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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은 Aug 06. 2021

우리 만나지 말자

현실 부정 아니, 추억을 위해


 하루 종일 독한 더위에 시달리고 오늘의 마지막 샤워를 하고 앉았는데 곁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기에 뜬 이름에 깜짝! 옛날 학교 기숙사에서 같이 살던 두 살 아래 후배 이름이 선명했다. 

이게 웬일이람! 

얼마만이지? 

 

 얼른 받아 "희정아~~" 하고 크게 불렀다. 깔깔깔 하는 여전한 웃음소리 뒤에 "언니~~" 하고 답을 한다.

-이게 몇 년만이냐? 정말 반갑다.

-언니, 언니 번호가 보이길래 전화했지.


 머릿속으로 이래저래 따져 보니 우리 소식 전한 지가 15년이 넘었다.

"잘 지내지?" 하는 내 인사에 희정이는 아이구 뭔 소릴하는 거냐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안 아픈 데가 없고 여기저기 고장 투성이라고. ㅋㅋㅋ

우리 이렇게 늙은이가 된 거야 하고 서로 깔깔거렸다. 갱년기가 오면서 살이 20킬로나 쪘다며 잉잉거려 넌 키가 크잖아 했더니 버럭 한다. 다들 그렇게 말하는데 아무리 키가 커도 그 살이 어디 가겠냐고, 그 와중에 "그래도 언니랑 나랑은 쇄골은 보이잖수? 그러니 보기엔 좀 낫긴 하지"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린 서로 혈압이 있네 없네, 고지혈증 약이 어쩌네 저쩌네 하며 병 자랑을 하고 갑상선 저하증이 있어 굶어도 자꾸 살만 찐다는 희정이의 하소연에 난 부갑상선 수술을 받았노라 맞장구를 쳐주고 수술 잘 됐음 걱정할 것 없다 위로도 받고~~


 내가 3학년 때 신입생으로 방에 들어온 희정이는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지만 커다란 눈에 겁이 잔뜩 담긴 착한 학생이었다. 우린 사이좋게 1년을 잘 지냈고 학년이 올라가 방이 달라지고 졸업하고 결혼하고도 이래저래 소식이 닿아 아주 가끔씩 연락을 하면서 지냈는데 이번엔 정말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었다. 키가 훤칠하셨던 아버지와 웃는 얼굴이 귀여우셨던 어머니가 신입생 딸내미 짐을 바리바리 싸서 긴장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서던 모습이 선하다. 그런데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러 버렸네.


 아들 둘 밑으로 늦둥이 막내를 뒀는데 이제 막 군대 갔다고. 딸 같은 막내가 너무 예뻐 크는 게 아까왔다는 말을 하면서 "언니, 그 녀석이 바로 위 형이랑 6살 차이가 나거든. 그런데 엄마 왜 그렇게 날 늦게 낳았냐고, 형 보다 6년이나 늦게야 엄마를 만나 속상하다 그랬어" 

 이 꿈같은 얘기에 어머나 어쩌면 넌 아들한테 그런 소리도 듣냐고 몹시 부러워했더니 "그래도 지 기분 나쁘면 지랄도 해" 하고 깔깔거린다.


-언니 아들은 장가갔어?

-아유 말도 마, 서른다섯이나 됐는데 이 녀석이 장가갈 생각을 안 하네. 

-뭘 그 정도로, 요즘은 그 나이가 한창 땐데.

-지금 사귀는 사람이라도 있음 마음이 놓이지 그것도 아니니 속 탄다 얘.


-형부는 살 안 찌셨지? 우리 신랑은 배가 많이 나왔어 보고 있음 너무 웃겨.

-형부는 이상 체질이야, 아이스크림에 크림빵, 팥빵 죄 먹어도 안 먹는 나만 살찌고 자긴 날씬해.

-와, 형부는 좋겠다. 그런데 언니가 개미허리였다는 건 아무도 안 믿겠네. 하하하

-23인치였다 그러면 웃어, 아니 비웃어. 그래도 4년 정도 운동하면서 살 좀 뺀 거야.

-언니가 무슨 운동을 해. 진짜 웃긴다. 언니가 운동한다니까

-그지? 내가 운동을 다 했다야, 내가 생각해도 웃겨.


정말 오랜만에 옛날의 "내"가 튀어나온 것 같았다. 너무 마르고 허리가 가늘어 남대문 시장에 가도 맞는 치마가 없어 딱 한 군데 '개미허리'에서야 사 입었던 것, 운동이라고는 완전 젬병이라 교양 체육 시간에 테니스도 배구도 계속 허공에 내질러 재시험을 쳐야 했던 일. 남편도 아들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희정일 통해서 다시 들었다. 


- 언니 여전히 그때 거기 살아? 난 19 년째 그냥 여기 계속 살고 있는 거야.

-얘, 나도 그 집에 계속 살고 있지, 20 년이 넘었다야.

-아이구 못 살아, 나보다 더 하네. 난 집 앞에 한살림이 생겨서 지역 생협 안 가.

-하하하, 나도 바로 집 뒤에 한살림 생겨서 거기로 장 보러 가,

-우린 죄 똑같이 살고 있네. 진짜 웃긴다.


 30 년 전에 생활협동조합 일을 하면서 희정이네 동네 생긴 지부에 소개해 줬었는데 그 소식도 잊지 않고 나눴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는 여전히 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고.


-근데 언니 언니 목소리 스무 살 때랑 똑같애. 하나도 안 변했어.

-너도 똑같애. 정말 고대로다야.


거짓말 같은 참말을 깔깔거리며 하던 끝에 희정이가 말한다.


"언니, 우리 만나지 말자, 이렇게 전화만 하자고, 늙은 얼굴 보지 말고 스무 살 때랑 똑같은 목소리로 전화만 해" 


왠지 코끝이 찡했다. 뻥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고 정말 희정이 목소리는 똑같다. 스무 살 때 깔깔 대던 그 웃음소리도 똑같다. 나도 그럴 것 같다. 희정이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닐 거다. 진짜 나 스무 살 때 목소리랑 똑같을 거 같다. 


"그래 우리 그러자. 만나지 말고 또 이렇게 전화만 하자" 

"언니, 나 이 오밤중에 슈퍼 가야 해. 사내 녀석이 넘쳐나니 하루도 시장에 안 가면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언니 건강하게 잘 지내~~"


스무 살의 희정이가 행복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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