사를 크게 내보내며 부정적인 논조를 드러냈다.
심지어 일본 유학생 서상한이 결혼식 마차에 폭탄을 던지려고 준비하다가 체포된 사건도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원수의 여자를 아내로 맞은’ 황태자 이은을 “아비도 없고 나라도 없는 금수禽獸”라고 격렬히 비판했다. 황태자 이은과 일본 천황가 마사코의 결혼식은 대한제국 황실이 반대했을 뿐 아니라 조선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할 때 1919년 3∙1 운동 직후에 이은과 마사코의 결혼 기념 도서관을 세우자는 이범승의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서관인물 평전』에서 이범승에 대해 다룬 이용재 교수는 “편지로 조선총독부를 움직여 2년 뒤 경성도서관의 설립이라는 쾌거를 이룬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용재 교수 주장처럼 이범승의 도서관 설립 제안이 ‘편지로 조선총독부를 움직인 쾌거’라고 하더라도 일제가 부지와 건물을 무상 제공하면서까지 도서관 건립을 지원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일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유화 조치로 교육문화시설인 도서관 건립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제가 세운 경성부립도서관과 조선총독부도서관은 모두 1920년대 들어서 문을 열었다. 이범승은 부유층 자제로 태어나 일본에서 최고 학부를 거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물이다. 대한제국 황실과 일본 천황가의 결혼을 ‘정략적으로’ 추진해온 일제 입장에서는 ‘혼혈 결혼 기념으로 도서관을 설립하자’는 조선 엘리트의 제안이 반가웠을 것이다.
개관 과정에서 탑골공원 건물과 부지를 ‘무상 제공’한 일제는 1926년 운영이 어려워진 경성도서관을 ‘인수’했다. 이 부분도 일제 강점기 여느 도서관의 폐쇄 과정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도서관 건립과 폐쇄 과정에서 이런 ‘혜택’을 받은 도서관은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