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도서관 2
‘도서관 선구자’인 이범승의 노력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범승의 공적과 별개로 일제가 경성도서관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의도’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식민 시대 일제의 도서관 정책을 고려하면, 일제가 이범승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도서관 건립과 운영을 지원했다고 보는 게 진상에 가깝지 않을까. 이용재 교수가 이범승의 경성도서관 건립 제안에 대해 평한 부분을 살펴보자.
“조국의 왕통王統이 일제의 상징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일제를 향하여 조선 땅에 ‘민중의 대학’을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애국계몽사상의 실천 중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하겠다.”
도서관 건립을 통해 ‘애국계몽사상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려 한 이범승이 일부러 일제의 비위를 맞추며 도서관을 ‘쟁취’했던 걸까. 경성도서관 이전과 이후 이범승의 행보가 애국계몽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있다면 이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범승은 그렇게 해석하기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
이범승은 1887년 8월 29일 만석 갑부 이기하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고등학교와 교토제국대학 독법과를 졸업했다. 조선인 중 교토제국대학을 처음으로 졸업한 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에서 2년 동안 일했다. 이범승은 경성도서관 운영 시절인 1924년 4월부터 ‘동민회’ 이사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동민회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며 만든 친일 협력단체다. 이범승은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당시 조선 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를 11회나 면담하기도 했다.
경성도서관을 5년 동안 운영한 후에는 1926년 9월부터 고등관 5등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총독부 식산국 농무과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1928년 11월에는 쇼와 천왕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조선박람회 사무위원,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황해도와 경상북도 산업과장을 지냈다. 1940년 9월부터는 경성에서 변호사를 개업해서 일했다. 친일 협력단체 동민회 활동과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 경력 때문에 이범승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경성도서관을 인수한 경성부는 이범승의 조카 이긍종을 분관장으로 임명했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 시대 첫 분관장을 맡은 이긍종은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긍종은 1926년 4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종로분관장을 맡았다. 1929년까지는 촉탁, 1930년부터는 ‘사서’였다.
종로분관장을 그만둔 이긍종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친일 신문인 ⟪조선상공신문⟫ 사장 겸 주필로 활동했다. ‘조선춘추회’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도서관과 언론 분야에서 활약한 이긍종은 『친일인명사전』에 삼촌 이범승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경성도서관을 분관으로 편입한 후 일제가 친일 성향 인물을 임명해서 도서관을 경영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이범승은 미군정 치하인 1945년 10월 25일부터 1946년 5월 9일까지 6개월 남짓 경성부윤을 맡기도 했다. 경성부윤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이범승이 ‘서울시장’이 아닌 ‘경성부윤’인 이유는 그가 재임할 때 서울은 ‘서울시’가 아닌 ‘경성부’였기 때문이다. 그의 후임인 김형민이 1946년 9월 28일 서울특별시 승격과 함께 ‘초대 서울시장’이 되었음을 생각할 때 이범승은 ‘마지막 경성부윤’으로 일한 셈이다.
경성부윤 시절 이범승은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을 ‘종로도서관’으로 승격시켰다(종로도서관 초대 관장은 송몽룡이다). 승격한 종로도서관은 동대문도서관이 문을 여는 1971년 3월까지 남대문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과 함께 수도 서울에 자리한 둘뿐인 공공도서관으로 역할을 이어갔다.
도서관에 관심 많던 이범승이 경성부윤 또는 서울시장으로 오래 일했다면 해방 후 서울의 도서관 정책에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집이 세고 자기 스타일이 강한 그는 미군정 책임자 윌슨 중령과 갈등을 빚다가 반년 만에 사임했다. 이범승은 1952년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경성부윤 외에 이범승의 이채로운 경력은 1957년 성균관 유도회儒道會 총본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점이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심산 김창숙을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친일파 출신 유도회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명세, 윤우경과 함께 이승만이 앉힌 친일파 출신 집행부 중 한 사람이 이범승이다.
