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문학도서관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맑은 구름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푸른 구름靑雲도 아닌 맑은 구름淸雲이라니. 흔치 않은 지명이 탄생한 배경은 따로 있다. 일제 시대 청풍계淸楓溪와 백운동白雲洞을 합치면서 지금의 청운동이 탄생한 것이다.
‘청풍계’는 인왕산 54번지 일대 계곡으로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이 자주 찾던 명승이다.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楓溪라 불렸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은 젊은 시절 이곳에 별장을 꾸미면서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 청풍계淸風溪로 이름을 바꿨다.
선원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종묘의 신주와 빈궁, 원손을 받들어 강화도로 피신, 강화성 함락과 함께 순국했다. 김상용의 동생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고수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崔鳴吉(이병헌 분)에 맞서 강경한 ‘척화론’斥和論을 편 이가 바로 김상헌(김윤석 분)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에 끌려가 6년 동안 억류당하기도 했다.
김상용과 동생인 김상헌의 후손이 조선말 세도 정치의 주인공 ‘장동 김씨’壯洞 金氏다. 청풍계는 장동 김씨의 세거지世居地였다. 김상헌의 집터가 있던 곳은 이제 ‘무궁화동산’이 되었다. 고즈넉한 이곳은 우리 현대사의 주요 현장이기도 하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쏜 ‘궁정동 안가’가 바로 여기다. 무궁화동산에는 휘어진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곳이 박정희 대통령이 총을 맞고 쓰러진 자리다.
명승이던 청풍계는 일제 시대 미쓰이三井 사가 들어서면서 풍광을 잃고 말았다. 한양의 명당수 청계천淸溪川은 ‘청풍계에서 흘러나온 개천’이라는 뜻인데, 골짜기 대부분이 복개되어 옛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은 김상용이 바위에 새겼다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글자만 남아 있다.
인왕산 백운동白雲洞 계곡 역시 조선시대 빼어난 경치로 유명했던 곳이다. 인왕산 기슭에서 나고 자란 겸재 정선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을 통해 백운동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남긴 바 있다.
‘흰구름이 떠 있는 계곡’이라는 뜻의 백운동은 예로부터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청학동과 함께 한양에서 경치가 좋은 다섯 곳 중 하나로 꼽혔다. 백운동 계곡은 터널 공사와 주택 건축으로 옛 모습과 달라지긴 했지만 원래 모습이 남아 있다. 서울시는 2014년 8월 21일 자하문터널 위쪽 백운동 계곡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했다.
이곳이 백운동 계곡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유적 중에 바위에 새긴 ‘백운동천’白雲洞川 각자刻字가 있다. 이 글씨는 대한제국 법부대신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이 새겼는데, 그의 집 백운장白雲莊이 이곳에 있었다.
우리가 동농 김가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대한제국 대신大臣 중 유일하게 해외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했는데 녹을 받던 대신 중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 동농이 아니었으면 싸우지도 못하고 국권을 빼앗긴 망국亡國의 역사가 더욱 부끄러울 뻔했다.
동농 김가진은 1846년 1월 29일 서촌 신교동에서 태어났다. 앞서 말한 선원 김상용의 12세손이다. 장동 김씨 후손이지만 서자였던 그는 적서차별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 서른네 살 때인 1877년 11월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되어 관직을 시작했다.
정조 시대 이름을 날린 ‘사검서’四檢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사서’로 시작한 그의 경력이 이채롭다. 이후 근대 무기를 개발하는 기기국機器局에서 일했고,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유길준과 함께 개화 업무를 담당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과 친했으나 갑신정변 때 인천에서 일하던 시기라 가담하지 않았다. 김가진은 내무부로 옮기고 나서 고종을 세 차례 만나 개혁 정책을 올렸고, 1886년 2월 치러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개화기로 접어들며 인재를 파격적으로 등용하자는 방침에 따라 서얼도 과거 시험을 보고 고위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서얼 출신이던 김가진, 이범진, 윤웅렬이 이런 분위기 속에 등용된 인재다.
과거 급제 후 동농은 1887년 5월 일본공사관 참찬관參贊官으로 파견되었고, 10월부터는 주일공사駐日公使가 되어 도쿄에서 4년간 외교관으로 일했다. 그는 남다른 언어 습득 능력으로 일본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쓴 새비지 랜도어Savage-Landor는 김가진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1895년 갑오개혁 때 동농은 국군기무처 의원으로 「홍범 14조」를 비롯, 각종 개혁안을 만들었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1896년 독립협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에도 참여했다. 독립문의 한글과 한문 현판을 쓴 사람도 김가진인데, 그가 당대의 명필이었기 때문이다. 창덕궁 후원의 관람정, 금마문, 부용정, 애련정, 희우정 현판과 주련에도 동농의 글씨가 남아 있다
동농은 1897년 황해도 관찰사, 1904년 3월 농상공부대신을 거쳐 9월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을 민영환과 함께 반대했다. 을사늑약 반대가 좌절되자 1906년 충청도 관찰사로 자진 좌천했다. 순종이 즉위한 1907년 규장각 ‘제학’提學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자신이 검서관으로 일을 시작한 규장각의 최고위직까지 오른 것이다. 말단 사서로 출발해 도서관장까지 된 셈인데, 규장각 검서관 출신으로 제학까지 오른 이는 그가 유일할 것이다.