1921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탑골공원에 있던 종로도서관은 1967년 10월 2일 서울시 도시계획사업으로 ‘철거’당했다. 종로도서관 철거 및 이전 과정은 황당하기까지 한데, 이전할 건물을 먼저 짓고 도서관을 철거한 게 아니라 건물을 짓기도 전에 철거부터 했다. 심지어 철거가 확정된 종로도서관은 수개월 동안 이전 부지조차 확정하지 못한 채 폐관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다행히 시민의 지원과 각계의 관심으로 1967년 10월부터 사직공원 근처에 신축 공사를 시작해서 1968년 8월 20일 지금의 모습으로 개관했지만, 종로도서관은 종암동 서울시 자재창고에 장서와 비품을 보관한 채 10개월 동안 ‘휴관’해야 했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공공도서관을 부수고 박정희 정권은 탑골공원 그 자리에 무엇을 지었을까? 바로 ‘파고다 아케이드’라고 불린 상가를 만들었다. 탑골공원 구역을 따라 2층 높이 ‘현대식 상가’를 짓고 악기와 의류, 전자제품 매장을 들인 것이다.
종로도서관 철거뿐 아니라 유서 깊은 탑골공원을 상가 건물로 빙 둘러싼 것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이 많았다. 3∙1 운동의 시발점 역할을 하고 4∙19 혁명 과정에서 이승만 동상을 쓰러뜨리는 등 민중의 함성이 울려 퍼진 이곳을 상가 건설을 통해 ‘용도 변경’했다는 의혹도 일었다.
한때 반도 조선 아케이드와 신신백화점과 함께 3대 아케이드형 상가로 꼽힌 파고다 아케이드는 결국 1983년 전두환 시대 철거됐다. 하지만 종로도서관을 철거하고 상가 건물을 지은 이 사건은 박정희 시대 도서관의 처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1964년과 1974년 소공동에 있던 남대문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이 남산으로 각각 이전한 것처럼, 박정희 시대 도서관은 도심에서 산으로, 외곽으로 밀려났다. 그나마 사직공원으로 옮긴 종로도서관은 종로구 관내로 옮겨 이름을 유지했지만, 남대문에서 남산으로 옮긴 남대문도서관은 ‘남산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이승만 시대 그나마 도심에 있던 주요 도서관이 박정희 시대 외곽으로 밀려난 건 뭘 의미할까. 1963년 「도서관법」이 처음으로 마련되긴 하나 박정희 시대 도서관이 의미 있는 성장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근대화와 경제 성장 과정에서 도서관은 그 과실을 함께 나누지 못한 채 여전히 ‘변방’에 머물렀다.
도서관의 처지는 우리 시대라고 크게 다를까. 2015년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사직단’ 복원 계획에 종로도서관과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이 포함되면서 철거 및 이전이 거론되기도 했다. “‘왕조 시대 유적’ 복원을 위해 ‘공화국 시대 유적’을 파괴해야 하느냐”하는 비판이 일며 문화재청이 물러서긴 했지만 말이다.
오랜 역사만큼 많은 고서古書를 소장하고 있는 종로도서관 앞뜰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다(이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영중은 세종문화회관 벽면의 『비천상』 부조를 만든 작가이기도 하다). 종로도서관 전신, 경성도서관을 세운 건립자의 업적을 기리며 1971년 9월 17일 세운 이범승의 흉상이다. 반세기 가까이 된 이범승 동상은 도서관인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동상이며, 울주도서관이 2017년 세운 엄대섭 동상과 함께 국내에서 단 둘 뿐인 ‘도서관인 동상’이다.
윤익선과 이범승은 우리 도서관 분야에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후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9년 11월 8일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모두 등재되었다.