규장각 제학을 사임한 후 김가진은 1908년 6월 대한협회 회장에 취임해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맞섰다. 1910년 8월 22일 한일 강제병합이 이뤄지자 동농은 칩거했다. 「조선귀족령」에 의거, 일제가 대한제국의 중신重臣에게 수여하는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연금 수령을 거부했다.
동농은 백운동 일대 5천 평이 넘는 부지에 고종이 자재를 하사해서 지은 백운장에서 살았다. 백운장은 집사가 인장印章을 도용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저당 잡히고 소유권 분쟁에 휩싸였다. 결국 김가진 일가는 백운장에서 나와 사직동(사직동 162)과 체부동에서 지냈다.
3∙1 운동 후 김가진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19년 4월 결성된 비밀 독립운동 조직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총재로 활동했다. 동농이 조선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던 체부동 86번지는 토속촌 삼계탕이 확장한 공간으로, 지금도 길가에 김가진 집터 표석이 있다.
대동단은 우리나라 정당과 사회단체 중 처음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한 단체다. 1919년 11월 28일 대동단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전국적인 시위를 전개하려다 실패했다. 조선에서 대동단 활동이 어려워지자 김가진은 그해 10월 10일 아들 성엄省俺 김의한金毅漢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 74세였다. 일산역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김가진이 쓴 시 두 수가 전한다.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돌아가시고 사직은 기울었는데國破君亡社稷傾
부끄러움 안고 죽고 싶은 심정 참으며 여태껏 살았노라包差忍死至今至
늙은 몸이 하늘 뚫는 뜻을 아직 지니고 있으니老身尙有沖宵志
단숨에 솟아올라 만리를 날아간다一擧雄飛萬里行
백성과 나라가 존망의 위기, 어찌 감히 일신을 돌보리民國存亡敢顧身
하늘과 땅에 포위망이 깔린 곳에서 귀신같이 탈출했다天羅之網脫如神
누가 알까 삼등칸의 저 길손이誰知三等車中客
찢어진 갓과 누더기 옷을 입은 옛 대신임을破笠襤衣舊大臣
상하이에서 동농은 임시정부와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동농과 대동단은 1919년 11월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하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0월 21일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자, 만주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졌다. 김가진은 만주 북로군정서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초대에 응해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려 했으나 1922년 7월 4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국 땅에서 분투했던 노대신老大臣은 고령의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상하이 만국공묘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은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1926년 2월 이완용이 죽었을 때 동아일보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사설에서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제는 천벌을 받아야지”라고 그의 길을 ‘저주’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을사오적乙巳五賊, 1907년 정미7조약을 체결한 정미칠적丁未七賊,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한 경술국적庚戌國賊은 모두 대한제국의 대신들이다. 이들은 팔지 못할 나라를 판 매국노였지만 온갖 호사와 천수를 누리다가 작위와 재산을 자손에게 세습했다. 대한제국의 대신이지만 이들과 김가진이 걸어간 길은 많이 달랐다.
특히 이완용은 여러모로 김가진과 비교할만한 인물이다. 이완용은 관직 생활을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시작한 점도 동농과 같지만 외교관으로 일했다는 점, 명필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점도 같지만 을사늑약 전후로 두 사람은 극명하게 다른 삶을 살았다. 이완용은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로 살았고, 김가진은 대한제국 대신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특히 이완용은 여러모로 김가진과 비교할만한 인물이다. 1858년생으로 김가진보다 12살 어린 이완용은 관직 생활을 규장각에서 시작했다. 김가진이 주일공사로 일할 때 이완용은 주미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했다. 당대 명필로 손꼽힌 점도, 을사늑약 전후로 대한제국 대신이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뛰어난 재능으로 대한제국 대신의 자리에 오른 두 사람은 을사늑약 전후로 대조적인 길을 걸어간다.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알려진 삶을 살았고, 김가진은 대한제국 대신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김가진뿐 아니라 그의 아들 성엄 김의한, 며느리 수당修堂 정정화鄭靖和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은 아버지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의한은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31년 김구,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한인애국단’을 만들었다.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 정문 앞에서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흥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모두 한인애국단원이다.
김의한 일가는 상하이上海(1919), 항저우杭州(1932), 전장鎭江(1935), 창사長沙(1937), 광둥廣東(1938), 류저우柳州(1938), 치장綦江(1939), 충칭重慶(1940)으로 임시정부가 옮길 때 늘 함께 했다. 임시정부의 피난길은 4천 킬로미터에 이른다. 김의한은 1936년 장시성 우닝현 쑨원기념 중산도서관 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쳐 ‘도서관장’을 지낸 집안 내력이 이채롭다.