윤익선의 행적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1940년 4월부터 ‘대동일진회’ 산하기관인 ‘동학원’ 교장으로 활동한 것이다. 대동일진회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가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의 지원을 받아 만든 친일단체다. 대동일진회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기치로 내걸고 활동했다. 윤익선은 1939년부터 ⟪일진회보⟫에 「황인종은 결속하자」는 글을 기고하고, 1941년 8월 삼천리사 주최 좌담회에서 ‘황국신민으로 임전국책臨戰國策에 전력을 다해 협력하겠다’고 결의했다.
윤익선은 해방 후인 1962년 3월 ⟪조선독립신문⟫ 발간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윤익선은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친일부역 행위가 드러나면서 윤익선은 2010년 서훈이 취소되고,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이장移葬했다. 2010년 윤익선의 서훈 취소 때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국회부의장과 서울시장을 역임한 윤치영도 함께 서훈이 취소됐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반민특위가 적용한 것과 거의 동일한 기준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 4,776명을 선정해서 사전을 발간했다.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와해되지 않았다면 윤익선과 이범승은 오래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분받았을 것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종로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친일인명사전』은 전 3권 중 윤익선과 이범승, 이긍종의 친일 행적이 수록된 제2권만 없다. 관외 대출이 불가능한 참고도서 『친일인명사전』이 2권만 없는 까닭은 왜일까? 도서관 건립자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기 위함일까?
종로도서관 홈페이지를 검색해 봐도 『친일인명사전』은 역시 2권만 검색되지 않는다. 종로도서관이 2권 누락을 인식하고 데이터베이스에 반영한 건데, 누락을 알고도 2권을 다시 채우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취재가 시작되자 종로도서관은 분실한 『친일인명사전』 2권을 다시 찾았다며 책을 서가에 다시 비치했다).
공공도서관 건립을 주도한 ‘도서관 선구자’가 모두 ‘친일파’로 전락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도서관 선구자로서 업적만큼 그 친일 행각도 제대로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도서관 분야 선구자가 아쉬운 상황이라 해도 ‘업적’만 칭송하고 친일파로서 ‘죄상’을 눈감는 건 문제 아닐까.
친일파 동상 철거와 친일파 이름을 딴 도로명을 변경하자는 의견이 한창 일었다. 이런 맥락에서 친일 행적이 드러난 이범승 동상에 대해 반세기 동안 도서관계에서 어떤 의견도 나오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도서관과 문헌정보학 분야의 역사적 ‘무관심’ 때문인가, 도서관 선구자의 친일 행각을 덮기 위함인가? 종로도서관 이범승 동상은 ‘철거’하거나, 최소한 동상 옆에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적시’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인적 청산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틀이 놓인 우리 도서관 분야는 일제 식민 잔재를 제대로 ‘청산’한 걸까. 도서관 용어와 공간, 제도, 운영 면에서 우리는 일제 식민 시대를 얼마나 극복한 걸까. 식민 잔재라는 ‘칸막이 열람실’을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우리 도서관은 친일 청산의 ‘무풍지대’인가.
1985년 11월 9일 대한도서관연구회 엄대섭 회장이 마련한 ‘한일 공공도서관 관계자 간담회’에서 일본 도서관 관계자는 한국 공공도서관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 도서관이 학생들에게 자리를 빌려주는 ‘대석업’貸席業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서구로부터 ‘번안한 도서관’을 이식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도서관을 ‘칸막이 열람실’ 위주로 운영하던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발 빠르게 도서관을 변화시켜 나갔다(일본 공공도서관에서 ‘칸막이 열람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해방 후 우리 역시 미국과 세계로부터 ‘도서관학’(문헌정보학)을 수입했다. 세계 도서관 변화를 직접 확인하고 그 흐름을 따라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일본이 번안해서 이식한 ‘식민지 도서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도서관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과거의 제도와 운영을 관성적으로 답습한다면, 우리 도서관은 언제까지나 ‘식민지 도서관’에 머물 것이다. 34년 전 일본 도서관 관계자가 통렬히 지적한 ‘대석업’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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