해방 전 김의한은 광복군 창립과 훈련에 관여했다. 해방 후 한국독립당 활동에 참여했고, 1948년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김구와 함께 38선을 넘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0년 9월 28일 납북되어 1964년 10월 9일 사망했고, 평양 재북인사 묘역에 묻혔다. 김의한은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북한 정부로부터 조국통일상을 추서 받았다.
동농의 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상하이로 망명한 후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았다. 이 과정에서 10년 동안 여섯 차례나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정정화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다. 1946년 귀국할 때까지 그녀는 임시정부 뒷바라지에 모든 걸 바쳤다.
김구, 이동녕, 이시영 같은 임시정부 인사 중 그녀가 지은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임시정부 가재도구 중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했고, 남편 김의한과 함께 광복군 창립에 기여했다. 한국전쟁 때 노모를 모시기 위해 서울에 남았던 그녀는 부역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일본 경찰 출신에게 모욕을 당한 후 풀려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1991년 사망 후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독립운동에 대한 동농 집안의 헌신은 2대에 그치지 않는다. 김가진의 둘째 아들 김용한은 의열단 김상옥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로 인해 김용한은 정신이상을 앓다가 한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용한의 아들이자 김가진의 손자 김석동은 광복군 최연소 대원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고 국립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만 독립운동을 해도 3대가 망한다는 이 나라에서 동농의 가문은 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안이다. 이 정도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하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은 이 집안에 큰 빚을 졌다.
김가진 일가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동농이 살던 ‘백운장’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로 넘어가 고급 요릿집이 들어서기도 했다. 백운장은 오노 가즈마사小野三正가 제작해서 1936년 7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발행한 「대경성부대관」에도 표시되어 있다. 해방 후에는 김가진 일가에게 반환되지 않고 호텔과 요정으로 쓰였다.
해방 후 귀국한 동농의 아들 김의한은 백운장을 돌려받으려 했다.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승만은 백운장을 끝내 김가진 가문에 돌려주지 않았다.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김의한이 남북 협상에 참여하며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했기 때문일까.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동농이 상당한 금액의 유학 자금까지 건넨 걸 생각하면 이승만의 처사는 지나쳤다.
1960년대 초까지 잘 보존되던 백운장은 5∙16 쿠데타 후 군부가 미국인 교회에게 불하해버렸다. 1964년 이 땅을 불하받은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몰몬교회)가 교회 건물을 지으면서 백운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2014년 11월 19일 백운장이 있던 백운동 자락에 ‘청운문학도서관’이 들어섰다.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그리 크지 않은 청운문학도서관이 ‘핫플레이스’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청운문학도서관은 지상과 지하 공간이 나뉘어 있는데, 지상 1층 공간은 한옥으로 지었다. 한옥채와 연못가 누정은 각종 문학 행사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지하 1층은 문학 전문 자료실로 꾸몄다. 자료실 외에 강연이 가능한 다목적실이 있고, 한편에는 어린이 열람실이 있다.
소장하고 있는 책은 1만 7천여 권. 종합도서관으로 문을 열었으면 장서 부족이 눈에 띄었을 텐데, ‘문학 전문 도서관’을 지향하면서 아담하고 내실 있는 도서관이 되었다. 서촌西村을 누빈 이상, 윤동주, 현진건 같은 문인을 생각하면, 늦게나마 백운동에 어여쁜 문학도서관이 들어선 건 다행이다.
동농 김가진이 바위에 새긴 ‘백운동천’ 글씨는 청운문학도서관 아래 바위 절벽에 새겨져 있다. 아름다운 청운문학도서관에 갈 때면 ‘백운동천’ 글씨를 함께 찾게 된다. 그리고 사라진 백운장과 이국 땅에 묻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동농을 떠올리게 된다.
독립한 나라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풍광을 그의 집안은 왜 누리지 못할까. 그가 이완용처럼 ‘친일’을 했으면 백운장 일대는 그의 집안 소유로 대대손손 이어졌을지 모른다. 때론 현실이 문학보다 더 극적일 수 있다지만, 백운장 동농 일가의 이야기는 언제까지 ‘비극’悲劇으로 방치될까. 정의롭지 않은 역사 속에 우리는 후손에게 나라를 찾고 지키는데 ‘헌신’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동농과 그의 아들, 며느리는 죽어서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상하이, 평양, 대전에 각각 묻혔다. 심지어 동농은 일제가 조작한 걸로 알려진 의병장 체포 혐의로 독립유공자 서훈조차 받지 못했다.
2019년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동농이 상하이로 망명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는 언제쯤 ‘독립유공자’로 조국에 돌아올 수 있을까. 장유승이 지적한 것처럼, 동농의 ‘망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독립하기를 소망했던 조국은 그를 잊은 건가, 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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